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추수 감사절.
일 년 동안 수확을 나누며 풍요를 기원하는 수확제.
백작령에는 매년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며 즐겁게 축제를 즐겼다.
그런 축제에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그래, 예를 들어 저택의 경비가 한산해진 틈을 타 누군가 침입한다면.
‘그 침입자가 근본도 모를 도적놈의 습격이라면.’
알렌은 기억했다.
이맘때 벌어졌던 사건을.
율리우스를 이용해 도시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용병단까지 동원해 귀족과 내기까지 벌였던 초유의 사건을.
‘그 틈을 타 저택의 보물고도 털리고, 주변 귀족에게 비웃음을 샀지.’
끝내 율리우스가 놈들을 쫓아 몰살시키고, 빼앗긴 재화들도 되찾아 왔지만 이미 떨어진 가문의 명예는 되돌릴 수 없었다.
“아버지,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 분명합니다!”
상념에 빠진 그를 깨운 것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놈의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웃기겠지.”
알렌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집무실로 불려갔다. 집무실에는 율리우스가 먼저 선객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계시다면….”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가이엘은 율리우스의 말을 듣는 내내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부동심을 유지했다.
“당장이라도 이런 짓을 꾸민 놈들을 처벌해야 합니다.”
“어떻게.”
“놈들을 심문해 본다면….”
가이엘은 서류를 옆으로 밀어 두며 냉소했다. 아직 시야가 넓지 못하군. 잘된 일이야. 이용하기 쉬우니.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거냐. 놈들을 죽여 입막음할까?”
“…예?”
율리우스의 얼굴이 얼빠지게 변했다.
알렌은 그런 그의 식견을 속으로 비웃으며, 조용히 대화를 지켜봤다.
“그건….”
“이미 많은 영지민들이 봤다. 또, 이제 와서는 용병들도 관여되어 버렸지.”
“그건 제가 한 짓이 아니….”
“그놈들이 뭐라 했지? 약자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고 했나? 하.”
율리우스가 그 말에 분노라도 한 듯, 얼굴이 붉게 변했다.
알렌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도시에 도착해서 들은 소문을 떠올렸다.
망나니에게 피해를 입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담도 크군.’
아무리 이익만을 노리는 승냥이 무리라지만, 귀족과 연관된 의뢰를 받다니.
하긴, 도시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귀족의 차남에게 일부러 시비를 거는 놈들이니, 보통일 리 없었다.
“축제가 끝나면 이 일이 백작령 전체, 아니 용병들이 어떻게 떠벌리는지에 따라 왕국 전체에 퍼질 수 있는 일이다.”
맞는 말이었다.
이 시기를 즐기기 위해 백작령에 찾아온 수많은 상인, 용병을 비롯한 많은 유동 인구 모두를 입막음할 수는 없었으니.
“그렇다고 은밀하게 처리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지.”
“…예, 그렇지요.”
율리우스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자, 가이엘은 짧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결하거라.”
“저 혼자서 말입니까?”
율리우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가이엘은 은근히 부추기듯 말을 흘렸다.
“용병끼리 서로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아티팩트가 있다고 하던데….”
“아!”
율리우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가이엘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서 가거라. 할 일이 많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이고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철컥
율리우스가 떠나 적막해진 방 안에서 가이엘은 조용히 알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글쎄요….”
“이 사건에 누군가가 관여되어 있다고 보느냐?”
알렌은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 이로 두 명이나 생각되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단을 벌인 놈들의 목적은 추측할 만한 게 있느냐?”
당연히.
‘지하수로를 통해 도적놈들이 저택의 보물고를 습격할 겁니다.’
아마 보물고에 있을 그 ‘물건’을 강제로라도 가져가기 위해서.
“아마도…, 율리우스의 악명을 이용해 가문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가이엘은 알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흠, 그래. 고맙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무 무신경했구나.”
“아닙니다.”
“마법에 성취는 있었고?”
“예.”
“그래, 축하한다.”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가이엘은 이제 됐다는 듯 다시 서류를 살펴보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나가 보거라. 아, 보물고에 들어가는 건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알렌은 들어올 때와 같이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럼….’
발칙하게 저택을 습격하려는 놈들의 면면을 확인하러 가 볼까.
알렌은 지하수로에 숨어 있을 놈들을 생각하며 차갑게 웃었다.
‘지하수로로 침입한 도적들을 쓸어버리면 율리우스가 세울 공에 견줄 수 있는 성과가 되겠지.’
알렌은 생각 없이 움직이던 율리우스를 떠올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도적들의 습격이 시작될 테니.
* * *
가이엘은 알렌이 나간 후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알렌이 방을 나선 후 시계의 분침이 서른 번쯤 움직였을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레이나 입니다.”
“들어오도록.”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 하나 없이 순식간에 들어왔다. 가이엘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율리우스가 찾을 테니 빠르게 묻지. 이번 일, 너희들이 꾸민 건가?”
“아닙니다.”
레이나는 그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그녀는 정말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
설사, 일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조금의 언질은 받아야 했다.
“이번 일은 저희 측에서 준비한 일이 아닙니다. 행여 일을 벌였다고 해도, 가주님의 동의 없이 진행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가이엘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
“너희 측에서 본 가주 몰래 일을 진행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은 그도 알았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껏 율리우스를 보좌하기 시작하면서 간접적으로만 지시 받았지, 직접적인 역할 수행은 한 적 없었으니.
“그게 약속 아니었나? 무대가 되어주는 대신, 요청한 것들을 이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레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변명은 필요 없다. 이 일은….”
똑똑-
“가주님께서 명령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왔군.
가이엘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생각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입실을 허락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은 집무실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하인에게서는 문 앞에서 나던 굵직한 목소리와 다른 여리여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그만 괴롭히시지요. 백작님. 원하시는 대로 지원을 더 늘려 드리겠습니다.”
그 기괴한 모습에도 가이엘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글쎄….”
“이번 달은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어차피 새 아들 덕에 재산이 늘어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가이엘은, 그녀의 이죽거림에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레이나는 바로 그 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을 나섰다.
철컥-
“이번 일의 원인은 저희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의 탓일 확률이 높지요.”
“그것?”
가이엘의 굳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하인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백작님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셨던 선조의 업 말입니다.”
“…….”
가이엘은 그녀의 행동에 반응 없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 반응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는지, 흥겨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여기서 끝마쳤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탓만을 할 게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지.”
그는 무거운 어조로 답했다.
“그럼 해야 할 일도 많으실 테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털썩
“여, 여기는….”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가이엘은 언제나의 일처럼 하인에게 휴가를 주고는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새로 받은 휴가를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군.”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가이엘은 다시 서류를 붙잡았다. 남아 있는 업무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으니.
활짝 펼쳐진 커튼 사이로 축제의 밝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집무실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 * *
도시의 오물이 섞여 만들어 낸 끔찍한 악취와 켜켜이 쌓인 쓰레기가 가득한 장소.
도시의 오물이 떠내려가고 물줄기가 흐르는 지하수로.
그 한구석에 수십 명의 남성이 모여 있었다.
“형님, 그래서 언제 가는 거요?”
“잠깐, 기다려 봐, 이 새끼야.”
중구난방으로 착용한 장비와 개성이 가득한 무기.
그들의 몸에는 거친 전장을 겪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흉터가 가득했고, 신체를 타고 흐르는 마력은 기사 수준은 되지 못했어도 어디 가서 대우받기에 충분했다.
카든은 수하들과 떨어져 있던 크로겐에게 말했다.
“아니, 이 장소에 있는 것도 며칠째요? 여자 향수 냄새 맡은 지도 오래됐는데.”
“거의 다 됐으니까, 기다려 봐. 이번 건만 제대로 터트리면, 곧바로 대사막을 넘어 제국으로 갈 수 있으니까.”
크로겐의 덩치는 엄청났다. 2m의 키와 근육이 가득 찬 신체. 평범한 주민이라면 만나자마자 오금이 저릴 만한 인상.
또한, 주변에 흐르는 살기는 또 어떠한가.
카든은 밀려드는 두려움을 참아 내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밑에 놈들 때문에 그라우. 불만이 상당해서 그러는 거요.”
크로겐이 고개를 돌려 수하들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에 따분함과 짜증이 눌어붙어 있었다. 확실히 슬슬 한계긴 한데….
‘연락을 줘야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야, 시발.’
솔직히 그도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뭘 이리 일을 꼬아서 진행하는가. 마음 같아서는 냅다 들이박아 버리고 싶은데, 귀족가라 그럴 수도 없고.
‘니미, 부상만 아니었어도 이딴 의뢰는 안 받는 건데.’
그가 아무리 근방에 이름을 떨쳤다고 해도 도적, 작은 영지도 아닌 백작가를 습격한다는 미친 계획을 실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데….”
웅웅-
“잠깐만.”
카든은 그의 말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크로켄과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초창기 들어간 수하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그가 꽤 영리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부두목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크로겐의 말에 작은 반항이라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친분을 과시한다고 선을 넘는 놈들이 죄다 그렇게 죽었으니.’
자신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크로겐은 카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품에서 진동하던 유리구슬을 꺼내 들었다. 갓난아기 주먹만 한 구슬은 옅은 선홍빛을 발했다.
[시간이 됐다.]
목소리는 중년 남성의 것이었다. 남자는 명령을 내리는 게 익숙한 듯 명령조로 내뱉었다.
“드디어….”
[내일 오후. 도시의 이목이 용병단과 망나니의 결투에 쏠렸을 때, 가르쳐 준 장소로 진입하도록.]
“잠깐, 그럼 보상은?”
[…물건을 무사히 들고 지정된 장소까지 온다면, 곧바로 지불하겠다.]
“정말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마나의 맹세까지 했을 텐데?]
크로겐이 히죽 웃었다. 누가 함정인 걸 뻔히 아는데 가겠는가. 도적 따위를 신뢰하는 인간이 없듯, 도적이 신뢰하는 인간도 없다.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나쁜데, 도적을 신뢰하겠는가.
‘그런데 자신을 고귀하다고 믿는 귀족이, 하찮은 도적과 진짜 어울려 준다?’
그럴 리가.
그럼에도 의뢰를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버티기 힘들었으니까. 몇 년 전 악명을 떨치던 도적단은 몇 차례의 토벌 이후 세가 급격하게 줄어 버렸다.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했다.
“그런데 챙겨 올 물건이 어디에 쓰는 거요, 쓰임새를 알아야 더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딴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제대로 챙겨 올 것만 챙겨 오도록 해라.]
“그럼 그렇게 알지. 나야 귀족 나으리께서 보상만 잘 챙겨 주면 되니까.”
‘버려질 것 같으면 곧장 물건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 백작가를 습격하면서까지 얻어 낼 물건이 보통 물건이겠는가. 그래도 그 외에도 부수입은 있어야지.
“그런데…, 나는 몰라도 내 수하들은 좀 멍청해서 말이오. 물건을 찾다 반짝이는 금화를 보면 어떻게 행동할지 잘 모르겠는데….”
[…알아서 챙기도록 해라. 뭘 챙기든 네가 물건만 가지고 온다면 상관없다.]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험하지만 성공한다면, 얼마나 보상이 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역시 귀족 나으리는 마음이 넓구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하지.”
[그래, 세가 줄었긴 해도 한때 기사단과도 부딪친 전적이 있으니, 믿어 보지.]
부딪친 전적은 지랄, 그것 때문에 다 망했는데, 시벌.
수정구는 그 말 이후로 투명한 색으로 돌아왔다. 크로겐은 굳어진 몸을 풀어 주며, 강하게 외쳤다.
“다 들었지? 준비해라, 이 냄새 나는 시궁창 생활도 오늘로 끝이다!”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수하들은 크로겐의 외침에 환호했다.
카든은 말을 걸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다는 생각에 조금 후회했다.
결국 그와 대화 중에 연락이 오지 않았나.
“오…! 드디어!”
“시발, 향수 냄새를 맡아 본 지 도대체 며칠 째야.”
“내가 다시는 하수구에 들어오나 봐라, 진짜.”
크로겐의 눈이 붉게 빛나며, 가슴 속에 내장된 장치가 뜨겁게 타올랐다. 영구적인 부상으로 조금 약해졌다고 한들, 몰래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오는 것 하나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건만 성공시키고 무사히 도망치면 다 해결할 수 있어.
부상도 회복시키고, 새로운 단원도 모집하고.
크로겐은 성공적인 미래를 떠올리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의 성공에 도취 되었는지, 천성이 도적이라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크로겐은 지나치게 방심하고 말았고.
“정말이우?”
“그래, 이번 건만 끝내면….”
그 결과는 그에게 오롯이 돌아왔다.
쾅!
“끄아아아아-”
“기습이다! 시발! 기습이라고!”
비명이 메아리친다.
거친 굉음이 바닥을 울렸고, 사방이 막힌 수로에서 그 소리는 더욱 크게 증폭되었다.
그 사이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찾았다.”
이 더러운 도적단 새끼들.
어둡게 내리깔린 그림자 속에서 검은 신형이 매섭게 짓쳐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