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공자님, 직접 살펴보실 필요 없습니다. 저주가 옮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네드 상단주는 불안한 얼굴로 알렌을 말렸다.
만약에 알렌 공자님에게 저주가 옮으면 어떻게 되는가. 공자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이것 상단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공자님의 관대하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비약도 있으니 직접 살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나.”
“아이고, 공자님!”
카릭은 방에 들어갈 때의 모습과 달라진 상단주의 반응에 놀랐으나, 그가 떠벌리듯 소리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잘 끝난 모양이구나.’
공자님의 뜻으로 소네드와 만남을 주선했다고 하지만, 며칠 동안 친분을 다지며 그의 상황을 알았기에 카릭은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랬던 소네드의 한결 나아진 표정을 보자 카릭은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알렌 공자님,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운이 좋았지. 혹시나 싶어 카릭 상단주의 이야기를 듣고 벤시의 눈물을 챙겨 뒀기에 다행이었지 뭔가.”
“…설마 그 벤시의 눈물이라는 게.”
카릭이 고개를 돌리자, 소네드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랏빛 비약을 그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왕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아닙니까, 이 귀한 걸….”
카릭은 놀란 얼굴로 알렌을 보았다.
벤시의 눈물이 제조하기 엄청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벤시를 찾기가 힘들기에 그렇지.
하지만 성공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고위 귀족이나 왕실에서 웃돈을 주고 사들이기에 쉽사리 보기 힘든 물건에 속했다.
저주를 해주 하는 물건 중에는 가장 효과가 좋았으니 더욱.
알렌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지.”
노예와 평민의 가치가 다르듯, 평민과 귀족의 가치가 다르다.
일개 상인의 아들과 고위 귀족이 큰돈을 주고 사들이는 비약의 가치를 비교하자면, 당연히 후자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지.
하지만.
“나에게 있어 소네드 상단주에게 베푸는 호의는 이 비약보다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을 뿐.”
“그건…, 과분한 말씀입니다.”
소네드는 그의 호의에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걸로 더 큰 빚을 지게 됐구나.’
아들이 저주에 걸려 고통받고 있음에도 상대의 호의에 상인의 시선으로 가치를 계산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뿐이네.”
인간은 평등하다느니, 모든 생명이 고귀하다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의미도 없고,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니까.
그저, 소네드의 미래의 가치가 이 비약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었기에 투자한 것이다.
‘전생에 빌렸던 빚도 갚고.’
이곳에서 구했던 악마 계약 서적도 찾아보며, 율리우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지.’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율리우스가 저택을 비운 시기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 둘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알렌은 소네드의 안내를 받아 그의 아들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인가?”
“예, 여기입니다.”
소네드는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지만 갑자기 저주가 폭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제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 공자님께서는….”
그러나 먼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뒤에서 먼저 문을 여는 손길로 인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철컥-
“고, 공자님!”
“괜찮네. 저런 저주 따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네.”
직접적인 것도 아닌, 넓게 퍼트린 저주 따위는 강건한 거인의 육신을 뚫을 수 없었다.
알렌은 옆에서 만류하는 소네드를 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고요했다.
상단주의 아들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했으니 최선의 조치를 취했겠지.
알렌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곧바로 중앙에 있는 침상의 앞에 이르렀다.
‘…어리군.’
이제 막 열다섯은 되었을까.
그러나 저주 때문에 파리해진 안색,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른 몸뚱어리는 본래 나이보다 몇 살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이렇게 변한 것이 저주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하게 병에 걸렸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알렌은 곧바로 감지력을 펼쳤다.
촘촘한 그물망이 넓게 퍼져 나가며 상단주 아들의 몸을 확인했다.
알렌의 노심에서 실타래가 뿜어져 나와 그의 의지에 따라 상단주 아들의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자세히 집중하자, 신체의 활력이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듯 조금씩 쇠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상단주가 수많은 조치를 해 둔 덕분에 현상 유지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상태.
‘생명력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군.’
역시 토벌당했다는 흑마법사들은 눈가리개용이었나.
율리우스가 가비아로 향한 것은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기에 짐작만 했지만, 상단주 아들의 상태를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놈들은 역시 토벌당하지 않았구나.’
알렌은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속으로 계획했던 일을 다시 점검하는 한편, 이 일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공자님!”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게….”
뒤에 있던 린벨과 소네드는 알렌이 침대 근처에 선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하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급히 다가왔다.
“…아니, 잠시 저주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이네.”
“그, 그렇다면….”
소네드는 기대가 담긴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자, 알렌은 그가 생각하는 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는 강하지만, 벤시의 눈물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군.”
“말씀대로라면 당장…!”
“소네드.”
알렌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소네드는 괜히 그런 공자님의 모습에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그가 생각하는 나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그게 무슨….”
“저주를 해주 하기 위해서는 한 모금의 양으로도 충분하네.”
처음에는 고민했다.
남은 비약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
‘후일을 위해서 보관할까 아니면 다른 이들을 위해 써야 하나?’
만약 그렇게 사용한다고 해서 다시 벤시의 비약과 같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 저주에 대한 방편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이걸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획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알렌의 생각이 거기까지 나아갔을 때.
[…….]
어디선가 맡았던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맴돌았다.
무정물 같은. 생기 없이 텅 비어 있던 시선과 함께 그를 찌르던 그 지독한 악취를.
‘…저주에 걸린 이들을 외면한다고?’
그런 행동이 전생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알렌의 복수는,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어야 했다.
반드시.
‘그들은 이익을 저울질하기 전에 백작령의 주민이다.’
그래서는 상단주의 아들만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남은 비약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저주에 걸린 모두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구하려는 노력은 해 봐야지 않을까.
“나는 이 저주의 피해자가 상단주의 아들,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건…,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 저주도 앞으로 한 달이면 끝이 난다.
“무수한 피해자가 있을 걸세. 이미 늦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아니, 확실히 늦었겠지. 이미 저주가 퍼진지 시간이 지났을 테니. 하지만….”
율리우스가 영지에 도착하면.
어린 신수의 숲에서 엘프 한 명이 도망쳐올 때면.
‘이 사태를 끝낼 수 있다.’
“적어도 구하려는 노력은 해 보고 싶군.”
알렌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소네드에게 호소했다.
영지민을 위해.
저주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리고.
“모두 내 보호 아래 있지 않나?”
나를 위해서.
소네드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갈팡질팡한 얼굴로 번갈아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니, 해 주십시오. 공자님.”
“고맙네.”
알렌은 여전히 선한 미소를 지었다.
전과 달리 한 줌의 거짓 없는 미소였다.
* * *
상단주의 아들에게는 곧바로 한 모금의 비약을 먹였다.
비약은 한 모금을 넘기기 무섭게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콜록-, 콜록-”
“에릭! 에릭! 괜찮느냐!”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몸은 괜찮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그러고 보니….”
알렌이 회수하지 않았던 감지력을 통해 다시 되살피자, 그의 몸 안에 잠복해 있던 저주가 대부분 약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라면 몇 주 안정을 취한다면 나을 수 있겠군.’
소네드는 오랜만에 눈을 뜬 아들, 에릭과 함께 급히 알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 오히려 조금 늦었다고 생각돼서 안타까운 마음이군.”
알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자, 소네드는 왜 그런 말씀을 하냐는 듯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모두 공자님 덕분인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알렌은 부자간의 대화를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소네드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정확한 현황을 먼저 파악하도록 하지.”
알렌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저주가 퍼진 것은 언제부터지? 내가 알기로는, 율리우스가 저주를 퍼트리던 흑마법사를 토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이건 제가 설명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소네드가 카릭의 말을 잠시 끊자, 카릭은 괜찮다는 듯 흔쾌히 수긍했다.
“저보다 여기 오래 계셨을 테니, 더 잘 아시겠지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마 공자님께서 궁금하신 부분은 이 부분이겠지요. 율리우스 공자님이 흑마법사를 토벌하셨다고 공표했는데 왜 저주가 다시 퍼지는가.”
소네드의 어조는 잔잔했다.
아들의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평소에 보이던 침착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흑마법사 토벌 이후 저주가 수그러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알렌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앞으로 한 달 후에 영지에서 발생할 재앙을.
그걸 해결함으로써 떠올랐던 율리우스의 위상을.
“정확히는 수확제가 끝날 즈음일까요.”
소네드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가비아 인근에 있던 흑마법사 토벌을 끝마치고 사라진 줄 알았던 저주는, 며칠 전부터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제 아들이 저주에 걸리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흔히 도는 소문이라 넘겨짚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알렌은 조용히 침묵했다.
하지만, 속은 빠른 속도로 벤시의 눈물을 얻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세워 뒀던 계획을 재확인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뼈대만 생각해 놨던 계획이었지만….’
율리우스가 흑마법사를 토벌했단 것과 서부지역에 재발하기 시작한 저주를 보며 생각을 고쳤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소네드의 아들을 구해 호감을 쌓는다.
그의 협력을 얻어 저주에 걸린 사람을 돕고, 마녀를 해치운다.
은밀하게 율리우스의 평판을 깎아내리며,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만든다.
‘아직까지는 율리우스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지 않았을 테지만.’
저주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율리우스가 흑마법사를 토벌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율리우스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을 알렌이 해결하게 된다면?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사람이란 원래 그런 생물이니.
“공자님께서 선뜻 비약을 내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소네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안정을 되찾음에 따라 숙련된 상인의 연륜이 그의 눈에 맺혔다.
“공자님께서 다른 이들을 돕겠다고 하셨으니, 저도 기꺼이 공자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저, 저도 공자님을 돕겠습니다!”
소네드는 알렌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에 편승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어수룩한 상인에 불과한 카릭은 분위기에 휩쓸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지시를 내리겠네.”
“마음껏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알렌은 품에 남아 있는 비약을 꺼내며, 그들에게 내밀었다.
“우선, 근처 연금술사들을 소집해서 이 비약을 희석시키라고 하게. 비약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을 정도까지. 몰래 빼돌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고.”
소네드가 비약을 받아들자, 알렌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머무르는 사제에게 내 이름으로 요청 드리게.”
사제를 찾아보기 힘들다지만, 도시를 뒤져 본다면 한 명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근처 지역에서 선교 행위에 대해 허락한다면, 기꺼이 이 일을 도울 테지.
“또, 상단의 약초를 통해 저주받은 자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게.”
“그 말씀은….”
알렌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른 부담은 모두 내가 처리하지.”
다이크 상단은 약초를 주로 공급하는 상단이니 물량은 충분할 것이다.
“이넬리아와 린벨은 여기서 며칠 머물 테니 그렇게 알고.”
알렌이 말하는 의미를 소네드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소네드는 당연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계산에 거짓은 없을 것입니다.”
‘밑 작업은 끝났군.’ 이제 마녀를 해치우고, 소문을 흘릴 차례다.
알렌의 여러 부탁을 들은 소네드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감더니 애매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은혜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겁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른 사람의 저주를 해체하기 힘들 겁니다.”
“그렇겠지.”
알렌 자신도 이 정도의 조치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전부 보여 주기일 뿐이지.’
앞으로의 소문을 뒷받침해 줄 밑 작업에 불과했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했다는.
그럼으로 저주를 해결한다는.
역시 알렌 공자는 율리우스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렇다면 공자님께서는?”
소네드의 물음에 알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저주라는 건 저주를 건 당사자가 죽으면 극도로 약화된다.’
그녀만 죽인다면 알렌의 조치로도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엔 충분했다.
“당연히-”
그러니.
“-저주의 주체를 죽이러 간다.”
마녀를 사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