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빨리, 저쪽이요! 저쪽으로 가요!」
“…뭐?”
알렌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육성으로 답했다. 그만큼 의외였기 때문이다.
“공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기사는 알렌이 갑자기 말을 끊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알렌은 고개를 흔들며 빠르게 답했다.
“마법으로 숲을 살펴보는 중이었네. 잠시 집중을 하게 조용히 있어 줄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알렌은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베스틀라 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왜?’
그녀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왜 그녀가 말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
다른 사람이 있을 때나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베스틀라에게만 따로 말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자칫 대화가 섞여 버린다면, 남들에게 정신병자로 몰리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알렌은 그녀와 약속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기로.
「나중에 다 말해 드릴 테니까! 저기, 저쪽으로 가 주세요!」
그렇기에 지켜져 왔던 불문율이.
「빨리요!」
이 순간 깨져 버렸다.
「한 번만 제 말을 들어주시면 안 돼요?」
그녀는 알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가겠다는 듯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알렌은 그녀가 정말 가 버리기 전에 덜컥거리는 손잡이를 두어 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나를 따라오게.”
그의 말에 대기하던 기사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래, 마법으로 살펴보니…, 걸리는 게 몇 가지가 있군.”
“오오…!”
기사들은 마법에 대한 문외한이었기에 그의 말에 찬성했고, 베스틀라도 알렌이 움직일 기색을 보이자 얌전하게 변했다.
「나중에 다 말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제 안내를 따라 주세요.」
아니, 검체는 가만히 있고 입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말이 옳겠지.
「우선 저기, 뾰족한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줘요.」
알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 자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기사들이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이 뒤따랐다.
“모두 출발! 각자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숲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 * *
알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괴물에 검을 내리찍었다. 거력이 담긴 검격은 머리가 두 개 달린 오크의 몸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수인을 맺자 가까이 달려오던 놀의 머리가 충격파에 터져 나가며 파편을 흩뿌렸다.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숲에 들어선 후, 알렌의 예상대로 괴물들이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역시 모두 이곳에 있었나.’
알렌은 핏물을 털며 전황을 살폈다.
“후방 막아!”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버텨라! 너희들의 뒤에는 기사단이 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병사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침착하게 습격을 방어했고, 위험할 때마다 대기하던 기사들이 몰아치자 괴물들은 맥을 추리지 못했다.
생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들은 모두 정리됐고, 사상자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 4명! 사상자 전무! 모두 자잘한 부상이라 전투 속행 가능합니다!”
“빠르게 정리한다!”
그렇게 알렌은 다시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앞에 있는 구덩이에서 살짝 오른쪽!」
괴물들은 계속 공격해 왔다.
키메라, 언데드, 그린 스킨 그리고 기괴한 괴수까지.
「앞에 바위 더미는 무시하고, 그냥 올라가요!」
마경화 되기 시작한 숲에서는 옅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짙어지기 시작했고, 다리가 늘어나거나, 촉수가 달리는 등 기괴하게 뒤틀린 괴수들도 나타났다.
알렌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습격의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워낙 서서히 줄어들었기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의 등장 빈도가 줄어들었다.
병사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알렌은 되려 긴장을 끌어 올렸다.
‘고작 이 정도 뿐이라고?’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던 사건은, 타락한 신수를 제외하더라도 백작가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사상자 없이 수월하게 해치울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알렌이 점점 깊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신수를 제외한다면 지금 병력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약했나?’
그 사이에도 일행은 베스틀라의 안내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뒤틀린 나무 사이로 썩은 내가 진동한다.
바닥에서 버섯이 네 갈래로 갈라진 주둥이를 날름거렸고, 목적지로 향할수록 진해지는 질척한 사기(死氣)에 기사들도 몸서리쳤다.
‘마치 유인하는 것 같은….’
알렌이 어렴풋이 적의 의도를 예측하던 그때, 베스틀라가 외쳤다.
「이 앞이에요!」
벌써 도착했나?
알렌은 그녀의 말에 생각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파괴된 듯 쑥대밭으로 변해 버린 공터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주위로 명백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리고 그 공터의 중앙에.
“그르륵-.”
5m 크기의 거대한 크기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 그리고 여섯 개의 팔을 지닌 괴물, 아니.
“거, 거인이다!”
거인이 온몸이 실로 꿰매어진 끔찍한 몰골을 드러내며 크게 울부짖었다.
“그-아-아-아-아-아!”
숲이 울리며 새들이 날아올랐고, 거인이라 소리친 병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막았다. 기사들이 급히 거인에게 달려들자, 거인도 기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 아?」
그 혼란 사이로.
「아.」
베스틀라가 있을 수 없는 것을 마주한 듯, 망연자실한 탄성을 내뱉었다.
* * *
율리우스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신수의 숲을 헤쳐 나갔다.
그의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고, 얼굴에는 자신감만이 자리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지 아십니까?”
그의 권유에 강제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카밀라는 불안감이 어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명확한 목적지를 아는 듯한 그의 모습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래.”
“적들이 어디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그를 살폈다.
[신수를 타락시키려는 흑마법사를 막고, 제한 시간 내로 신수를 구하세요! 제한 시간 : 0 : 4 : 11]
[보상 : 신수의 호의, ???]
당연했다. 퀘스트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수는 없는 노릇.
율리우스는 항상 꺼내던 편리한 변명을 꺼내 들었다.
“그래, 저택의 서고에서 신수의 숲에 관한 정보를 얻었지.”
“오오! 역시 공자님!”
“역시 철저하시군요, 율리우스 도련님!”
다른 기사들은 그의 대답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었고, 카밀라 역시 그의 망나니였을 적과 다른 모습에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 최소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테니까.”
율리우스는 그들의 칭송을 들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맵 오픈.’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자, 며칠 전에 새로 열린 시스템 [맵]이 보였다.
나침반 모양의 레이더에는 흑마법사의 위치로 추정되는 붉은 점들이 전방에 모여 있었다.
“괴물들이 앞을 막지만 않으면 30분 정도? 그래도 다들 긴장은 늦추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카밀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준비성이 철저하시군요.”
“이제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들어?”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리우스는 그 틈을 타서 한 번 더 권유했지만, 카밀라는 칼같이 거절했다. 그러나 아까보다 대답하는 힘이 약해져 있었다.
‘조금만 더 권유하면 되겠어.’
바이론이나 아냐가 있었으면 설득하기 더 쉬웠을 텐데.
그 두 명은 따로 시킨 일이 있었기에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그의 시녀인 레이나만 그림자처럼 따라왔을 뿐, 그래도 율리우스는 긴장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간단하지.’
홀로 왔다면 모를까, 병사와 기사도 있겠다, 거기에 기사단장까지.
기사단장의 일격을 눈앞에서 목도한 율리우스는, 이번 일이 무난하게 끝날 거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적들이 누군지 안다.
어떤 계략을 꾸밀지 알며, 무슨 일을 벌일지 알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보지 못했으나, 충분히 강자 반열에 드는 기사단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화(淨化)의 힘이 가득해 흑마법과 상극인 그의 뇌 속성 마력까지.
이쯤 되며 실패할 게 이상할 지경이다.
‘히든 보스나 잡고 [무지개 마안(S)]이나 강화해야지.’
거리도 얼마 안 남았으니, 몬스터는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그의 생각이 씨가 되었던 걸까.
휘웅!
갑작스럽게 옆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본능에 따라 몸을 비틀었다.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는 놀의 주둥아리가 옆구리를 스쳤다. 곧바로 검을 내리치자 피할 새도 없이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도련님!”
기사의 외침에 고개를 숙이자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강철 새가 떨어져 내렸다.
“습격이다! 다들 준비해!”
“공자님! 하늘에서 새들이…!”
하늘을 바라보자, 은회색의 새들이 눈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져 내렸다.
“내가 처리할게!”
율리우스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진청색의 뇌기가 검을 타고 흐른다. 떨어져 내리고 있는 새를 피하며 검기를 날리자, 파직거리는 전류가 하늘을 뒤덮었다.
끼에에에엑-
한동안 비명을 지르던 새무리는 잠시 버틸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지. 병사들은 어때?”
“공자님의 빠른 판단 덕분에 피해는 적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병사들이 침착한 얼굴로 좌우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막아 대고 있었다.
“공자님, 저는 그럼 지원을 하러 가겠….”
율리우스의 안전을 확인한 카밀라는 빠르게 다시 몸을 돌려 병사들을 노리는 괴물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
탁-
그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뭐 하시는 겁니까!”
“더 지원이 필요할까?”
“당연히 더 필요….”
쾅!
“와아아아!!”
그녀가 급히 눈을 돌리니 그녀가 노리려던 괴물들은 이미 육편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미 주변에 몰려온 괴물의 대부분은 기사단장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정리되는 중이었다.
“기사단장이 다 처리할 것 같은데?”
“…그래도 제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녀는 율리우스의 만류를 무시하고 남은 괴물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게 자신이 할 일이었으니까.
“고지식하기는.”
그래서 끌어들이고 싶은 거지만.
엑스트라의 목숨 따위, 그에게는 얼마가 사라지든 상관없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문제겠지.
‘그래도 동료라는 건가?’
율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다 맵을 확인했다.
흑마법사를 상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맵이 이상했다.
“왜 붉은 점이 바로 옆에 있….”
“-죽어라.”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반응이 살짝 늦었다. 왜 놈들이 여기에 있지? 갑자기 움직인 이유가 뭐야.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먼저 맞는다.’
몸을 최대한 꺾었다. 진청색의 전류가 순식간에 몸을 뒤덮으며,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그러나, 이대로는 늦는다. 먼저 발견했더라면 밀릴 일이 없었을 텐데.
‘…너는 진짜 뒤진다.’
율리우스의 분노에 찬 시선이 습격한 자를 향했다.
그렇게 묵색의 대검이 그의 머리를 금방이라도 쪼개 버리려던 그때.
쾅!
횐색 빛의 신형이 묵색의 검 격을 받아쳤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공자님.”
“아깝군.”
“씹…!”
율리우스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빠르게 기사단장의 뒤로 물러났다.
그가 습격당한 모습에 기사들이 급히 율리우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몸에 혹시 부상은….”
율리우스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뒷목이 서늘했다. 불안한 마음에 급히 맵을 다시 살피자 빠른 속도로 붉은 점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시발!”
“공자님, 갑자기 무슨…!”
기사들이 그의 욕지거리에 놀란 찰나, 거친 땅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검은 불구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다들 대열 맞춰! 흑마법사 놈들이 온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머뭇거리던 병사와 기사들이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놈들을 막아라!”
“다 죽여라! 흑마법사 놈들이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내렸고, 전방에 있던 붉은 점들이 모두 몰려왔다. 저주와 흑마법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정체불명의 흑기사와 기사단장이 부딪쳤다.
“모든 걸 쏟아부어라!”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율리우스는 가까이 다가서던 듀라한의 몸을 반으로 가르며 뇌까렸다.
“시발.”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 * *
나타샤는 숲에서 들려오는 폭음을 들으며 작게 조소했다.
“공주님, 저들을 지원하는 건….”
“됐어요. 제인. 저들은 아직 씨앗을 사용하지도 않았는걸요?”
급박한 상황이라 사용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타샤는 그들이 신호를 줄 때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신호를 주더라도.’
전투 한 번을 이겨 내지 못할 전력이라면, 그들이 지원을 온 의미가 없지 않나.
“기억하세요. 제인. 우리의 목적은 어린 신수 님을 회수해 가는 것에 있어요.”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괜찮아요. 저들도 그만한 강자가 있었으니 저 정도의 위협은 알아서 해결하겠죠. 저희는….”
그녀가 눈을 돌리자 수십 명의 엘프가 앞 사람의 등을 대고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흑마법사 한 명을 처치하는 것보다, 신수님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해요.”
엘프들의 머리 위로 하나의 작은 인간 형체가 무언가와 공명하며 소리 없이 울부짖더니, 곧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어찌 됐든 저들 덕분에 적의 전력이 줄어들었으니….”
나중에 감사는 표해야겠죠.
나타샤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율리우스의 얼굴을 지워 내며 나뭇가지를 밟았다.
“가요. 더 늦기 전에.”
“예, 공주님.”
그녀가 신수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향하자, 그녀의 뒤로 수십 명의 엘프가 소리 없이 나무 위를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