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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47화 (47/212)

제47화

알렌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하얀 책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지?’

처음부터 활용할 수 있었던 검은 책과 달리 몇 달이 지나서야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뭐냐.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뒤로 두 발자국. 8초 후에 400m 위로 충격파.』

알렌의 의심스러운 눈길에도 하얀 책은 같은 페이지를 내보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8초』

「알렌?」

베스틀라는 하얀 책에 쓰여진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알렌을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해요?」

『7초』

“아니…, 잠시, 잠시만.”

최대한 냉정하게.

알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생각해야 했다.

『6초』

‘■■는 뭐지? 저번에 읽었던 것과 같은 건가?’ 하얀 책이 갑작스럽게 반응하는 이유를.

『5초』

‘뭐가 조건이 된 거지? 마녀? 언데드? 베스틀라? 그것도 아니면 상황 그 자체?’ 이런 때에 나타난 의미 모를 도움의 의미를.

『4초』

「빨리 결정해요!」

‘하얀 책이 원하는 건 뭐지?’

아니, 회귀를 시킨 자의 목적은….

「알렌!」

『3초』

알렌은 결국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어차피 어떤 수작이든 벗어날 수 있다.’ 베스틀라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아니더라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이 상황이 벗어나지 못할 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2초』

뒤로 두 발자국.

‘저 지시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낸다.

『1초』

팡!

알렌이 손을 비틀자, 그의 머리 위로 실타래가 양방향으로 회전하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정확히 알렌의 머리 위 400m 공간을.

「지금 뭐 하고 있…!」

그렇게 허공을 충격파가 할퀴며 목표 지점에 도달한 순간.

『0초』

-쨍그랑!

「…어요! …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부서져 내렸다.

알렌의 충격파는 ‘우연히’ 공중에 있던 중심축을 부숴 결계를 무너뜨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결과에 알렌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어느새 숲속의 어딘가로 되돌아와 있었다.

베스틀라는 검 끝을 획획 돌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성공했네요! 다행이네요! 만세! 방법이 있으면 빨리 사용하지 그랬어요?」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하얀 책을 살폈다.

“…그러게, 방법이 있다는 걸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찌 됐든 다행이네요!」

하얀 책은.

『결계 축을 파괴한 이후, 결계에서 벗어나게 됨.

막대한 마력을 소모했으나, 유사 용의 노심에서 생성되는 마력의 양은 곧바로 회복할 수….』

저번처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새하얀 백지로 변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 * *

3급 마녀, 나르크는 얼굴이 붉게 변하며 피를 토했다. 마법의 반작용에 늙은 몸뚱이가 잘게 떨렸으나 그녀는 그것보다 다른 것이 더 의문스러웠다.

‘결계의 중심축을 어떻게 찾았지?’

3일 전에 누군가 이곳을 지켜보는 시선에 곧바로 습격을 대비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오늘 마검사가 나타났고, 그의 전력에 당황했으나 준비해 둔 함정에 가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가둬서 생명력만 빼내고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걸 찾아냈다고?’

나르크는 곧바로 알렌을 상대할 생각을 그만두었다. 하수인의 눈으로 본 그의 전력은 자신이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으니까.

결계가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 거리를 벌려 놔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결계의 중심축이 무너진 즉시 마주쳤을 것이다.

‘당장 도망쳐야 해.’

그녀는 곧바로 마법진 중앙에 있던 제단을 박살 내고, 숲의 생명력을 끌어모아 만든 붉은 보석을 급히 챙겼다.

제발, 제발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늙고, 주름진 몸뚱어리를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후회가 됐다. 썩을. 그녀는 곧바로 미리 만들어 둔 탈출로를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나온 그녀가 몇 발자국 내디딘 순간.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결계에 침입한 마검사로구나.”

“그래, 너는 영지의 저주를 뿌리는 마녀고.”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알렌은 그녀의 대답이 웃긴지 피식 웃었다.

“왜, 대신 죽이기라도 하게?”

“그래, 난 쓸모가 많다. 이렇게….”

알렌의 발밑이 꿈틀대더니 순식간에 두꺼운 뿌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꼬마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온몸을 뒤덮은 뿌리는 몸을 찌부러뜨릴 듯 억죄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 모든 것을 재롱이라도 바라보는 듯 가만히 응시했다.

마녀는 쭈글쭈글한 얼굴에 추악한 미소를 드리우며, 이미 다 이겼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용없을 거다. 만약을 위해서 백 그루의 물푸레나무로 엮었으니 아무리 너의 근력이….”

콰직-

“내가 뭐?”

“어, 어떻게….”

마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알렌은 그녀의 패가 다 떨어졌다는 걸 확신하자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확인했는데, 이제 쓸 패는 없는 모양이야.”

알렌이 몸을 틀자 강철이라도 찌그러뜨렸을 뿌리가 종이로 만들어진 듯 찢겨 나갔다.

“자, 잠시만 기다려! 방, 방금은 실수했을 뿐이다! 내 효용 가치를….”

“아니,”

털썩-

“마녀는 믿지 않는 주의라서.”

반으로 갈라진 마녀의 몸이 옆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 사이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피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알렌은 베스틀라로 마녀의 목을 한 번 더 베어 내고, 심장을 터트렸다. 네 조각으로 쪼개진 시체가 살려 달라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경련했다.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낸 알렌은 충격파를 터트려 완전히 없애 버리고는, 천상의 눈으로 보았던 마법진을 확인했다.

“이걸로 신수의 숲에 모아 놓은 생명력을 보내는 건가….”

부서진 제단은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피로 그려진 마법진은 생명력을 모아 두는 역할인가? 의식 마법 계통이라 잘 모르겠는데….

알렌이 그렇게 마법진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때, 주변을 뒤적거리던 베스틀라가 소리쳤다.

「당신, 이것 좀 봐요! 」

알렌이 고개를 들자, 그녀는 요령 좋게 주머니 하나를 검면에 걸치고 날아왔다.

“그건?”

「마녀의 물건이죠! 막 보물 같은 거 들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얼른 열어 보라며 호들갑을 떨자 알렌은 감지력을 뻗어 아무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주머니를 열었다. 그곳에는 붉은 보석 하나가 영롱한 핏빛을 발했다.

「이게 뭔지 알아요?」

“…생명석인가, 그것도 상등품이군. 이 숲의 생명력을 모두 긁어모아 농축시켰나?”

꽤 심혈을 기울였나 본데. 알렌은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직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 사용할 수 있는 구석은 많았다.

“이제 돌아가지. 자칫하면 도시까지 걸어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전 날아다니니까 괜찮은데요?」

“…내가 괜찮지 않다.”

탈 것이 없어서 도시까지 뛰어다녀야 했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얼른 가지.”

「네. 네. 알았어요.」

* * *

“율리우스 님! 감사드립니다.”

“역시, 율리우스 님. 명성을 떨친 이유가 있으셨군요.”

“덕분에 물건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는 경매장을 침입한 적이 더 없는지 확인하고,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아니야. 내 물건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하지.”

경매의 마지막 날.

오늘은 영지에서부터 운반한 고대 유물들의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에 강도들이 침입해 오지만 않았다면, 이미 대금을 모두 받아서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겠지.

“율리우스 님, 괜찮으신가요?”

검에 묻은 혈흔을 털어 내고 뒤를 돌아보자, 청초한 얼굴의 미녀가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이린, 아니 이제는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뇨, 아뇨! 저희 사이에 가주님은 무슨, 그냥 아이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는 황송하다는 듯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율리우스는 기쁘다는 듯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지개 마안을 사용했다.

‘옅은 주황색이 섞인 노란색.’

아이린 블레스트.

왕도로 향하던 중 암살자에게 위협받던 그녀를 우연히 만나 구해 줄 수 있었다.

그 후에 억울하게 쫓기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그녀를 도와 방해 세력을 물리치고 그녀를 후계자에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보답으로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하고는 율리우스 일행은 자신의 저택에 묵게 했다.

‘이 정도 재능이라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지.’

원작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다.

아카데미까지 잘 키워 데려간다면 큰 전력이 되겠지.

“그럼….”

아이린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랑 저녁 식사를 하지 않….”

“아니, 그는 나랑 선약이 있어서 말이다.”

아이린의 얼굴이 차갑게 식은 채 목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갑옷이 장식된 만화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또각또각 걸으며 다가왔다.

“…제3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딱딱하게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헬레나라고 부르거라.”

아이린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헬레나는 털털하게 웃으며 율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율리우스 너도.”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그래, 며칠 전에 ‘그곳’에서 보고 오랜만이구나.”

율리우스는 난감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원작의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이랑 엮일 줄이야.’

그것도 암시장에서.

몰래 레이나만 데리고 참가한 암시장에서 갑작스럽게 세력ㅜ충돌이 일어났고, 그곳에 있던 헬레나와 힘을 합쳐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도움을 받은 거지만….’

이 엉뚱한 공주님이 그를 동료로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와 친분을 쌓는다면 아카데미에 갔을 때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에게 다가오는데 거부할 남자는 없었다.

“예. 그때 마지막으로 뵈었지요.”

“그럼, 그곳에서 한 약속도 잊지 않았겠지? 식사를 하자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율리우스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아이린이 섬뜩한 눈으로 헬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린도 함께 할 수 없겠습니까?”

“흠…, 오붓하게 즐기고 싶었지만, 그대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지. 허락하마.”

“감사드립니다.”

아이린은 마지못하다는 그녀의 말투에 꿈틀거리는 검은 감정을 짓누르고는 고개를 숙였다.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공주님.”

“율리우스에게 고마워하거라.”

“…예.”

아이린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참아야 했다. 반드시. 화가 나도. 방해가 있어도. 독점하고 싶어도.

‘평범하게.’

“고마워요. 율리우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공허하게 빛났다.

* * *

“카르넬, 계획은 어떻게 됐지?”

“계획은 언제나 순조롭지. 중간에 제물 하나가 저주에서 벗어나기는 했는데… 뭐, 그 정도는 운 아니겠어?”

“죽은 마녀 건은 어쩌고?”

“우연히 도시에 들른 귀족의 귀에 저주가 닿은 모양이겠지.”

카르넬은 어깨를 으쓱이며, 몇 년간 정성을 기울여 만든 의식용 제단을 살폈다.

제단은 기괴했다. 제단을 중심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연신 붉은 연기를 토해 냈고, 다닥다닥 달라붙은 핏줄은 살아 있는 듯 박동했다.

그 주위로 수십 명의 흑마법사가 영창과 수인을 하며 끊임없이 술식을 조정했다.

“아니, 변수는 없어야 한다. 벌써 같은 영지에서만 두 번이나 토벌당했다. 만약 이 일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만, 그만. 말록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 상식적으로 신수를 타락시킨다니, 누가 그런 상상을 하겠어?”

카르넬이 입술에 묻은 피를 소매로 훑으며 키득거리자, 말록은 우묵한 눈으로 신수를 떠올리며 수긍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 무언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지 않나.”

“이 영지가 어디인지 잊은 거야?”

카르넬은 정말 모르냐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라인하르트….”

“알잖아, 말록. 불가능하다는 걸. 그래도 정 불안하면 제물이나 가져와. 인간이 들킬 것 같으면, 다른 것들로. 알지?”

“그것밖에 해결책이 없다면…, 알았다.”

말록이 검게 물든 투구의 덮개를 내리며, 땅에 박혀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대계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심하는 거나 잊지 마.”

“…조언은 받아들이지. 아.”

일어나려던 말록은 잠시 잊어버린 것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대부분의 지부에서 무언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고 전해 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흐음…,”

눈을 굴리며 침음성을 내던 그는 간단하다는 듯 말했다.

“[천상의 눈].”

“뭐라고?”

“모든 지부가 동시에 시선을 느낄만한 물건은… 사라졌다는 용사의 5대 신기밖에 더 있겠어?”

“그건…, 그렇군.”

“어차피 조만간 본부에서 조치한다니 우리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어?”

“알았다.”

그는 육중한 갑옷을 위로 대검을 걸쳤다.

“최대한 많이 잡아 와.”

“노력해 보지.”

말록의 신형이 천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카르넬은 손에 들고 있던 심장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킥, 얼른 그분의 말씀대로 때가 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일은 넘쳤다. 의식의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이에 무슨 변수가 생긴다면 몇 년간 준비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카르넬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으음~”

그들은 알고 있을까,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멀지 않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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