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율리우스는 만족스러운 발걸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네.’
소설 속 지식을 이용해 생각보다 쉽게 정보를 얻었다.
자칫하면 강제로 정보를 뽑을 생각까지 했었는데.
‘원작의 내용이랑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다.’
거래로 정보를 사는 것이 강제로 빼앗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잘못하면 시체의 뒤처리까지 하느라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프시케의 정보망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고.
‘정보의 가격도 꽤 저렴했지.’
미니마 부족과 아라흐니 부족.
오직 대사막에서만 볼 수 있는 이종족들이자 선천적인 사막의 길잡이들.
그들의 위치가 적힌 지도를 받았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도시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여관에 들러 일행들과 곧바로 출발하면 되겠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내보일 반응을 기대한 율리우스는 힘차게 웃으며 여관의 나무 문을 밀었다.
“형님, 제가 방법을 알아냈…”
그리고.
“…습니, 어?”
“율리우스 이제 왔구나.”
알렌과 같이 앉아 있는 이종족들을 보았다.
“어서 앉거라.”
두꺼운 갑각으로 둘러싸인 전갈 꼬리를 단 남성과 두 쌍의 거미 다리가 달린 여성.
“손님들이 기다리시지 않느냐?”
율리우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 * *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율리우스는 알렌이 한 번 더 부르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인사하거라. 우리를 아카데미까지 길을 인도해 줄 분들이다.”
율리우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빠진 인사에도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살벌해 보이는 꼬리와 다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방랑하는 별들을 섬기는 사제이자 그분들의 후예인, 알렉시우스입니다.”
“그와는 다른 별을 따르는 자이자, 그분들의 자녀인 에리니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그녀까지 인사를 마치자, 율리우스는 잠시 알렌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런 말 하기는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이분들과 같이…?”
알렌은 당황한 그의 꼴을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에게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더냐. 그 일로 고민하던 중에 길에서 마주쳤지.”
“상점가에서 말입니까…?”
“그래, 상인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마침 눈앞에서 걸어오시더구나.”
율리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슬쩍 그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기까지.
“왜 무슨 문제가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렌의 말에 율리우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지만, 자신이 구해 온 정보가 쓸모없어지자 속이 꽤나 쓰려 보였다.
“그래서 곧바로 초대했지. 다행히 이분들은 초대를 수락했고, 내 목적을 이야기하자 조건 하나를 내걸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조건은 무엇입니까?”
율리우스의 물음에 알렌이 대답하려는 찰나, 알렉시우스가 탁한 금발을 쓸어내리며 끼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원한다면.”
알렌이 허락하자 알렉시우스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희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그녀에게 눈짓하자 에리니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만약 두 공자께서 아카데미를 입학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단 한 번. 저희 요청에 따라 저희가 지정한 유적의 발굴을 지원해 주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율리우스의 눈이 잠시 갈색 피부와 잘 어울리는 적발의 미녀인 에리니에게 닿았다.
“이 정도의 조건은 공자들에게 그리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것 하나만으로 인맥 혹은 재능을 입증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그들의 실력이라면 유적 발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모래 폭풍의 시기에 움직이는 것은 저희로서도 많은 위험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저희의 조건이 과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알렉시우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마쳤다.
그들의 말이 옳았다.
도움 한 번을 대가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합리적인 대가일 터.
‘나와 율리우스의 힘을 합치면 어지간한 것이 아닌 이상 수월히 처리할 테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율리우스도 그 정도 계산은 마쳤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율리우스가 조건을 받아들이자 그들은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행동이 의외였던 걸까, 율리우스는 의문 어린 얼굴로 알렌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이 거래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저에게 묻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저에게 물었던 겁니까?”
“네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 혼자 결정하겠느냐.”
“…저도 말입니까?”
율리우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도 나와 같은 일행의 대표인데, 나 혼자 일을 진행할 수야 없지.”
율리우스는 쓸모없어진 정보로 인해 쓰라렸던 마음이 단숨에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스틀라는 작게 속삭였다.
「당신, 은근 음험한 거 알죠?」
‘시끄럽다.’ 알렌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잡이를 두드렸고, 베스틀라는 끝까지 꿍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알렌과 율리우스의 대화에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는 훈훈한 눈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지켜봤다.
“알렌 공자께서 동생도 일행의 대표니 혼자 결정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뭡니까.”
“정말 보기 드문 우애입니다.”
그들의 따듯한 말에 율리우스는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던 지독한 생각을 떨쳐 냈다.
‘이런 이들을 프시케처럼 강제로 협박할 수는 없지.’
형님도 보고 있으니.
혼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모르겠다.
“자, 그럼 거래도 받아들였고 시간도 없으니 어서 움직이도록 하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알렌이 다른 일행들에게 짐을 챙길 것을 지시하자, 이넬리아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미리 챙겨놨다는 듯 철저한 준비성을 선보였다.
“부족이 가까이에 있으니 금방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알렉시우스가 에리니와 같이 일어서자, 알렌이 율리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율리우스 너는 다른 볼일이 없느냐?”
“다 마쳤으니 지금 움직이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다 얻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될 수 있으면 쉬지 않고 갈 수 있도록 하지.”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 시작되기까지 대략 2주일이 남았다.
* * *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와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부족들에게 향했다.
그들이 넓은 천막들이 펼쳐진 곳으로 향하자 알렉시우스나 에리니와 같은, 전갈의 꼬리와 거미의 다리가 갈린 이종족들이 달려왔다.
알렉시우스와 에리니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미리 이곳에 소식을 전했는지 일행을 경계하지 않았다.
“알렉시우스 님!”
“에리니 님!”
그들은 순식간에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알렌은 그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종족에 하나의 성별밖에 없다니….”
검은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지식을 보았던 알렌도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나미 부족, 그러니까 전갈의 꼬리를 가진 이종족들은 남자들밖에 없었고, 반대로 아라흐니 부족에서 거미 다리를 가진 자들은 여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머리 색.
‘처음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러나 두 부족에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살펴보니 그들 대부분이 흑발이었다. 알렉시우스나 애리니 처럼 금발이나 적발의 머리 색을 가진 이는 적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
‘흠, 하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만한 이가 평범할 리 없지.’
이쯤에 와서는 모를 수가 없다.
「당신 일부로 알고 접근한 거예요?」
그들의 지위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설마.’
단순히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다.
길을 가다가 만났을 뿐인데 그들이 우연히 아카데미로 가는데 필요한 길잡이였고, 거래를 청한 상대가 우연히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었을 뿐.
이 모든 건 ‘우연’이다.
‘우연이고 말고.’
알렌의 눈이 잠시 표표히 공중을 맴돌던 하얀 책에 닿았다.
그때, 율리우스가 그를 불렀다.
“형님,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알렌은 자연스럽게 책에서 눈을 떼 주위를 둘러싼 이종족들을 가리켰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니 말이다.”
“확실히… 이곳에서만 사는 이들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알렌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너무 부주의했군.’
율리우스가 하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할 뻔했다.
알렌은 조심성을 더 끌어 올렸다. 때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알렉시우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손님들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군요. 죄송합니다. 부족장님께서 기다리시니 따라오십시오.”
부족장은 옅은 금발을 가진 단단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소. 의뢰는 받아들일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렌이 대표로 대답을 하자, 노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않는다오. 운명의 안배란 그런 것이니.”
“운명을 아직도 믿으십니까?”
알렌의 물음에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얼굴로 나지막이 답했다.
“사제니 말이오.”
“…그렇습니까.”
그 말에 알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별들의 사제니, 후예를 자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이에는 종교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알렌은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건 그들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따로 첨언하지 않았다.
‘운명하니 프란시스카 양은 어찌 됐을지 모르겠군.’
분명 무언가 있다는 말투였는데, 키메라 술사의 사건 이후 마탑으로 갔기에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부터 이동하도록 하겠소. 손님이 머물 장소는 알렉시우스가 안내할 것이오.”
그렇게 알렌이 천막을 나가려던 때, 문득 그의 시선이 노인의 옆에 자리한 석판으로 향했다.
“…저건?”
태양을 주위로 아홉 개의 천체가 회전하는 그림.
흔히 볼 수 없는 석판의 그림에 알렉시우스가 흔쾌히 설명했다.
“아, 저 석판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랑하는 별들께서 고대에 내려 주셨다는 석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할 만한 그림이었으나, 알렌에게는 아니었다.
‘키메라 술사를 죽이고 얻은 단검.’
그곳에도 저것과 같은 문양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학회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렇네.”
알렉시우스는 알렌의 물음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별들의 진의를 이해하기 힘든 건 당연하지요. 분명 저희가 이해하지 못할 뜻이 있을 겁니다.”
알렌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의 말에 수긍했다.
“어서 움직이시지요. 아라흐니 족장께서 기다리십니다.”
일행은 천막을 빠져나와 에리니를 따라 아라흐니 부족장에게서 거래의 확약을 받았다. 알렌은 그들을 안내하는 알렉시우스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흑마법사 집단, 에스테도르와의 연관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였다.
“혹시, 아까 석판에서 보았던 그림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 혹시나 이 질문이 무례했다면 미리 용서를 구하지.”
“가끔 저희 부족에 들리는 마법사들도 그런 질문을 하지요, 괜찮습니다.”
“마법사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라 어쩔 수 없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대몰락 이전 그들이 섬기는 성령이 처음 나타나던 날 석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 추가로 현재도 수십 년에 한 번씩 ‘예언’이 내려온다는 것까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알려 준 것만으로도 고맙네.”
그 이후 그들은 하루를 부족에서 제공한 천막에서 보내며 모래 폭풍이 불어오기 전 마지막 정비를 끝마쳤다.
“아마, 모래 폭풍에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열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 안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지.”
그리고 텁텁한 모래바람을 거쳐 추운 밤과 더운 낮을 지나 아흐레가 흘렀고.
“알렌 공자님! 드디어 아카데미에 도착했어요!”
“…그래, 이제야 겨우 도착했구나.”
갈슈딘 아카데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