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네가 그걸 안다는 말이냐?”
알렌이 당당한 어조로 말하자, 내부에 자리한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알렌은 지체할 필요 없이 곧바로 답했다.
“지금의 사건은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 아니, 잠깐….”
가이엘의 무기질적인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말없이 눈을 뜬 기사단장도,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가델도.
그 모두에게서 갖가지 감정이 흘러나왔다.
기대, 의심, 놀람.
이 상황은, 확실하게 그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예, 일전에 베르겐에 갔을 때 상인에게서 우연히 듣게 되었지요.”
실제로 소네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지만,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럴듯하게 보이기만 하면 되니.
“그가 말하기를 신수의 숲 근처에서 전부터 흑마법사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읊는다.
“그로 인해 신수의 숲에 경계가 크게 삼엄해졌다고 했죠.”
“아니, 잠시… 그래. 다이크 상단이라고 했나? 그 상단주가 엘프와 연이 닿아있다는 건 유명하니….”
잠시 생각을 해 보던 그는 알렌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엘프들이 처음부터 저희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겠지.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은 영지의 꼬마들도 아는 사실이니.”
“그리고 만약 엘프들에게서 온 정식 요청이었다면, 한 명만 오지 않았을 겁니다. 정식 사절단을 보냈겠지요.”
“잠깐, 그 말은….”
가이엘이 알렌의 말에 천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원을 요청한 엘프는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예, 그것이 아니라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 만큼 봉쇄되었다는 말이 옳겠지요.”
가델은 알렌의 통찰력에 엘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아들이라는 건가.’
다친 엘프 한 명이 도착했다는 사실로 여기까지 추측해 내다니.
물론 다이크 상단의 정보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추측할 수 없었겠지만, 그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도 그 여자를 닮아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
“분명 여기까지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알렌은 눈을 감고 정령의 샘에서 느꼈던 정령 친화력의 느낌을 되살려 주변에 정령을 실체화시켰다.
-후웅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여러 색의 구체가 상시로 색을 뒤바꾸며 그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정령, 이더냐?”
가이엘의 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
알렌은 그 모습을 내심 유쾌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아직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그는 알렌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나 친화력은 어떨지 몰라도, 정령에 대한 재능은 없었을 텐데….
“지난번 마법에 진전을 얻었을 당시, 약간의 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이엘은 그의 설명에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령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기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랍기는 하다만…, 그게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저는 계약을 하지 않았지만, 이 정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알렌은 가이엘의 표정이 어떤지 살폈지만, 그는 언제 표정이 깨졌냐는 듯 다시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수많은 흑마법사, 전투, 후퇴, 패퇴, 화재, 괴물 그리고… 타락하는 숲? 신수? 이건 제가 아직 미숙해 알아들을 수 없더군요.”
알렌이 친화력으로 실체화시킨 정령을 다시 되돌리며, 가이엘과 눈을 마주쳤다.
“결론을 내리자면, 엘프들은 위험에 빠져 있음이 확실하며, 저희는 그 점을 이용해 엘프들과의 관계 회복의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누구도 그의 말을 끊지 못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흑마법사가 영지 근처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저희가 그들을 토벌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의 논리정연한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실질적으로 얻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저희는 가야 합니다.”
알렌은 이걸로 끝이라는 듯 마지막 이점을 입에 담았다.
“엘프들과의 영토 경계에 영향력을 다시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외부에서 보기에 가문의 부흥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뒤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율리우스와 알렌이 미래에 세울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려 세계를 구하는 일인데.’
알렌은 냉소하며, 미래의 ‘영웅’이 될 놈을 힐끔 바라봤다. 율리우스는 멍한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내부는 정적으로 변했다.
가이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는 듯 눈을 감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이 누군지 알고, 이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지.”
가이엘은 벌써 엘프들의 태도와 흑마법사 그리고 신수의 숲이라는 단서를 조합해 적의 전력을 예측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기사단의 반과 일반 병사 300명을 붙여 줄 테니, 알렌 네가 율리우스가 함께 지원을….”
“자, 잠깐!”
회의가 무난히 끝나려던 그때, 뒤늦게 율리우스가 소리쳤다.
가이엘의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렇게 끼어들 새도 없이 끝난다고?’
그럴 수 없었다.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퀘스트의 지시대로만 진행한다면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게 유리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들러리밖에 되지 않는다.
율리우스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선택받은 ‘주인공’이니까.
“이렇게 출정을 결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더 반대를 하거나 하지 않고…?”
율리우스, 놈의 눈에는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왜, 퀘스트에서 먼저 나서라고 하더냐?’
아니면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엘프들을 도우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출정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현재 알렌의 주장에 동의를 표했고, 기사단장과 가델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상황은 알렌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율리우스 너는 지원을 반대하느냐?”
가이엘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렌이 말하던 내내 침묵을 지키다 회의를 파하기 직전 끼어들다니.
‘혹시, 그쪽과 연관이 있는 건….’
가이엘이 은밀하게 레이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도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위험할 것이 분명할 텐데 한 번 더 숙고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율리우스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하게 하라며?’
분명히 [퀘스트 창]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엘프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타락하기 직전의 신수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나?
율리우스도 원작에서 히든 보스라 불리는 그 신수와 접촉할 생각이 있었기에 얌전히 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왜 기껏 준비한 의견을 말해 볼 틈도 없이 일이 진행되는 건가.
“알렌의 주장을 듣지 않았느냐, 흑마법사가 신수의 숲에 출몰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적들이 어느 정도 전력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가 엘프들의 지원을 주장할 필요도 없이 이미 회의는 아무런 막힘없이 진행되었고, 말 한마디 할 새도 없이 어느새 끝나기 직전이 되었다.
“신수의 숲의 중요도와 엘프들의 태도, 그리고 적이 흑마법사라는 것으로 좁혀졌다면 전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지.”
“그곳에 엘프들의 전력이 없지는 않을 테니, 힘을 합친다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의 질문이 논파되자, 율리우스는 억지로 질문을 쥐어짜 냈다.
“그렇더라도 만약에 예상을 뛰어넘는 강적이 있으리라 어찌 장담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이교도들이라도 끼어든다면….”
그렇게 나오겠다?
알렌은 어림도 없다는 듯 머뭇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율리우스, …너는 형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알렌이 담담하지만, 서운하다는 기색을 연기하자, 율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형님의 정보는 신뢰합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가 그렇게 말을 하던 때,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굵은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기사단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출정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혹시 공자님은 저를 신뢰하지 못하십니까?”
“그건….”
그의 굳건하면서도 단단한 눈빛이 율리우스를 향했다.
“바질 기사단장은 서부 왕국 내에서도 흔치 않은 강자니 괜찮을 겁니다. 율리우스 공자님.”
그의 뒤를 이어 적절하게 가델 총집사까지 입을 열자, 어떻게든 이의를 제기하려던 율리우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민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끝나자, 가이엘은 아까 못다 했던 말을 이어서 결론을 내렸다.
“지원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났으니, 병사 300명과 기사단장을 포함한 기사단 절반의 인원이 알렌과 율리우스와 함께 출전하는 것으로 알겠다.”
“알겠습니다.”
“율리우스 너는, 다른 의견이 있느냐?”
알렌은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의 율리우스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이엘은 짧게 읊조렸다.
“출전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회의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회의를 마친 그들은 즉시 출정할 준비를 했다.
알렌은 야외 훈련장에서 질서정연하게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 사이로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장비를 점검했다.
그들을 본 알렌의 표정이 잠시 찌푸려졌다.
‘…쯧.’
알렌은 그들이 율리우스의 이상성에 대해 침묵했을 때부터 그들에 대한 기대는 접어 두었다.
언젠가 그에 대한 심판을 받기를 바랄 뿐.
잠시간 실망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다른 기사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장소.
“잘 생각해 봐.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니까?”
“공자님, 저는 따로 누군가를 지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나는 네가 여기사라서 차별받는….”
율리우스가 여기사 한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율리우스가 질척대고 있다는 말이 더 맞겠지.
알렌의 시선이 여기사에게 향했다. 단정한 외모와 짙은 흑발.
‘카밀라 카터.’
린벨의 기초 교육을 시켜 준 기사이자, 가문에 속한 기사단의 여기사.
그리고.
‘기사 중 유일한 평민 출신.’
그녀의 아버지는 저택의 마차를 모는 마부 중 한 명이다.
우연히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선대 기사단장의 눈에 들어 기사단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덕분에….
‘차별받고 있지.’
모욕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다른 기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전생에는 결국 율리우스의 부하가 됐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여정에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기에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율리우스의 부하는 무수히 많았기에.
“아니, 나 달라졌다니까? 요즘 내 평판이 어떤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알렌은 잠시 그녀를 영입할까 생각했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지금은 아니야.’
그녀의 영입하기엔 역할이 한정되어 있고, 그녀를 휘하로 들이기엔 적절한 시기는 아직 멀다고 판단했다.
‘아직 건들 필요가 없지.’
조금 더 숙성시켜야 했다.
벌써부터 알맞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그’처럼.
‘…그녀도 기대한 대로 움직여 준다면 좋겠는데.’
알렌은 그들이 정해진 미래를 맞이하도록 건들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30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병사가 크게 외쳤다.
“공자님! 기사단 전원!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기사단장도 어느새 준비를 끝마치고 말에 올라타 있었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알렌은 선선히 웃으며 말에 올라탔다.
“늦어서 미안하군.”
아직 한낮의 햇빛이 대지를 달구었고, 준비를 끝마친 병사들에게서 엄정한 군기가 느껴졌다.
기사단장이 크게 외쳤다.
“그럼, 출전이다!”
“출전이다!”
기사들이 복창하는 것을 끝으로 병력이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알렌의 눈이 산맥 저 너머의 신수의 숲에 향했다.
동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