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숲을 빠져나오자 태양이 서쪽 하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마부는 숲에서 태연히 걸어 나오는 알렌을 발견하고는 급히 바위 뒤에서 뛰쳐나왔다.
“공자님!”
“도시로 돌아가지.”
“그 말씀은….”
마부의 눈이 빠르게 알렌이 걸어 나왔던 숲을 향했다.
“마녀는 죽었다.”
“그, 그렇다면 저주는….”
알렌은 피식 웃었다. 마녀가 죽었는데, 저주가 멀쩡할 리가.
“저주가 더 이상 퍼질 리는 없겠지.”
“…오오오오!”
저주에 걸린 자들 모두 몸조리만 잘한다면 금방 나을 것이다. 알렌이 다이크 상단을 통해 전한 자신의 ‘선의’가 담긴 지원을 통해서.
‘이걸로 이곳의 일은 마무리됐군.’
이제 베르겐에 하루를 머물고 떠나면 될 것이다.
알렌은 눈이 큼지막하게 뜨여 입을 벌리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얼른 출발하지. 도시에 들어가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군.”
* * *
마차가 도시로 돌아온 것은 사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쪽빛 하늘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듯 시원하게 트여 있었고, 밝은 태양 빛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어 시끄러운 소리를 자아냈다.
알렌은 도시로 돌아오기 무섭게 곧바로 소네드와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카릭은 처음에 그를 맞이하고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대화를 경청했다.
“우선 무사히 마녀를 토벌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알렌이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겸양을 떨자, 소네드는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십니까. 저 밖에서 공자님을 칭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소네드가 웃으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곳곳에서 알렌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렌 공자님 만세!
-와아아아! 저주가 나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공자님께서 비약과 약초를 제공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소네드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알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나, 알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들의 칭송이 은근히 기쁘다는 것처럼.
‘이넬리아가 잘해 줬군.’
율리우스에 관한 것들도 잘 되었으면 좋을 텐데.
소네드는 알렌이 아무런 틈을 보이지 않자 금방 표정을 풀고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걸 여쭙는 걸 깜박했군요. 저희 상단과 만나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표정 변화는 능숙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렇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은, 누구라도 깜빡 속을 것 같았다.
그 상대가 알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제 와서 의심하는 건가.’
그래, 이 모습이 본래 상인의 본모습이겠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들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하는.
알렌이 찾아온 시기가 너무 맞아떨어진다는 의심이.
아들의 저주를 해결하며,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일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 그거 말인가?”
알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버지가 엘프가 재배한 찻잎을 쓰시기에 나도 구하려고 자네를 찾았지.”
“찻잎… 말이십니까?”
알렌은 그렇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네드. 자네가 엘프와 연이 있다는 건 꽤 유명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소네드는 무언가 걸린 듯 말끝을 흐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이… 엘프들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사이좋은 정도가 아니지.
만약 실수로라도 그들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가는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신수의 숲에 미리 찾아갈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지.’
인간족과의 대외적 관계를 위해서 더는 건드리지 않을 뿐, 관계는 최악에 가까웠다. 가문의 몰락도 그것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으니.
“예, 그렇지요.”
소네드도 그 정도 사정은 미리 조사한 듯 알렌의 대답에 수긍했다.
“그래서 상단주와 개인적으로 만나 찻잎을 구하려고 했네. 왜,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나?”
알렌의 말이 정답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네드는 이 대답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네드는 더 이상의 의심을 지우고는, 곧바로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하, 설마 공자님을 의심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저를 찾으셨나 궁금했을 뿐이지요. 찻잎은 떠나실 때 충분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건 고맙게 받지.”
알렌은 드물게 깊은 미소를 지었다.
찻잎을 구하러 왔다는 건 변명에 가까웠지만, 아버지와 티타임을 가지며 맛본 그 풍미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알렌은 옅게 웃는 얼굴로 카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릭 상단주는 무슨 고민이 있기에 조용히 있나?”
“예?”
카릭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소네드로 향했다 돌아왔다. 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알렌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두 명이 함께 자리할 만한 이유라…. 기대한 게 맞다면 좋을 텐데.’
본래 소네드만을 원했는데, 카릭의 모습을 보니 그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렌의 입장에서는 한 명의 상인보다 두 명의 상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했다.
소네드의 인성은 믿을 만했지만, 그 한 명에게 상단에 관한 일을 모두 맡겼다가는 자칫해서 경제적 종속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카릭은 알렌이 떠난 후 소네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던 그의 모습도.
‘…설마 엘리자 님이 루피너스 가문 출신일 줄이야.’
전전대 대륙 8강을 배출해 낸 가문.
동부 협곡 지대의 주인이자, 가문의 혈족을 극히 아낀다는 별종들.
소네드 자신도 연이 있는 엘프가 흘리듯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라며, 절대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선택하게 될 줄이야.’
원래 알렌 공자님의 줄을 잡고자 하긴 했다.
그러나 완전히 그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낌새가 이상해 보였을 때 그냥 피하는 거였는데.’
카릭은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곧장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백작령에 상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엘리자 님의 출신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루피너스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감당하지 못할 비밀은 유대감을 키워 주는 것이 아닌 그를 묶는 족쇄밖에 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소네드의 입장에서는 혼자 알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득일 텐데.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비밀까지 알려줘 가며 그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알렌 공자님에게 은혜와 호의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이 상인의 정체성까지 부정하면서 행동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였다면 알았을까.’
카릭은 고개를 저었다.
선택의 시간은 다가왔고, 인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카릭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
“그래.”
알렌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공자님이 마녀를 토벌하러 가신 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소네드의 눈 깊은 곳이 반짝이며 알렌을 응시했다.
“망설임 없이 에릭 님을 구하는 모습에서 공자님의 인품을 보았고, 저주받은 자들을 지체 없이 지원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알렌은 전처럼 그의 장황한 칭송을 끊지 않았다.
“그리고 수확제에서 본 공자님의 신실하신 모습과 끝내 마녀를 토벌하신 그 무력에 찬사를 표합니다. 그러니….”
카릭은 며칠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며 내린 결론을 공자님께 내비쳤다.
“공자님과 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습니다.”
“관계?”
“예.”
알렌은 가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저희 상단은 크지 않지만,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며 점점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카릭은 결심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 상단은 공자님과 같은 미래를 향하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님.”
소네드는 카릭의 선언에 물 흐르듯이 편승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공자님께 도움이 되었겠지.’
카릭을 끌어들인 것에 다른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었지만, 소네드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의 기반에는 알렌을 향한 은혜와 호의에 있었다.
알렌의 밑에 상인이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알렌에게는 더욱 좋은 상황이리라.
‘독점을 막을 수 있으니.’
소네드의 그런 성격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엘프조차도 연을 맺으며 거래를 틀 수 있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공자님 덕분에 저희 상단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고, 많은 이득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자님과 미래를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알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인에게서 진실한 충성을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그래, 내게 상단의 미래를 모두 ‘걸다니’,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지.”
그의 휘하로 사실상 종속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렌의 말이 교묘하게 바뀌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듯 소네드는 따로 첨언 하지 않았다. 그저 온화하게 미소 지을 뿐.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아칸더스와 소네드 그리고 카릭까지.
‘드디어 다 모았군.’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한 기초적인 조각이 다 모였다.
* * *
알렌은 그들에게 미리 생각했던 명령을 내렸다.
“소네드, 자네는 마법서 하나를 계속해서 수소문해 주게.”
“마법 서적… 말씀이십니까?”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넬리아를 통해 악마 계약서가 이곳에 없음을 알아낸 상태였다.
“계약 계통 마법의 서적이고, 표지는 붉은색이네.”
“붉은색에, 계약 계통 마법서라…, 알겠습니다.”
소네드는 비교적 자세한 알렌의 조건에 의아했지만, 따로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공자님께서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구나 짐작했을 뿐.
“그리고 앞으로 영지에서 본 적이 없는 상단이나 마차의 행렬을 본다면 보고해 주게.”
“본 적 없는 상단 말씀이십니까?”
카릭의 의아한 얼굴에 알렌은 단호하게 답했다.
“그래.”
이 생각은 아버지와 티타임을 가졌을 당시부터 담아 두었던 의문이었다.
‘가문의 자금은 어디로 흐르는가.’
실행할 인력과 상황 모두가 부족했기에 묻어 두었을 뿐이지.
몰락해 간다는 소문에도 실체를 살펴보면 막상 자금이 부족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버지께서 고급스러운 찻잎을 구한 것처럼 사치도 가능하며, 사용인들의 주급도 밀리지 않고 지급된다.
알렌은 그런 비정상적인 자금의 흐름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해 볼 생각이었다.
‘잘하면 아버지의 주위에 있는 놈들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칸더스의 아버지와도 관련된 일이니 그도 순순히 협조할 것이다.
“최근 영지에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한 암거래가 있음을 눈치챈 상태다. 병사들로는 잡기 쉽지 않지만, 그대들이라면 다르겠지.”
그러나 이 일은 급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도 발각된 적 없는 이들인데,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상인과 연이 있지 않나. 그러니 영지에서 처음 보는 상단 혹은, 대규모의 짐마차 행렬을 발견한다면 보고해 주게.”
그들은 영지를 생각하는 알렌의 말에 이해했다는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는…,”
알렌은 잠시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을이 끝을 맞이함에 따라 앙상한 나무의 결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새로운 연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준비가 끝난다면 내년 1월에 엘 라운드에 오도록.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아칸더스와 얼굴을 자주 보게 될 테니 안면을 터 주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초의 잔금도 그때 치르도록 하지.”
산에서 얻은 영약 중 별 효과 없는 것을 처리한다면 값을 치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믿겠습니다.”
“그럼 이제 일어나…, 아. 그래. 소네드.”
알렌이 몸을 일으키던 중 멈칫하자, 소네드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혹시 전에 말했던 보상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일세.”
“그러시다면?”
“자네가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알리지 말도록 하게.”
소네드가 눈을 끔뻑거리자, 알렌이 한마디 더 추가했다.
“엘프.”
“아!”
그의 진의를 깨닫자 소네드는 새삼스럽게 그의 세심한 통찰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과의 관계는 대외적으로 찻잎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 두겠습니다.”
“알아서 하게.”
알렌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농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나는 자네가 자랑한 보고나 둘러보지.”
알렌이 기억하는 것만큼 쓸모 있는 물건을 얻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소네드는 먼저 응접실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안내를 붙여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