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전생의 율리우스는 그 유명세만큼 적이 많았다.
주변 영지의 귀족에서부터 흑마법사, 이교도 그리고 마족까지.
가지각색의 원한을 지닌 이들이 율리우스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아칸더스 페른.
그도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무수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알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워낙 인상적이었으니까.’
그에게 원한과 복수심을 가진 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했다.
그의 아버지 페른 남작은 율리우스가 백작령의 후계자로 등극하는 것을 반대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죽은 이후에 가문의 보고까지 율리우스에게 털려 버렸다.
아칸더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품고 그들을 이끌었다.
그 끝에.
율리우스를 궁지로 모는 것에 성공했다.
‘…아쉽게도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흑마법사와 이교도, 마족들도 실패한 일을 그가 궁지로나마 몰아붙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알렌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번에 그를 만나려는 이유도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수확제 때 사람을 선동한 영주민들.’
그중 한 명에게 그의 손길이 닿아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넬리아에게 부탁해서 그의 뒤를 추적했고, 엘 라운드와 3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카르빌에서 아칸더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
알렌은 그의 위치와 그가 끌어들인 이들의 규모 그리고 그가 어떤 상황인지까지 일정 부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는 뒷골목의 양아치와 어울리는 주정뱅이지만….”
뒤에서는 수확제의 사건에 한 발을 걸치며,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니.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구나.”
전생과 달리 가문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의 복수심은 전보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끝맺었던 전생과 다르게 세금을 탈세하고 재판 전 탈출했다고 알려져 가문 자체가 박살 났으니.
‘그걸로 끝이 아니지.’
정작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인 율리우스는 그에게 비리를 척결했다는 이유로 칭송받았으며, 아버지는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음에도 암암리에 사람을 모으는 건 그 복수의 준비일 것이다.
-덜컹
알렌은 그가 머물고 있다는 도시, 카르빌로 향하는 마차 위에서 눈을 떴다.
“끌어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가 직접 나설 만큼의 가치가, 미래의 그에게는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실력을 키우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여기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이끌어야 한다고?
‘효율적이지 않지.’
초기에는 그렇게 기틀을 잡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로 향한다면? 그것도 힘들어진다.
그렇기에 그를 대신해서 율리우스에게 원한을 가진 이를 끌어들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그와 손발을 맞출 만큼 유능한 인물.
‘그만큼 적당한 인물도 드물지.’
원한도 있고, 능력도 있다.
“끌어들인다고 해도 나를 신뢰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신뢰는 차차 쌓아 나가면 될 일이지.
마차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히 카르빌로 나아갔다.
* * *
마차는 아무런 소란 없이 검문을 통과했다.
굳이 백작령의 후계자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조용히 통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렌은 적당한 여관에 마차를 맡긴 후, 이넬리아를 따라 그가 머물고 있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면과 로브를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빈민가를 거쳐 가는 길은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정오인데도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했고, 제대로 된 건물보다 대충 지은 판잣집이 더 많았다. 길가에는 부랑민과 노숙자가 멍하니 앉아 있었으며, 창문의 틈 사이로는 경계의 눈빛이 모여들었다.
오물과 쓰레기, 악취가 가득한 거리를 그녀는 능숙하게 안내했다.
그 와중에 양아치 몇 명이 길을 막았으나,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그들을 처리했다.
-털썩
“…끄륵.”
“…켁.”
하반신이 피에 물들어 쓰러진 그들을 힐끔 바라보며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저기가 맞나?”
“예, 저곳에 그가 있습니다.”
빈민가 한구석에 있는 주점.
비스듬한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고, 영업 중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이제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알렌은 망설임 없이 걸어 주점의 문을 열었다. 이넬리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다가 그의 뒤에 빠르게 따라붙었다.
-끼익
오래된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거침없는 발걸음 탓일까,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알렌의 감지력이 빠르게 술집을 훑어 나갔다.
썩은 나무가 간신히 천장을 지탱한다. 쥐와 벌레가 곳곳을 돌아다녔고, 싸구려 술과 약 냄새가 섞여 퀴퀴한 내음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이런 곳에서 잘도 일을 꾸밀 생각을 했군.’
-뚜벅뚜벅
알렌이 주점에 발을 들이밀자, 시끌벅적하던 주점이 조용히 변했다.
그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향했다.
주위 소란에 상관없다는 듯이 술을 들이켜는 남자.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전에 기억하던 것보다 앳돼 보이는군.’
그의 주위로 얼마나 마셨는지 그의 주위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알렌은 자신에게 향한 찌를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가면을 벗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 술 아무거나 두 병 부탁하지.”
그가 입을 열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없나? 없으면 음식이라도 괜찮은데….”
알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그의 주문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흠, 손님에 대한 대접이 좋지 않군. 이런….”
“알렌 라인하르트.”
탁-
술병을 탁상에 내리친 아칸더스가 입을 열었다. 알렌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원수의 형인데 그깟 이름 하나 모를까.’
알렌은 그가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의문이었다. 예상을 했나? 그렇다기에는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한데….
“내 이름을 아나?”
“아냐고? 알지, 잘 알고 있지, 크흐….”
그가 흐릿해진 눈을 바로 뜨며 조소했다.
“내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은 놈의 형인데, 모를 리가 있나.”
-드르륵
술집에 자리하고 있던 놈들이 그의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해 본 듯 익숙한 얼굴로 알렌의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넬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렌은 그런 그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친근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궁금하지는 않고?”
“뻔하지. 수확제 때문이겠지.”
“그런데 가만히 있나?”
아칸더스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킥킥대더니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면 뭐, 반항이라도 할까? 이리저리 도망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이런 쓰레기들을 모아서? 아니면 지금 바로 도망이라도 쳐?”
“그래.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크흐흐… 조롱이라도 하고 싶은가 봐? 그런데….”
쾅!
“사람 잘못 봤어, 이 새끼야!”
그는 핼쑥해진 얼굴을 알렌의 면전에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의 행동에 이넬리아가 움찔거렸다.
알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나서려는 것을 막았다.
“반항해 봤자 뭐가 달라지지? 덤벼 봤자 네놈의 저열한 욕구를 채울 뿐이지 않나? 죽일 거면 깔끔하게 죽여!”
“아니라면 믿을 생각은 있고?”
“아니라고? 아버지를 믿지 못한 너 따위가 믿음을 들먹여?”
아칸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이넬리아는 그의 변덕스러운 감정변화에 흠칫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분이 아니었다. 돈을 빼돌려? 영주민을 쥐어짜내? 푸흐….”
울다가 웃고, 다시 웃다가 운다. 이넬리아는 그의 기이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지, 그래. 망나니 놈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들릴 때쯤이었나?”
그는 눈을 희번덕이며 과거를 회상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수확제에 꼬마 하나를 끼워 놓고 군중을 선동했나?”
아칸더스는 조롱하듯 말하며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그랬지. 잘나신 율리우스 님은 떠오르는 태양 같은데, 몰락한 뒷골목 쓰레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겠나?”
알렌은 그의 인정에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페른 남작, 벨론 남작 모두 준비된 패였나….’
그렇다면 전생에 율리우스의 후계자 계승을 반대한 것 역시 계획적인 일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율리우스를 돋보이기 만들기 위한, 제물로써.
“쥐새끼처럼 할 수 있는 게 그게 다였으니, 그거라도 해야지. 나는 그에 비교하면 촛불만도 못하는데.”
아칸더스의 얼굴은 분노와 후회,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흔한 복수자의 말로라고 보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가 미래에 어떤 짓을 할지 알고 있기에.
또,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기에.
“연기는 그만하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죽일 생각이 없다고.”
“개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죽여라. 아니면 고문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알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가 그러는 이유가 뭐지? 의도는 이미 알았을 텐데? 아니면 정말 죽이기를 원하나?”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과장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놈은 생각한 거다.’
정말 자신을 잡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지, 아니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마침 알렌은 병사들이 아닌 시녀와 단 두 명이 찾아왔고, 한 번 대화를 시도해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거겠지.
‘꼴을 보아하니 누군가 찾아오는 것 정도는 예상한 것 같고.’
그것이 알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앞에서 당황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으로 그의 유능함을 증명한다.
그러니 연기를 한 거다.
그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어떤 목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설령 잡으려고 한들, 빠져나갈 틈 정도는 만들 자신도 있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진작에 만들어 둔 경로로 탈출 시도를 했겠지.
놈에게 있어 기껏 끌어모은 세력은 아깝지만, 목숨과 저울질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
“누가? 내가?”
그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알렌은 감지력을 통해 미세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나.
‘그렇다면.’
“내가 미쳤다고 원수의 형과….”
“페른 남작.”
그가 말에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이내 어쩌라는 듯 말을 이었다.
“대화를….”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알렌의 다음 한마디는 아칸더스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뭐?”
알렌은 진심으로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뜬 아칸더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차 한 얼굴로 곧바로 표정을 바꿨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 텐데, 대화나 하지?”
알렌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도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대화를 원한다고 하니 다행이기는 한데…, 무엇을 원하지?”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지. 그런데…, 필요 없는 눈이 너무 많군.”
알렌의 시선이 그들을 포위한 양아치들에게 향했다.
어차피 이 양아치들은 아칸더스가 위장하기 위해 끌어모은 놈들에 불과하니.
“이넬리아.”
“네.”
그녀가 움직였다.
“죽지 않을 정도만.”
그가 신호하자 이넬리아는 참고 있었다는 듯 양아치들에게 몸을 날렸다.
“아칸더스 님…!”
“평소처럼 한탕 할 수 있다고…!”
“사, 살려….”
그들이 아칸더스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게 진짜 모습인가?”
그의 물음에 아칸더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처음부터 동료였던 적도 없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자, 그들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아칸더스는 그들을 바깥으로 던지려는 이넬리아를 잠시 제지하고 크게 소리쳤다.
“마빈!”
알렌의 감지력에 주점 근처에 쓰러져 있던 노숙자 한 명이 일어나 술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예, 대장님.”
“이놈들, 다 치워. 그리고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알겠습니다.”
마빈이라 불린 노숙자가 바깥을 향해 손짓하자, 수십 명의 노숙자가 들어와 양아치를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들이 진짜인가?”
“굳이 감출 필요도 없겠지. 맞아.”
아칸더스는 알렌의 모든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를 그만둔 것이 옳은 선택인지 의심이 들었다.
‘너무 성급했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그냥 도망쳤다면….’
원래 계획은 말을 들어 보고 적당한 거래라면 받아들이고, 아니라면 해도 틈을 만들어 탈출하려고 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고.
‘그런데….’
생각보다 전력이 강해 보였다.
단순한 그의 시녀조차도 가볍게 보지 못할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건데… 쯧.’
가문이 몰락한 이후로, 평민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식이 변했다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귀족이었다.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깝지만, 다시 모으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가진 것 없는 빈민가 부하놈들뿐.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까지 좁아져서는 안 됐었는데….
‘욕심이 발목을 잡았군.’
아칸더스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알렌은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놈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뭐?”
알렌은 아칸더스의 얼굴이 혼란에 빠지든 말든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율리우스를 죽이려고 한다.”
마치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듯.
“그러니 내 밑으로 들어와라.”
놈을 죽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