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팔강.
초대 용사의 동료였던 여덟 명 이후로 생겨난 칭호.
팔강의 일원은 강해야 하며 누구의 도전이든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이 팔강이라는, 짊어진 명예를 더럽히지 말자는 최소한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강이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한다면, 그렇진 않았다.
당연히 그들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며, 인류에게 적대적이거나 중립적인 이들도 몇 명이나 있다.
그중에는 갈슈딘 아카데미의 이사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사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
겉으로는 호의를 내비치면서도 중립을 표방하는 강자.
아카데미에는 공식적으로 두 명의 팔강이 상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의 강자가 아카데미 내부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건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인가요?”
“어린애 장난일 뿐인데, 이 어르신이 신경 써야 할 일이냐?”
짐승왕 가이온, 팔강의 일익이자 수인의 몸으로 오랜 시간 팔강의 자리를 지킨 그는 비싼 양주를 물처럼 들이켜며 답했다.
하얗게 센 귀가 까딱였고, 얼굴에는 명백히 귀찮음이 묻어 나왔다.
“기껏해야 그 정도로 뭘 호들갑인지… 쯧.”
그의 대답에 짜증 어린 표정을 지은 자크니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지금 저렇게 수상한 모습을 보고도….”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커다란 화면 위로 율리우스가 붉은 가루를 흡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후에 입학시험에 참여하는 모습도.
“일부러 실력을 낮추기 위해 약을 사용하는 모습이 정상이라는 겁니까!”
그가 소리쳤음에도 가이온의 태도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던지 복슬복슬한 귀를 손으로 덮었다.
“아이들끼리의 싸움에 어른은 끼어들지 않는다. 그로 인해 설령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필요한 일이다.”
그의 무심한 말에 자크니르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팔강이라는 자가!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방관하겠다는 말입니까!”
“애송이.”
“…지금 무슨 말을!”
가이온은 그가 분노하는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팔강이라고 불리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자크니르.
세상에 알려진 그의 명칭은, 하늘의 방패.
현재의 팔강 중 가장 어린 나이임과 동시에, 팔강의 자리를 받은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명성도 가이온의 눈에 차지 않았다.
“어거지로 자리를 이어받은 주제에 낯짝이 두껍구나.”
“뭐?”
“비겁한 방법으로 전대 늙은이를 이긴 주제에 말이 많다는 말이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 나가자, 지크니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쾅!
“이 미친 늙은이가…!”
자크니르의 주위로 수백, 수천 개의 광구가 생겨나며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의 위협에도 가이온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왜, 내 말이 틀렸냐?”
가이온이 언급한 일은 그의 역린이었다.
아직까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건 이미 끝난 일이 아닙니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외침에도 가이온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이미 다른 이들도 찬성한 일이란 말입니다!”
팔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업적과 팔강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 업적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이 현재 팔강의 자리에 앉은 자를 이기는 것.
그는 팔강과 다툴 만한 실력이 있었으나, 그의 진면목은 공격하는 것보다 방어하는 것에 있었다.
전대 팔강과 싸우던 그는 마지막 한 수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한정적인 지역에 상대를 가둬 버렸다.
하루가 지났을 때, 상대는 그를 무시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온갖 방법으로 탈출하려고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자크니르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석 달이 지났을 때는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달이 지났을 때, 상대는 패배를 인정했다.
패인의 요소는 무력의 차이가 아닌, 그저 몇 달간의 지속된 격리로 인한 굶주림이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과반수의 동의를 받았고, 저는 당신과 같은 팔강의 일원입니다! 언행에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가?”
그 말에 이제야 그와 눈을 마주친 가이온은 기다란 어금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예, 그러니 당장 사과를….”
자크니르는 말하다 말고 본능적으로 광구를 넓게 펼쳤다.
쾅!
“오호라, 짖는 실력은 있다는 거냐?”
어느새 가이온의 손에는 거대한 대검이 들려 있었다.
투박한 대검의 뒤로 강대한 기파가 몰아쳤다. 성질에 걸맞은 검붉은 오라가 타올랐다.
까득-
얼굴이 눈에 띄게 굳은 자크니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하, 이건 당신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막 팔강이 된 후 맞이하는 차례에 부푼 가슴으로 아카데미로 왔건만, 저런 늙은이가 있을 줄 알았다면 분명 다음으로 미뤘을 것이다.
“그래, 팔강 안에서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겠구나.”
가이온은 기껍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강자존을 지향하는 그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승리한 자크니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부딪치려던 순간, 그들의 사이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하시지요.”
“…아나스타샤.”
“할망구.”
그와 함께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하는 마력에 자크니르는 한숨을 내쉬며 광구를 거두었다.
“…하아. 이번에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그가 물러나자, 가이온도 김이 팍 샜다는 얼굴로 대검을 집어넣었다.
“쯧, 남자가 기개가 없기는.”
그 말에 욱한 자크니르가 대답하려던 찰나, 그들의 사이로 묘령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에요. 더 이상의 다툼은 좌시할 수 없어요!”
“…애초에 그가 아니었다면 싸울 의향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가이온은 자신의 앞에 자리한 그녀의 실력을 가늠했다.
‘한번 싸워 보고 싶기는 한데….’
수백 년간 직접 설계하며 가꾼 이곳에서 싸우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이 도시는, 이미 그녀만의 영지나 다름없다.
거기에 용과 비견될 마력에 아카데미의 모든 지식이 그녀의 손을 거쳤으니…, 가이온도 그녀가 얼마만큼 강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모두를 감수할 가치가 있나?’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 어르신이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
그가 명백히 토라진 투로 소리쳤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일로 다투신 겁니까.”
갈슈딘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그녀는 매번 갈등을 일으키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자크니르의 말에도 가이온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다시 자리에 누워 술병을 기울였다.
“입학시험에서 한 명이, 아니 그를 포함한 몇 명의 학생들이 실력을 감춘 채 들어왔습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 모르니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를 제외하고도 아카데미의 시스템에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의 실력이라면 이따위 문제들쯤 처음부터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의구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우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건….”
“그걸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들, 그 사고는 학생들이 해결할 문제지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의 답에 자크니르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잠깐,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문제들도 일부로…?”
“저희가 키우는 것은 전사지, 온실 속 화초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한 의미를 모를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단련시키기 위해 놔두는 것이었다니….”
문제의 해결책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그는 다소 허탈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간의 암투나 아카데미의 습격 같은 위협은 성장하는데 충분한 원동력이 되지요.”
“내부의 첩자도 마찬가지입니까?”
“적절한 시련은 이겨 낸다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거름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이유로 갈슈딘 아카데미는 세계 최고의 교육 시설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1년에 몇 번이나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너무 커다란 일은….”
“아이의 다툼에 끼어드는 어른을 어르신이 봐줄 이유는 없지.”
가이온의 말이 맞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가이온은 선반에서 새로운 술을 꺼내며 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는 거다.”
“처음부터 설명해 줬다면, 내 꼴이 이렇게 우스워질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자크니르는 조금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알아서 흘러가게 놔두세요. 너무 크게 흘러간다면 막으면 될 일이고, 수상한 자들은 미리 파악해 두고 있으니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참, 만약 여기 학생 중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제자로 삼아도 됩니다. 필요하다면 시간도 조정할 수 있으니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흥.”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이온은 생각이 없다는 듯 코웃음 쳤으나, 자크니르의 눈은 순간적으로 화면의 한 곳으로 향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해 주세요.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도시 안에 있는 것으로 끝이 아닐 테니.”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사라졌다.
가이온은 힐끔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몇 놈이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아직 그의 눈에 찰 만한 놈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특별한 조건에 부합된다면 모를까.
* * *
“…저기가 당신이 지낼 필로소피아 관이고, 그 반대쪽에 있는 게 트라소스 관이에요.”
맑은 하늘은 따뜻한 햇살 아래 구름 한 점 없었고, 아카데미는 다음 주부터 시작될 새 학기로 인해 한산했다.
“트라소스 관은 근접 전투 쪽과 관련된 이들이, 필로소피아 관은 당신 같은 마법사 위주의 학생들로 배정돼요.”
입학시험은 어제 마무리되었다.
알렌은 레이첼을 따라 그녀에게 아카데미를 안내받고 있었다.
“필로소피아 관의 뒷길을 이용하면 빠르게 연구 단지나 도서관으로 이동할 수 있구요.”
기숙사 뒤쪽의 동쪽으로는 고대 유물이나 문헌 그리고 마법을 연구하는 연구 지구가 자리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상업 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카데미 동쪽에 있는 지하철을 타면 어느 지역이든 쉽게 갈 수 있어요.”
북쪽은 여러 생필품과 무기가 생산되는 공업 지구였고, 서쪽은 알렌이 들어왔던 여관이 가득한 주거 지역이었다.
“알렌, 왜 말이 없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그랬….”
“왜요, 연락도 없더니. 이제 말도 무시하려고?”
“…사과하겠다.”
알렌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첼은 어제 알렌을 만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약속을 잡았다.
‘약속이 겹쳤군.’
오늘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와도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마음 같아서는 하이젤과도 만남을 가져 보고 싶었지만, 레이첼의 불같은 기세에 알렌은 그녀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말도 무시하고. 다음에는 뭐, 아는 척도 않을 거죠? 흥.”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레이첼이 몸을 돌려 알렌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당장 어떻게든 그걸 증명하라는 단호함이 돋보였다.
‘연락할 생각은 했었다.’
그는 입학시험을 마친 후 그녀와 만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자는 말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연락하라는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요컨대, 그녀와 그가 생각했던 시기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알렌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네가 원하는 증명을 하겠….”
“…흐.”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흐훟. 장난이에요. 장난!”
“…장난이라고?”
그녀의 웃음에 알렌이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기분 나빴어요? 나빴으면 미안하긴 한데, 저도 마음 졸였단 말이에요….”
그녀는 알렌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알렌, 당신이 제 기분을 알아줬으면 했어요….”
“…….”
“…미안해요.”
“…….”
“알렌? 알렌?”
그녀가 답이 없는 그의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 봐요. 화라도 낼 거면 내….”
그곳에는.
“아니, 나도 장난이다.”
언제 화냈냐는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알렌이 보였다.
“…알렌.”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게 뜨인 눈과 작게 벌린 입이 귀여웠다.
“나도 장난을 한 번 해 보고자….”
“몰라요!”
그녀는 화가 났다는 걸 일부러 보여 주듯 쿵쿵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섰다.
“잠깐…!”
알렌이 소리치자,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면 빨리 와서 손이나 잡아 주던가요!”
“다른 건 필요 없나?”
“다, 다른 거요…?”
그녀의 볼에 작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레이첼은 알렌이 손을 잡아당기자 멍하니 그의 쪽으로 몸이 이끌렸다.
“그래, 이를테면…,”
알렌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남사스럽잖아요…. 갑자기 여기서.”
“글쎄…, 아카데미에 오면 이것보다 심한 걸 하자고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군.”
그가 낮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아, 아악! 악! 말하지 마요! 말하지 말라고!”
알렌이 도망가려는 그녀의 뺨을 붙잡았다. 레이첼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쪽.
“이걸로 만족하나?”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입을 몇 번이나 우물거리던 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속닥였다.
“…네.”
“다행이다.”
“사실,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해요.”
알렌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아무런 근심 없는 웃음이 걸렸다.
스륵-
그때, 그들의 뒤로 한 쌍의 눈길이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아롱졌다.
잠시 후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는 은은한 수목향이 감돌았다.
“알렌 뭐 해요. 빨리 안 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가지.”
알렌은 그녀와 빠르게 상업 지구로 몸을 움직였다.
자신도 그녀도, 오늘 함께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재를 수집한다라.’
그런 행동은 율리우스가 자주 하던 것이었는데.
알렌의 눈이 공업 지구의 한 곳을 향했다.
뿌려 둔 씨앗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