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새삼 생각해 보면 백작령에는 귀한 물건이 꽤나 많이 있었다.
히벨로 향하기 전, 마력을 늘리기 위해 도시에서 찾은 영약.
백작령 남서쪽, 거인의 유적지에서 찾은 베스틀라와 거인과 용의 유해.
가문의 보고에 먼지만 쌓여 가던 용사의 5대 신기.
율리우스가 발굴한 수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들.
세상에 보물이 많이 있음에도 그저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유독 라인하르트 백작령에 귀한 물건이 넘치는 걸까.
분명한 건 율리우스는 회귀 전에 많은 보물을 영지에서 찾아냈다는 것이고.
덜컹-
“아얏!”
그것을 그대로 놔둔다면 율리우스가 이번에도 그 물건들을 챙겨갈 것이란 사실이다.
덜커덩-
“흐앗!”
알렌이 마차를 타고 있는 이유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율리우스가 가졌던 물건들을 먼저 선점하기 위해. 또, 일행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 때문에 알렌은 이넬리아와 린벨만을 데리고 은밀하게 저택을 빠져나와 허름한 마차를 타고 위장까지 했다.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덜컥-
“아흐…, 엉덩이야….”
마차가 불편한지 자꾸 자세를 바꾸던 린벨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앗! 공자님?”
“왜 그러느냐, 평소 타던 마차가 아니라서?”
“그게…, 헤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벨은 평소에 타던 마차가 아닌 딱딱한 감촉에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아니, 아픈 모습을 보였다.
몇 달 전만 해도 마차는 딱딱하고 불편한 게 당연한 시골 소녀가, 오랜만에 느끼게 된 감촉에 놀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프라나를 쓸 줄 몰랐으니까.
공자님께서 재능이 있다고 해 주셨는데.
프라나는 고귀한 힘이라고, 나는 분명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는데.
이넬리아는 가끔씩 공자님의 명령이라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고귀한 힘인 프라나를 자신은 분명히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 주셨는데.
오히려 천천히 하려며 과분한 배려를 해 주시는데.
엄마는 가끔씩 공자님의 명령으로 자리를 비운다. 능력을 인정받았으니까.
‘힘을 얻어야 하는데.’
다시는 전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충분한 힘이.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손에 물집이 터져라 검을 휘둘러도.
여기사가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녀는 검 좀 휘두를 줄 아는 시녀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린벨은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리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존재 가치를 어필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너무 편하게 지냈나 봐요. 헤헤.”
사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그만큼 단련을 했으니, 이 정도 고통은 버틸 만한 게 당연했다.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서.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면.
그녀의 동공이 어둡게 일렁거리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렌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우스운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다음에도 이렇게 허름한 마차를 탈 때가 있을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때는… 어떻게든 적응해야죠? 헤헤.”
린벨이 어설프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알렌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답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적응할 수 있도록 해라.”
“…히잉. 알겠어요.”
꼼지락꼼지락.
그녀는 알렌한테 한 번 주의를 들은 후에도 낑낑거리며 얌전히 있지 못했다.
알렌은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울창한 숲과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흠…, 이 정도 속도면 30분은 더 걸릴 텐데.’
알렌은 거인의 신체로 뒤바뀐 후로 웬만한 자극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회귀 전에는 단련하지 않은 허약한 몸이었으니.
‘단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힘들겠지.’
알렌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불편하느냐?”
그녀는 알렌이 바랐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노심이 요동치며 수십 가락의 실타래가 풀려나왔다.
“이번만이다.”
“네? 꺄악!”
린벨의 몸 위로 실 자락이 연결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와아….”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공중에서 몸을 조심스럽게 보고는 감탄했다.
“헤헤… 감사합니다. 공자님.”
“다음에는 스스로 참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네에-”
알렌은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유독 린벨에게 관대하게 변했다.
그것이 회귀 전에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탓인지, 그녀를 시녀로 끌어들였다는 책임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녀의 존재가 하나의 증거가 되기 때문일까.’
미래가 바뀌었다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그러나 그 태도를 굳이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시녀인데, 특별히 대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일까.
“음, 으음-”
알렌은 콧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린벨. 프란시스카 양은 아직 안 돌아왔나?”
“프란시스카 님은… 네.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어요.”
아직도 프란시스카 양이 돌아오지 않았다라….
“아무런 소식도 없이?”
“네. 저택에 돌아가면 다시 확인해 볼까요?”
“그래, 부탁하지.”
“넵!”
알렌은 그녀와 만날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에게 선물해 준 키메라의 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이 넘게 지나가도록 소식이 없다니.’
알렌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피며, 검은 책을 뒤져 봤으나 아쉽게도 그녀가 마탑의 소집을 받아 프린달과 함께 떠났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까지는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수확제 전에 떠나간 그녀는 수확제가 다 끝난 후에도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똑똑-
“공자님, 잠시 멈추었다가….”
“다들 내려와!”
“시발, 빨리 안에 있는 놈 나오라고!”
“…!!”
이넬리아의 목소리 뒤로 걸걸한 목소리들이 들려오자 알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인적이 없는 곳까지 도적이 나타나다니.’
아니, 이런 장소기 때문에 도적이 있던 걸까.
“빨리 나오지 못해? 다 죽고 싶어? 가진 거 갖고 다 나와!”
“공자님?”
“그래, 나가지.”
-끼익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내려가자,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벌거벗어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아래로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고개를 위로 돌리자 지저분한 복장의 도적 열댓 명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
“형님, 형님. 이거 대박 아닙니까?”
“와…, 귀족을 털다니. 형님의 혜안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 자식들아! 내가 여기 숨어 있자고 했잖아!”
알렌은 이미 도적질에 성공한 것처럼 떠드는 저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공자님,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괜히 나오신 건 아니신지…”
“아니,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마차로는 가기 힘들 테니 슬슬 내리려던 참이었어.”
“그렇다면 제가 빠르게 끝내겠….”
“제가!”
이넬리아가 나서려던 차에 린벨이 소리쳤다.
“제가 할게요.”
이넬리아는 말리려고 했다. 아직 이르다고, 자신이 하면 된다고.
“저도 훈련한 성과를 보여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뒤를 이른 그녀의 말에 나오려던 말이 턱 막혔다.
“공자님을 계속 따를 텐데, 전투를 피할 수 없잖아요? 이번 전투는 경험을 쌓기에 괜찮을 거예요.”
이넬리아는 그녀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지 알았기에 침묵했다.
알렌은 그녀가 말하는 것을 빤히 응시하다가 허락했다.
“그래, 경험을 쌓기에는 괜찮겠지.”
“네! 그러니까…”
“하지만.”
알렌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간절함만이 소용돌이쳤다.
“너는 사람을 죽일 거다. 처음에는 사람이 아닌 것부터 죽여도 늦지 않다. 그래도 하겠느냐.”
그녀는 주저 없이 답했다.
“네. 할게요.”
“그렇다면…, 허락하지. 너의 성과를 보여다오.”
린벨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오자, 도적들이 크게 웃으며 비웃었다.
“아가야, 왜 혼자 왔냐? 잘난 저 공자가 너를 버리신다고 했….”
서걱-
“어?”
순식간에 일이었다.
맨 앞에 있던 도적의 목이 공중에 떠오른다. 핏물을 터트린 몸뚱어리는 옆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린벨의 검격에 망설임은 없었다. 배웠던 대로. 훈련받았던 움직임대로.
‘움직임은 최소한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이크! 감히 제이크를…”
검이 움직였다.
“죽…, 케르륵.”
뼈와 살을 가르는 끔찍한 감촉을 무시한다. 최대한 마음을 비웠다.
‘이 행위는 선행이니까.’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앞의 사람은 도적. 이들로 인해 사람이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러니 정당하고, 필요한 행위다.
“다들 뭐 해! 죽여!”
“이 새끼가!!”
린벨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며, 작게 읆조리기 시작했다.
“프라나는 고귀한 힘….”
그러니까 이 전투는.
푹-
“끄아아아아!”
죄악을 씻어 내는 고귀한 행위다.
조잡한 도끼가 날아온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비틀어 피하고, 몸을 낮춤과 동시에 위로 검을 찔렀다.
턱을 꿰뚫은 검이 머리로 빠져나온다.
“네 명.”
고귀한 힘을 사용할 자격을 증명하는.
“죽어──!”
옆에서 자세를 낮추고 들어오는 적의 어깨를 찔렀다. 내려찍는 검격을 피함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후웅-
앞머리가 나풀거린다.
큰 공격에 빈틈이 드러난 도적의 목을 그었다.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지는 도적. 린벨은 옆에서 겁에 질린 듯 당황한 도적의 손목을 베고 빠르게 가슴을 찔렀다.
“자. 잠시 항복, 항복할…”
푹-
“일곱.”
그다음은 도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절에 달하는 인원이 순식간에 살해당하자, 나머지 잔당은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목을 내놓았다.
“하아, 하아.”
“린벨, 괜찮니?”
이넬리아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전투가 끝난 즉시 린벨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이 정도는. 갑자기 움직여서 그래.’
린벨은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그러쥐며 무거운 물건을 들고난 후랑 다를 게 없다고 주워섬겼다.
아직은 부족하다.
마력도, 프라나도 없이. 고작 이 정도로는.
“괜찮느냐. 힘들지는 않고?”
알렌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모른척하며 물었다. 이런 결과를 선택한 것은 그녀였기에.
그 결과마저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네.”
린벨은 흔들리려는 표정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처럼, 언제나 보이는 모습대로.
“헤헤-, 조금 힘들기는 한데,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조금 쉬다가 이동하도록 하지.”
“저 때문이라면….”
린벨이 급히 이넬리아 품에서 나와 입을 열었으나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근처에 다른 이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그런 거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아.”
이넬리아에게 눈치를 주자 그녀는 아- 하고 입 모양으로 감사를 표했다.
알렌은 감지력을 펼치며, 잠시 근처를 돌았다.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