제68화
아카데미의 수업은 각자의 수준에 맞춰 이루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재능에 맞춰진 양질의 강의를]
이제는 누구나 알게 된 구호.
이런 아카데미의 기풍에 따라 여러 학년이 한 교실에 있는 모습이 비교적 흔했다.
학생들은 각자의 이해와 지식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선택할 수 있고, 실력을 증명한다면 선배들과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마법의 습득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은 자신이 인식하는 마력의 형태를 구분하는 것. 두 번째는 구분한 마력의 성질과 비슷한 마법 계통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
물론 1학년은 제외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요? 흠… 어디 보자, 거기 창가 근처에 앉은 청발 학생?”
교수의 눈이 알렌을 가리켰다.
알렌은 지루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일어섰다. 그런 알렌의 모습에 베스틀라가 말을 걸었다.
「왜요,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겨우 이런 문제를? 설마.
「그럼요?」
단지, 너무 쉬워서.
“마법 습득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두 번째 단계에서 쌓은 지식은 술자의 염상에 쌓이게 됩니다. 술자는 자신의 창의력과 이해에 따라 그 지식을 비틀어 현실에 풀어냄으로써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너무 낮은 수업의 수준에 제대로 임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마다 수인과 주문이 달라지는 원인이 되지요. 좋습니다! 다음 옆자리 학생?”
알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왜 여기 있어요? 더 수준 높은 수업은요? 당신, 여기에 이러려고 온 게 아니라면서요.」
마음만은 이런 수준의 수업을 듣느니, 도서관에 박혀 서적을 뒤적거리는 것이 더 유용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럴 수 없었다.
“예, 옙! 제 이름은 루이스라고 합….”
“그래요, 옆자리 학생. 그렇게 마법사에 따라 마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탑이나 학파가 있는 이유가 뭔지 아나요?”
“그게….”
학생들 개개인의 수준을 측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왜요?」
생각이 전해질 때마다 팔목에 찬 둥근 팔찌가 작게 진동했다.
‘입학시험에서 확인한 것은 실력보다 잠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알맞은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학생들 개인의 수준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수업이 그 일환이었고.
“흠… 모르시나요? 모른다면 모르겠다고 해도 됩니다. 학생은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요.”
“…예,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측정한 성적은 학생 개개인의 평가를 통해 그들은 다음 달부터 수강할 과목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도서 때문이지요. 위계와 관계없이 마스터의 호칭으로 불리는 기준이자, 하나의 학파를 세울 수 있는 기준점이 되는….”
그 이후로도 기초적인 마법 이론에 관한 수업이 이어졌다.
위계에 따른 감지력의 범위, 각 속성의 상성, 마법의 속성에 따른 분류….
무려 두 시간에 걸친 수업이 끝나 종이 울렸다.
“다음 수업에 평가 시험이 있을 예정이니 복습해 두길 바랍니다.”
기초 마법 이론을 담당한 노교수가 담담히 교재를 정리하고 교실을 떠나갔다.
“…아, 진짜 이걸 한 달 동안 해야 된다고? 수업 빠지면 안 되나?”
“그러다 평민들이랑 같이 보충 반 가겠다? 방금 저놈처럼”
“개소리하지 마.”
교수가 나가자마자 학생들이 서로 모여들었다. 귀족은 귀족들끼리, 평민은 평민들끼리.
그곳에서도 종족이 나누어진다. 엘프들은 고고하게 같은 씨족들끼리 움직이고, 수인들도 무리를 짓는다.
인간들은 더 복잡했다.
각 나라의 귀족들 사이에도 서열이 나뉘었고, 그 안에서도 파벌이 갈렸다.
‘첫날부터 이런 데 다음날은 어떨지….’
아카데미 측에서 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모를까?
알렌은 그들을 한 번 살피고 관심을 접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었다.
계단식 자리의 맨 구석.
흑발의 머리가 책상과 맞닿아 있었다.
자고 있다고?
‘간 한 번 크군. 걸리면 벌점이 적지 않을 텐데.’
뭐, 그건 내 상관이 아니지. 알렌은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알렌 라인하르트.”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보였다. 하얀 얼굴 위로 다크서클이 더욱 도드라졌다.
3대 가문인 드라기아스 가문의 막내 공자.
“엘닉스 드라기아스.”
“입학시험 때 보고 처음 뵙는군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드라기아스 가문의 엘닉스 드라기아스입니다. 엘닉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겉보기와 다르게 정중했다.
그래서 더욱 수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엘닉스 공자. 라인하르트 가문의 알렌 라인하르트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그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히 웃었다.
“알렌 공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알렌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그의 시선을 잊지 않았다.
공명하듯 울리던 용의 노심도.
‘꺼림칙하나, 지금 바로 적대하기엔 무리다.’
엘닉스가 말을 걸었을 때부터, 아니 움직였을 때부터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3대 가문의 막내 공자인 만큼 그 정도의 관심은 당연했다.
알렌도 입학시험 때 차석의 위치를 따냈지만, 아직 그에게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에게 있어 아카데미 밖의 권세가 더 와 닿았다.
“감사한 일입니다만… 부르신 이유가?”
“이번 점심 식사에 제가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적극적으로 알렌에게 다가섰다.
그의 곁에는 심복인지 추종자인지 알렌을 대우하는 엘닉스의 행동에 불만인 듯 표정을 찌푸리는 자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군요.”
알렌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전에 접촉할 마음은 없었다.
“선약? 상대가 괜찮다면….”
“아니, 괜찮지 않은데?"
나른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어났는지 하이젤이 재밌는 걸 본다는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당신은…, 이번 입학시험의 수석이었던….”
“하이젤.”
“…하이젤 님이셨군요. 알렌 공자와 함께 식사에 초대하고자 하는데 오시겠습니까?”
그 말에 능글맞게 미소지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싫어.”
“초대를 받아 주셔서 감사…, 네?”
“싫다고.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그의 말에 엘닉스의 말이 끊겼을 때부터 참고 있던 추종자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네가 상대하고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지금 당장 수석을 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이미 죽은 망령이 달라붙고 지랄이야.”
그 말에 엘닉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제를 알란 말이다! 사리분별….”
“그만.”
“…하지도 못….”
“그만하라고 했다. 마티아스.”
“…예.”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마티아스라 불린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엘닉스는 소리치는 추종자를 제지하고서 작게 묵례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다음에라도 식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떠오른 고개에는 가까스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이젤의 대답은 간단했다.
“싫은데?”
그의 미소가 다시 사라졌다.
* * *
탁-
“그렇게 거절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어? 음…. 너는 알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구나.”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알렌의 말에 하이젤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건 미안하지만 못 말해 주겠는데?”
알렌은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지었으나, 하이젤의 눈가는 진지했다.
“나는 이 이상 그 새끼들이랑 관계되기 싫어서 말이야.”
“궁금하면 오라고 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진짜 올 줄 몰라서 그랬지. 아, 말은 놓아도 돼. 나도 말을 놓았으니.”
알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는 걸 모두 토해 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
지금 눈앞에 있음에도 그의 곁으로 아주 미세한 힘의 파동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힘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의 집중 없이,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그럼. 그러도록 하지. 그래서… ‘그 새끼들’은 누굴 뜻하는지, 방금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지 답해 줄 수 있나?”
“아마 네 옆에 있는 그 친구도 알 것 같은데….”
그가 명백하게 베스틀라를 눈짓하며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하이젤의 근처에 다가선 이후부터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냥 평범한 검이라는 듯.
그 모습에 하이젤도 어깨를 으쓱이며, 두꺼운 크기의 스테이크를 잘라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말을 돌리려는 그 모습에 알렌도 장단을 맞췄다.
“이곳에 재학하는 학생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으니 신경 쓰는 게 맞지 않나.”
아카데미 내의 식당은 웬만한 식당을 발아래에 둘 정도로 괜찮았다.
식사 시간마다 수천 명은 족히 이용함에도 양질의 품질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요리사들의 우수함을 나타냈다.
“그리고 명목이 제2의 용사를 키워 내겠다는 곳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용사.”
하이젤은 잠시 아련한 얼굴을 하더니, 곧장 그 기색을 지웠다.
알렌은 묵묵히 그 모습을 응시했다.
‘환생이라….’
수백 년 전, 자신을 죽인 호적수가 사라지고 그 검만 덩그러니 자리한 가운데 다시 살아난 기분은 어떨까.
기쁨? 슬픔? 만족? 공허?
세상이 바뀌었다.
용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졌고, 초대 용사라는 빛바랜 칭호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런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율리우스의 독백을 통한 [원작]뿐이니.’
그 한 단면으로 하이젤이란 인물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모자랐다.
알렌이 그에 대해 무언가 안다는 것도 결국 검은 책을 통해 알아낸 정보밖에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너는 이곳에 어떤 이유로 왔냐? 아, 이것도 모르려나?”
하이젤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순전히 궁금증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흔히 다른 귀족처럼 인맥을 쌓으러 왔다는 말은 믿지도 않겠군.’
허나, 상관없다.
“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만약 네가 어느날 갑자기 휩쓸리듯 이곳에 왔다고 느껴진다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니.
“동생 때문에.”
“동생?”
“그래. 내 동생 ‘율리우스’를 위해서 왔지.”
“흠….”
그의 대답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손가락으로 두어 번 탁자를 두드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준비가 안 됐나? 아니, 몸을 보면 그건 아닌 듯한데…. 그렇다면 이곳에 목적이?”
한동안 혼잣말을 하던 그는 몇 번이나 고민하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하. 내가 진짜 이것만 알려 줄게. 눈을 믿지 마. 그리고 한 가지 더 하자면 하■….”
하이젤이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
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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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책이 미친 듯이 펼쳐지며 같은 말을 경고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잠시간 요란하게 바닥이 진동했다.
쿵-
“미친, 뭐야!”
“지, 지진인가?”
“아니, 무슨 일인데!”
소란은 몇 분도 되지 않아 잦아들기 시작했다.
진동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선배들은 소란에 상관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직 1학년들만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얀 책의 반응을 일으킬 만한 것이, 나타났다?
알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희가 현재 신입생 수석과 차석이냐?”
묘한 울림을 담은 시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