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그래 어쩔 수 없네. 그렇다면-”
율리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어라.”
“이제 그 공격은 파악했거든요.”
린벨의 눈이 감겼다.
그녀의 발밑을 따라 검은 영역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검다기보다는.’
밤하늘.
저 하늘에 걸린 밤하늘처럼 맑았다.
그녀는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왜 이곳으로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수의 시련은 당사자가 원하는 것과 관련된 시련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프라나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번개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걸음에 간절함을 담았다.
두 걸음에 갈망을. 세 걸음에 기대를.
네 걸음에 바람을. 다섯 걸음에 희망을.
여섯 걸음에 소망을. 일곱 걸음에 열망을.
여덟 걸음에 다짐을.
“발버둥 치는구나!”
그녀가 마지막 발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눈앞에서는 뇌기로 이루어진 용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웃긴 말이야. 자기 감정하나 통제하지 못하면서. 힘은 무슨.”
그녀는 방금까지 읊조리던 모든 것을 잊었다.
“결국, 한계를 정하는 건 나 자신일 뿐.”
린벨의 감정은 처음부터 단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조금의 불순물도 첨가될 수 없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지며, 그녀가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에는 맹세를.
이 아홉 걸음에 그녀가 깨달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노력과 순흑의 능력이.
이 시련을 끝내기 위한 결말이.
수십 개의 감정이 올곧이 하나를 향한다.
발걸음에 밤하늘이 생기고, 그 위로 별이 반짝였다.
“아니, 어떻게 피했…!”
“잘 가요. 공자님.”
별빛이 점멸했다.
밤하늘이 일어나 빙의자를 덮쳤다.
‘정말, 해냈구나.’
전광을 뿜어내던 율리우스의 몸 위로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하늘을 뒤덮던 뇌운이 흩어지고, 고귀한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공자님, 봤어요? 할 수 있잖아요.”
그녀의 눈에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알렌 라인하르트.
자신이 모시던 그분같이 완벽하지도 않고, 여유롭지도 않았다.
약이 없으면 자지 못한다.
몸이 망가지면서도 술과 담배를 놓지 못하고.
말로는 포기하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속으론 걱정이 가득하다.
“왜요, 안 믿겨요?”
그녀가 절뚝이며 알렌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율리우스를….”
붉은 진물로 가득한 그녀의 몸이 보였다.
“그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큭, 그래.”
알렌의 눈에 더 이상 혼란은 없었다.
그는 숨이 차도록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게도 진짜 율리우스 님은 구하지 못했지만요.”
“그건, 이제 됐다.”
“왜요?”
“네가 닿지 않았느냐. 네가 닿았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다.”
“과거는 못 바꾼다면서요.”
린벨의 툴툴거림에 알렌이 우습다는 듯 답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아, 마지막의 기술에 이름이 있나?”
“아니요. 아직은 없어요.”
“그럼 내가 정해도 괜찮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
“무슨 뜻인데요?”
알렌은 웃으며 답했다.
“연기 나는 거울이란 뜻이다.”
“엑, 그게 뭐예요.”
“뭐, 그런 뜻보다는 고대에 몰락한 신의 이름을 뜻하는 게 더 대중적이지.”
“무슨 신인데요?”
“전쟁의 신이자 밤의 신 그리고 사신.”
검은 하늘 위에서 목을 수확하는 그녀의 모습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요.”
“애매하기는.”
알렌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린벨은 차분한 어조로 속삭였다.
“이제 포기하지 않으실 거죠?”
“그래.”
포기한다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알렌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다.
“혼자서 우는 일도 없으실 거고요.”
“그래.”
“밥도 잘 챙겨 먹어야 해요.”
“그래.”
세상이 조각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련의 끝이 다가왔다.
“술과 담배도 안 하실 거죠?”
“그건….”
이번엔 조금 대답이 늦었다.
“빨리요.”
“노력해 보도록 하지.”
그녀를 처음 봤을 적이 떠올랐다.
처음에 시끄럽게 굴 때는 쫓아낼까 생각이 들었는데.
“그리고…,”
세계가 끝에서부터 아스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 시중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에 드셨나요?”
알렌은 자신의 표정이 웃고 있기를 빌었다.
“그래, 내가 받아 본 최고의 대접이었다.”
“얼마나요?”
“나 따위가 받기에 과분할 만큼.”
그녀가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도움이 돼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알렌이 진심을 담아 답했다.
“정말 고마웠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진짜 ‘알렌’에게 안부를 부탁하지.”
“꼭 전해 드릴게요.”
“…너라서.”
그녀의 모습이 멀게 보였다.
옅은 빛무리가 시야에 가득 찼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알렌의 얼굴 위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그녀를 배웅했다.
린벨의 시련이 끝을 맞이했다.
* * *
꿈을 꿨다.
굉장히 긴 꿈을.
“───────.”
하지만 잠에서 깬 순간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중요한 걸 봤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반드─────!”
“저──!!”
생각나는 것은 깨어진 꿈의 파편 사이로 느꼈던 아득한 감정뿐.
수십 개의 감정이 뒤섞여 아스라이 곁으로 흩어졌다.
가장 먼저 스치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오래도록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 것 같은 충만한 행복.
“───스!”
그런 즐거움이 빠르게 흩어지며 슬픔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우울함, 고통, 낙담, 괴로움….
가슴을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감정에 잡아먹히려던 때, 희망이라도 발견한 건지 심장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다.
“──시 ─마! ────!!”
그렇게 환희와 함께 어떤 결의를 품었고, 동시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눈이 뜨였다.
“아.”
눈을 뜬 알렌이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병사들도 하나같이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머리가 어지러웠다.
해야 할 행동이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동생아.”
율리우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침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공자님.”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린벨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한층 깊어진 눈동자.
묘하게 침착한 분위기.
“…린벨?”
무언가 달라진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알렌이 의아한 눈을 하기도 잠시, 그녀는 알렌에게 무엇을 하느냐는 듯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공자님?”
“…뭐?”
린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을 가리켰다.
“공자님께서 병사를 다독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무방비하게 널브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혼란스러워하며 혼잣말을 지껄이는 병사.
무언가를 본 듯 겁에 질려 몸을 떠는 병사.
아직도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눈을 한 병사.
그 모습을 본 알렌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야지.”
힐끔-
린벨을 보았다.
그 전의 어리숙한 모습과는 다르게, 능숙한 자세로 자신의 뒤에 시립한 그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알렌은 그것이 시련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혹시 율리우스와 관련이….
‘아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물어야 할 때가 아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들 정신 차리도록-!”
알렌이 꿈에서 깨어났다.
* * *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같은 실수 따윈 없을 겁니다.”
신수의 능력에 속절없이 당한 탓일까, 기사단장은 비장한 얼굴로 앞장서서 움직였다.
그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남은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숲으로 흩어졌다.
“신수 님의 상태는?”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엘프들은 정신을 차린 즉시 신수를 향해 달려왔다.
능력을 무리하게 폭주시킨 여파인지, 혹은 강제로 타락한 부작용인지, 신수는 흑마법의 부정한 기운에 몸이 좀먹히고 있었다.
의식도 깊게 가라앉아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
그런 신수의 모습을 살피던 나타샤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급히 율리우스에게 다가갔다.
“율리우스 공자, 전의 일은 사과하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예, 네?”
그때까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율리우스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신수를 정화(淨化)하기 시작했다.
그의 뇌 속성 마력은 흑마법과 상극이었으니 이런 일에는 제격이리라.
그렇게 병사들과 기사, 엘프들의 정신이 모두 팔린 틈을 타, 알렌은 거인과 전투를 벌였던 공터의 너머로 향했다.
죽은 거인의 시체와 망가진 공터.
불과 몇 시간 전에 왔던 곳임에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은 지난 것 같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요? 갑자기 다들 쓰러져서는!」
알렌의 무딘 감상이 불만이었던 걸까, 그의 뒤로 몇 명의 병사가 따라오고 있음에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한순간에 정신을 차려서 망정이지, 몇 년 동안 그대로였으면 어쩔 뻔했어요! 방심이나 하고!」
“…그건 미안하긴 한데, 정말 신수의 시련을 받지 않았나?”
「받지 않았다니까요? 누가 습격할까 봐 지켜 줬는데, 고맙다고 말은 못 할 망정!」
“…정말 고맙군.”
「에헴. 역시 저밖에 없죠?」
알렌은 쓰게 웃으며 평소처럼 소리치는 베스틀라를 보았다.
‘신수의 시련에 들어가지도 않다니.’
무생물은, 아니 에고 소드는 대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
그렇다기에 폭주로 강해진 능력과 생명체의 정신을 끌어당기는 능력이라면 그녀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혹시 원하는 것이 없어서?’
신수의 능력이 시련과 보상이니, 처음부터 원하는 것이 없다면 신수의 능력을 회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알렌은 스스로 가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빨리빨리 와요! 아까부터 여기가 너무 궁금했다니까요?」
그녀가 아까 거인에게 보인 반응만 봐도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녀의 정신력이 신수보다 고등하기에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다.
“알았으니 천천히 움직이지. 뭐가 있을지 모르지 않나.”
알렌은 흑마법사의 함정에 빠져 신수의 시련에 휩쓸린 이후 부쩍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건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챙겨 갈 것도 없겠군.”
허물어진 벽을 지나니 어질러진 실내의 모습이 보였다.
무더기로 쌓인 괴물의 시체와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들. 실내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사방의 벽은 무너져 내려앉았다.
부서진 벽과 일직선으로 뚫린 통로의 흔적을 볼 때, 죽은 거인이 여기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키메라였나.’
재생력과 힘 모두 뭔가 어설프더라니.
겉모습만 그럴듯하지 제대로 된 거인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알렌은 곧바로 감지력으로 실내를 훑어보고는, 건물 외곽에 대기하던 병사들을 불러 수색을 지시했다.
그러나 쓸 만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바닥과 벽면에 가득한 그을림과 무언가를 불태운 듯한 흔적은 중요한 정보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무언가 발견한 게 있나?”
알렌의 물음에 베스틀라는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안에 들어오면 뭔가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요.」
“유감이군.”
「아니에요.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녀는 홀가분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쾌활한 어조로 소리쳤다.
「이제 여긴 됐으니 저기나 가 봐요! 신수가 깨어난 것 같으니까요!」
알렌은 수색병들에게 혹시 모르니 남은 자료를 수거하라 명하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저게 진짜 신수구나….”
“또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멀쩡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병사들의 곁을 지나 도착하니 막 신수가 율리우스에게 사람 몸통만 한 알을 건네주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