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율리우스가 영지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갔다.
알렌은 그가 왕도로 향한 후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아침 시간에는 베스틀라에게 검을 배우고, 오전 시간에는 취미로 악기를 연습한다.
오후에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배워야 할 지식을 교육받고, 저택에 마련한 작은 공방에서 마법을 연구한다.
중간에는 어머니와 티타임도 가지고, 이넬리아에게 비밀스럽게 시킨 일의 경과를 확인한다.
알렌의 일상은 충실했고, 누가 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를 조용히 주시하던 가이엘조차 일주일이 지나도록 알렌이 움직임을 내비치지 않아 관심을 거두었다.
그렇게 시작된 8일째의 아침.
「당신은 모든 일에 철두철미할 것 같은데 의외로 기본기가 허술해요. 그건 아마도 제대로 검을 배운 적 없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베스틀라에게 검술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됐다고 보니까.」
그가 의문을 표하자, 베스틀라는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듯 간단하게 말했다.
「검술의 대전제는 ‘안 맞고 공격을 하는 것’에 있어요.」
그녀와 알렌은 직계 전용으로 사용되는 훈련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창보다 짧잖아요? 서로 원거리에서 공격을 휘두른다고 하면 절대적으로 불리해지는 게 당연하죠.」
알렌이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경청하자, 베스틀라도 적극적으로 그의 지도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검의 길이가 닿는 거리 안에서 잘 피하고 공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언급한 대전제를 부정했다.
「‘우리’는 아니에요.」
쉬익! 베스틀라의 검날이 알렌의 피부를 얇게 스쳤다.
「검을 피하는 이유가 뭐죠? 당연히 부상을 입기 때문이죠. 피부가 날에 베이니까. 그런데 저희는요?」
알렌의 살갗에 몽글몽글 피어나던 피 봉우리가 순식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없어졌다.
「봐요. 빠르게 재생하고, 일반적인 날붙이는 통하지도 않잖아요. 당신도 제가 아니었으면 상처조차 나지 않았을걸요?」
그 말에는 알렌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가 변한 이후로 작은 생채기가 하나 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웬만한 공격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거죠.」
베스틀라는 단정 짓듯 알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기교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기교는 중요하지 않나?”
알렌은 가문의 기사들이 대련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코웃음 치며 반론했다.
「당신은 오우거의 주먹을 흘릴 수 있어요?」
“검술을 배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럴 바에 주먹을 피하고 빈틈을 노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당신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그냥 맞고 반격해도 되겠죠?」
알렌의 말문이 막혔다.
베스틀라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렌, 기교는 같은 엇비슷한 힘을 가진 상대에게나 통하는 거예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니까요?」
베스틀라는 알렌에게 일부러 보이듯 검의 크기를 키웠다.
거대하게 변한 검이 휘둘러지자 기둥이 날아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야 전면을 가릴 정도로 거대해진 크기에 기교 따위는 무용해 보였다.
「인간 사이에도 힘이 나뉘고, 종족마다 가진 힘이 다른데. 당신이 일반적인 기사였으면, 오우거의 팔을 흘리다 몸이 먼저 뭉개질걸요?」
베스틀라는 공격을 멈추고 검체를 작게 되돌렸다.
「모든 생명체가 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다면 기술 위주로 검술이 발전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알렌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바퀴인가 알렌의 몸 주변을 돌던 그녀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당신이 생각할 건 하나, ‘힘’이에요.」
“힘….”
알렌은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베스틀라에게 배우기 시작한 검술은 그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더욱 단순했고, 더욱 간결했다.
「당신의 육체는 월등히 뛰어나니 공격을 피할 필요도 없어요. 웬만한 공격 따위 무시하고, 정확한 자세로 강한 공격을 돌려주면 되니까.」
자잘한 상처는 무시한다. 회복할 수 있으니까.
공격도 마찬가지. 버텨 낼 수 있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압도적인 힘 하나로 모든 걸 분쇄하는 검.’
「그게 바로 당신이 저에게 배울 거인의 검이에요.」
알렌은 그녀에게 검을 배우면서 확신했다. 베스틀라를 데려오기 잘했다고.
‘두고 왔다면, 이렇게 바뀐 육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겠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검을 배웠지만, 그녀가 검에 대해 어마어마한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설명을 듣던 중 떠오른 의문을 알렌은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면…, 제대로 된 기술은 하나도 없나?”
시중에 떠도는 검술서만 수백 가지다.
그런 것들이야 별다른 특성이 없겠지만, 귀족가의 검술은 궤를 달리했으니까.
“칼질 한 번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뭐, 그런 건 아니더라도 검기 정도는 뿜어낼 수 있는, 그런 비전 말이다.”
귀족가의 비전도 돌풍을 일으키고, 화염을 불 싸지르는.
그야말로 마법에 못지않은 비의 들이 넘쳐나는데, 명색이 거인족의 검술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
그의 물음에 베스틀라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제대로 된 비전을 가르쳐 주고 싶기는 한데….」
그녀는 머뭇거리듯 말꼬리를 흐리다, 계속 쳐다보는 알렌의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 혹시 기억나요? 하수구에서 빠져나왔을 때.」
“하수구? 그때라면….”
도시로 돌아오기 무섭게 지하수로에서 도적 떼의 기습을 물리친 날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그때 시간 있냐고 물었잖아요.」
“그랬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대충 얼버무렸었나?
「사실 그때부터 제 비전을 당신이 쓸 수 있게 당신 전용으로 개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당신은 신체 크기부터가 본래 우리랑 다르니까. 미안하지만 제대로 쓸 수 있게 고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그녀는 미안한 듯 말했지만, 알렌은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육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이상은 그녀의 선의일 뿐 강요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원래 있던 기술을 필요에 따라 뜯어고치는 게 가능한가?’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알렌이 봐도 그녀가 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난해한 일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으스대듯 천재라고 말한 게 사실이었나?’
그녀가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며칠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내로 알렌 전용으로 뜯어고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닐 테니.
“괜찮다.”
그렇기에 알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율리우스가 왕도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전투를 벌일 일은 없을 테니까.
‘놈은 지금 도망치는 영애를 구해냈으려나?’
놈이 왕도로 향하던 중 우연히 위험한 상황의 궁중 귀족의 영애를 구하게 된다.
그 이후에 왕도로 돌아가 귀족가에 얽힌 후계 문제에 끼어들게 되며, 그녀를 도와 그녀를 후계자로 세워 주고.
‘그 후에는 경매장에 침입한 적과 싸우고, 암시장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며 정체를 숨긴 공주님과 만나고….’
그러니 놈이 영지에 돌아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했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편하게 부탁하지.”
「와! 뜯어고친다고 힘들었는데 고마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고마움을 내비치자, 알렌은 희미하게 웃으며 땅에 눕혀 뒀던 훈련용 검을 들었다.
“그럼, 수련이나 시작하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아, 그런데 내가 배우게 될 비전의 이름은 뭐지?”
「비전의 이름은 요툰스베르드(J?tunnsverd). 총 아홉 개의 비의로 이루어져 있는 검술이에요.」
* * *
그런 식으로 알렌은 베스틀라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상대의 공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몸을 닿는 공격을 무시할 수 있는 담력을 길렀다. 행동하기 망설였던 과격한 공격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던 중, 누군가 훈련장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자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들어오라고 크게 소리치자 이넬리아가 이제는 그럴듯한 발걸음으로 알렌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자님.”
알렌은 그녀가 건네는 수통을 건네받으며, 익숙한 표정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 주는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베스틀라는 그녀가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알렌의 손에 돌아와 얌전히 침묵했다.
“린벨은 뭐 하고 있지?”
이넬리아는 어두운 표정을 애써 지우며 답했다.
“…돌아온 이후부터 훈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부르신다면 곧바로….”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그녀에게 자유 시간을 준 것은 알렌이었다. 니케아 산에서 그녀의 훈련 성과를 확인했기에 빠르게 판단을 끝마칠 수 있었다.
‘검술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순수하게 검술로만 대결한다면 알렌이 패배할 수도 있는 상태.
그렇기에 알렌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보다 그녀가 더 성장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첫 살인에 충격이 있어 보였지만.’
그 정도는 금방 극복하겠지.
그녀의 지금 모습과 별개로 그녀의 전생의 모습이 알렌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에 그는 그녀보다 그를 더욱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녀가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렌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번 생에도 린벨이 프라나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인데….’
프라나는 특별한 힘이다.
마력보다 희귀하며, 프라나를 지닌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기사라고 칭송받는 고결한 힘.
‘일단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는 두고 봐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홀로 프라나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그가 떠나야 할 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마력이라도 쓸 수 있게 해야 했다.
알렌이 아카데미에서 노리는 것을 이루려면 그녀의 성장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여러 가지 방안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녀가 직접 강해지는 것이 그림이 제일 좋았다.
“린벨은 스스로 극복할 테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럴까요? 공자님이 한 번만 자리를 가지는 건… 아니, 아닙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렌은 지나치게 걱정하는 그녀를 격려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다. 린벨은 그 정도에 무너지지 않으니. 그래도… 걱정된다면 한 번 확인해 보지.”
“…그러시다면,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지. 그나저나….”
알렌은 딸에 대한 걱정이 눈 깊숙이 들어찬 그녀를 격려하며, 심장의 감지력을 넓게 펼쳤다.
‘좋아, 아무도 없군.’
훈련장 주위로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알렌은 몸을 숙여 입을 열었다.
“그건 어떻게 됐나.”
이넬리아는 알렌의 물음에 입가에 감돌던 웃음기를 지우고,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말씀하신 ‘목표’를 조사하는 것이 끝났습니다.”
알렌은 그 말에 신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놈들의 규모는 어떻지? 그는 지금 뭘 하고 있고, 어디에 있나.”
이넬라아는 공자님이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녀가 주인의 말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가 시킨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시의 양아치를 모은 것에 불과했습니다만…, 뒤는 아니더군요. 자세한 건 보고서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곱게 말린 양피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또한, 그는 며칠째 같은 술집에 머물고 있으니, 지금 출발하신다면 3일 안으로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는 않았나.’ 적당한 타이밍이군.
“마차를 준비할까요?”
알렌은 앞으로 만나게 될 한 인물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답했다.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율리우스의 복수에 선봉장을 맡을 자.
전생에 그에게 대항했던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자, 복수자들의 대변인.
현재 놈에게 모든 것을 잃고 또다시 복수를 꿈꾸는 남자.
‘아칸더스 페른.’
그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