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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55화 (55/212)
  • 제55화

    거인의 모습은 이상했다.

    알렌은 거인의 유해를 본 적이 있었다. 뼈밖에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유골의 주인이 거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거인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눈, 코, 입 모두가 반쯤 헐거워진 실로 꿰어져 있다. 그 실의 틈으로 보이는 모습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몸은 누더기처럼 기워진 흔적이 가득했고, 결정적으로 거인의 팔은 두 개가 아니었다.

    총 여섯 개.

    그가 봤던 유해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혹시 알렌이 알지 못한 변종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러한 가능성은 접어 두었다.

    만약 그렇다면 베스틀라가 그렇게 반응할 리 없으니까.

    알렌은 고개를 힐끔 내려 베스틀라를 확인했다.

    「아.」

    그녀는 거인의 모습을 본 이후로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언제나 시끄럽던 그녀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었구나. 그래…, 남아 있을 리 없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알렌은 그녀에게 나중에 이것에 관해 물을 것이라 다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으아아아아!”

    거인의 공격에 기사 한 명이 하늘을 날았다.

    콰과광-

    날아간 기사는 나무 몇 그루를 부수고 난 뒤에야 땅에 처박혔다.

    병사들이 신속하게 다가가니 기사는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공격을 흘려라! 직접 맞으면 안 된다!”

    “선배님! 리암이…!”

    “리암은 살아 있으니까, 닥치고 집중이나 해!”

    선임 기사는 동요하는 후배에게 소리치며 방패를 들었다.

    쿵!

    “…크윽.”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음에도 손목이 박살 날 뻔했다. 벌써부터 우그러지는 방패의 겉면에 기사는 식은땀이 흘렀다.

    거인은 강했다.

    영지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위 전력들이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강철 같은 육체는 웬만한 공격으로는 상처도 나지 않았고, 기껏 상처를 내더라도 괴물 같은 재생력에 금방 회복해 버렸다.

    거대한 덩치와 6개의 팔에서 나오는 빈틈없는 공격은 기사들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정예 병사는 이런 살벌한 공방 속에서 함부로 끼어들기 힘들었다.

    잘못 끼어들었다가 동료와 자신 모두 다치기 십상이었으니.

    하지만 이대로라면 거인을 쓰러트리더라도 많은 희생을 치를 게 분명한 상황.

    아무리 기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 그들이 죽는다면, 영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어야 했다.

    ‘나와 율리우스의 세력이 크게 불어날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수고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니.

    공과 사는 구분하되, 율리우스의 변화를 묵인한 것을 구분 지어 따질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자의가 없다 할 수 없으니.’

    신체에 넘치는 활력이 거력으로 전환된다.

    억누르고 있던 힘이 해방됨에 따라 느껴지는 전율감에 알렌은 강하게 땅을 박찼다.

    쿵!

    전력으로 내디딘 걸음에 바닥이 강하게 패였다.

    마침 눈앞에 기사 한 명이 위태롭게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거인의 육중한 주먹은 요란스러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받아 내기 어려울까?’

    아니 저 정도라면.

    알렌이 상대를 가늠하던 때, 거인의 공격을 버텨 내던 선임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미치겠네.’

    벌써 기사 세 명이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방패는 몇 번을 막았다고 벌써 고철 덩어리로 변해 버린건지.

    “…빌어먹을.”

    기사단장님이 있으면 달랐을 텐데.

    오우거와 대등하게 겨루어 끝내 쓰러트리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아-아-아-아!”

    거인은 몇 번이나 공격을 흘려 내는 그가 거슬렸는지 다른 기사들을 무시하며 그에게 돌진했다.

    공격을 흘린다.

    고철로 변한 방패는 삐걱대며 거친 신음을 흘렸고, 중첩된 공격에 손목은 아릿했다.

    “크윽, 제길.”

    쏟아지는 공격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기사들은 거친 거인의 기세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한걸음에 땅이 진동했고, 빗나간 공격에 바닥이 부서진다.

    끝내 그의 방패가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던 그때.

    쾅!

    바람이 일었다.

    “내가 해결할 테니, 뒤로 물러나게.”

    어느새 다가온 알렌이 공격을 막아섰다. 선임 기사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들이 상대하기 벅차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럼 공자님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선임 기사는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쾅! 쾅!

    알렌이 거인의 공격을 대등하게 받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의 공격에 공기가 웅웅- 울렸다. 묵직한 주먹은 뼈마디를 박살 낼 만큼 강맹하며, 강철을 우그러뜨릴 만큼 패도적이다.

    그런 공격을 알렌은 물러서지 않고 막아 내고 있었다.

    “어서!”

    “…알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선임 기사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자 알렌은 거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흩뿌린 감지력에 거인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기사들과의 격전은 절로 거인의 강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최소 오우거 정도인가.’

    기사라면 몰라도 마법사는 5위계는 되야 상대할 수 있겠지.

    거인은 밀려나지 않고 맞서는 알렌이 짜증이 나는지 괴성을 내지르며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묵중한 폭력을 동반한 괴물이 명확한 의지를 갖추고 알렌을 노린다.

    전생의 그였다면 단 한 방에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과거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적지에서의 고행이 머릿속을 스쳤다. 멈추지 않고 펼쳤던 검의 움직임은 무의식에 스며든 지 오래였고, 베스틀라에게 배웠던 비기가 알렌의 검을 통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지금의 알렌은 전생의 그가 아니었다.

    요툰스베르드 일계(J?tunnsverd 一界)

    인간의 가장 강한 공격은 분노에서 비롯된다.

    마나그람(Manngram)

    전신에서 끌어온 힘이 마력으로 증폭되며 분노에 벼려졌다.

    맹렬하게 떨어지는 참격은 이름 그대로 분노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검에 마력이 실리며 가속한다.

    베스틀라는 순식간에 거인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푸슉-

    거인의 단단한 피부도 베스틀라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가슴이 쩌억하고 갈라지는 고통이 익숙하지 않은지 크게 괴성을 내질렀다. 실밥에 꿰매진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닐 텐데?

    놈의 눈이 살의에 물들었다. 피가 빠르게 멎으며, 근육이 재생된다. 감지력은 거인의 근육이 크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네 개의 손이 움찔거렸다.

    비슷하다. 그러나 다르다. 어디서 비슷한 크기의 손을 구했나? 아니면, 이런 거인이 더?

    “공자님!”

    일전을 지켜보던 선임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알고 있다. 생각이 멎는다. 마법사의 이성은 어느 상황에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알렌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지저 세계의 그림자는 헤아릴 수 없기에 무한하다.

    일계가 어느 상황이든 최적, 최선의 일격을 선보인다면, 이계는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요툰스베르드 이계(J?tunnsverd 二界)

    이르파스카더스(Irfascadus)

    그림자가 아롱거리며 춤을 췄다.

    한걸음에 그림자가 솟구치며 그의 뒤를 따른다.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걸음이 늘어날수록 그림자는 늘어나며 춤을 춘다. 거인의 눈은 알렌을 쫓지 못했다.

    알렌은 실타래를 퍼트리며 베스틀라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냥 맞아도 상관없잖아요? 내 말 좀 믿어 보라니까요?]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만, 평소라면 저렇게 땍땍거렸겠지. 그녀는 많이 맞아야 잘 큰다며 피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아쉽게도 알렌의 취향은 반대였지만.

    퍼트린 마력은 심상에서 정련된 의념을 따른다. 용의 노심이 뱃고동을 울리며 크게 울었고, 공간을 점유한 실타래는 하나로 얽히기 시작한다.

    [공간] [소리] [진동] [충격] [영혼] [진천]

    수천 가닥이 합쳐진 물체는 이윽고 하나의 종으로 화했다. 실타래는 종을 빚어 내고, 빚어진 종은 공간을 울린다.

    뇌종 우레.

    웅─────

    천둥소리가 터져 나갔다.

    정면으로 소음을 맞이한 놈의 고막이 파열되었다. 괴로운 듯 괴성을 지르는 휘두른 놈의 발작에 나무가 박살 났다.

    금방 회복되겠지만, 알렌이 원하는 것은 거기까지의 틈이었다.

    일계를 내지르며 놈과 자신의 차이를 분석했다.

    놈은 거인이었다.

    팔이 여섯 개든, 생각한 것보다 작다고 한들, 놈은 베스틀라와 같은 거인임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다.

    요툰스베르드 일계, 마나그람.

    분노에 벼린 검날이 거인의 관절을 찢었다.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알렌의 검을 모방한다. 수십 개의 검격이 사방에서 거인의 살가죽을 두드렸다.

    거인은 박살 난 관절을 부여잡으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알렌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거인이라면, 이 정도로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세를 점하기에는 충분할 터.’

    재생력을 확인했고, 시선을 분산시켰다. 고막을 터트려 혼란을 줬으며, 관절을 부숴 행동을 묶었다.

    그런데도, 거인은 살아 있었다.

    찢겨진 피륙을 끊임없이 재생하며, 일방적인 폭력에 대항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그 모습에 병사들이 뒷걸음쳤다.

    ‘저런 괴물을 저렇게 만든 공자는 대체….’

    선임 기사는 멍한 얼굴로 전투를 보고 있었다.

    사실 곧바로 공자님이 나선 직후 후퇴를 염두에 뒀지만, 거인을 압도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병사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전투를 직관했다.

    ‘공자님도 율리우스 님께 밀리지 않는구나.’

    선임 기사는 일전에 왕도에서 율리우스 도련님이 보였던 압도적인 위세와 지금의 알렌을 자연스럽게 비교했다.

    사실 그의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지만, 현재 알렌의 모습은 기사단장이 오우거를 쓰러트렸을 적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어느 쪽이든 괴물이군.’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임을 깨달은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아-아-아-아!”

    어느새 공터 뒤편의 건물까지 물려선 놈은 순간 두려운 표정을 짓더니 크게 포효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그 모습에 알렌의 움직임이 멈췄다.

    포효에 담긴 피어 때문이 아니었다. 놈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신이 피에 물들어 있어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벌써 재생이 안 된다고? 재생력을 다 쓴 건가? 이렇게 빠르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피부를 찌르는 살의의 사이로, 알렌은 움직였다. 이르파스카더스. 순간 노심에 무리가 갈 정도로 마력이 뭉텅 빠져나간다.

    거인이 오싹한 살의를 발했다. 내려찍은 발에 바닥이 쩍 갈라졌고, 크게 젖힌 여섯 팔로 인해 거대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느껴진다.

    두려움 섞인, 일그러진 시선이.

    강대한 기세 속에 가려진 놈의 발악이.

    단순히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작은 영역 안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을 찌르듯 흘러들어 온다. 놈이 약한 게 아니다. 다만, 알렌의 능력이 거인에게 유리했을 뿐이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마법사는, 신이나 다름없다.

    거인이 얼마나 강하던, 어떠한 능력을 갖췄든 어떻게 움직일지 안다면 의미가 없다.

    거인의 용솟음치는 괴력이 난폭하게 부딪치며 땅을 분쇄한다. 흙더미가 사방을 비산했고, 불어온 바람이 알렌의 머릿결을 흩트렸다.

    쇄도하는 팔의 사이를, 알렌은 천천히 거닐었다.

    걸음에 느릿한 박자가 실린다.

    흩어지는 발 구름에 검은 잔영이 너울거렸고, 분산된 시선 사이에서 하나의 인영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거인의 여섯 팔이 그림자를 뭉개며 그를 향해 떨어졌다.

    터져 나가는 대지 사이로 그림자가 파편이 되어 산란하며 무질서하게 부유하기 시작했다.

    마나그람.

    무리 짓던 그림자가 날카로운 검이 된다. 전후좌우에서 떨어져 내리는 일격 모두가 분노에 정련된다. 최선, 최적의 일격이 호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거인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주먹 한 번에 땅이 요동치며 지형지물이 분쇄되었고, 스쳐 지나간 공격에 알렌의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림자 속의 알렌은 형체가 없었고, 그를 쫓는 거인의 손짓은 허공만을 맴돌았을 뿐이었다.

    거인의 살점이 저며진다. 수십, 수백 번을 두드린 가죽이 떨어져 나갔다.

    거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알렌도 그에 의문을 내비쳤을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다.

    강직하게, 간결하게 또 강하게.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서.

    [기교를 익힐 필요 없다고 해서, 약점을 노리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베스틀라의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겼다. 매일 아침 배웠던 그녀의 검을, 알렌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훤히 노리라고 있는 곳인데, 찌를 수 있을 땐 찔러야죠!]

    처음은 발목을 노린다.

    [애초에 약점이 있는데 노리지 않는 것도 웃기잖아요?]

    다음은 맨 윗팔의 겨드랑이.

    가장 위의 팔이 움직이지 못함에 따라 아랫팔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만든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독이다. 차근차근 때를 노려서.

    거인을 맴도는 그림자 사이로, 시야를 벗어난 휘두름에 질긴 가죽을 뚫고 거인의 발목이 갈렸다.

    균형을 잃은 거인이 팔을 뻗어 바닥을 다급히 짚자, 알렌이 아래에서부터 놈의 겨드랑이를 검으로 꿰뚫었다.

    그다음은 머리, 완벽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거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강제로 짓 삼켰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겠다는 듯.

    알렌은 무심한 얼굴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완벽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땅을 내딛고 온 힘을 실었다. 근육이 수축하며 준비한다. 신체에 깃든 마력이 위력을 증폭시켰다.

    감정을 제물로, 분노를 연료 삼아 최상의 일격을.

    요툰스베르드 일계(J?tunnsverd 一界)

    마나그람(Manngram)

    알렌의 검격이 거인의 목을 수확하려던 그 때.

    「잠깐만요!」

    베스틀라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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