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알렌은 빛바랜 검은 책을 처음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0『──독자 김우진, 27세의 나이로 소설 [환생한 마왕의 독식] 속 엑스트라 ‘율리우스 라인하르트’에 빙의.』
책 안에 쓰여 있던 내용은 여러모로 충격적인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그래.
‘놈이 들어갔다는 소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세상은 책에 적힌 것과 같이 정말 한낱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있을지 모를 미래의 이야기가 적힌 예언서?
놈은 정말 어디에서 왔고, 놈을 이곳에 보낸 건 누구지?
검은 책을 통해 모르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책에 적혀 있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혹은 가짜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명확했다.
‘놈은 이 세상을 한낱 이야깃거리이자 유희로 생각한다는 것.’
놈의 행동은 정말 알기 쉬웠다.
[퀘스트]라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내려 주는 시련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모두 극의 조연으로 생각한다.
그랬던 그도 유독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검은 책에 언급되기를 ‘주연’ 중 한 명.
하이젤 카일루스.
유독 그에 대해서 검은 책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언급하고 있었다.
『──율리우스는 계획을 세웠다. 최대한 빠르게 무력을 키운 후에 아카데미로 향하는 것으로. 왜냐하면 원작에서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그가 마음대로 행패 부리기 전에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 지금 제대로 관계에 신경을 써 둔다면…』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는 확실했다. 마왕으로서 토벌되었된 과거와 다르게 조용히 삶을 살고 싶다고…』
원작 주인공.
마왕.
그.
여러 이름으로 지칭되는 남자는, 놈이 움직이는 모든 이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환생자(還生者)는 그를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마왕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데, 그 만큼 환생했다는 말에 더 적합한 인간이 누가 더 있겠나.
알렌은 시간이 흘러 책에서 더욱 많은 것들을 읽어 낼 수 있게 될수록,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갈등이 갔다.
자신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결국 기억하는 건 단편적인 정보가 다였기에 섣불리 판단하기도 어려웠고.
‘율리우스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게 이리 후회가 될 줄이야.’
정황상 율리우스는 환생자인 그와 함께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막을 생각처럼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의 결말… 이라고 했던가.’
이 세계를 한낱 유희로 생각하던 놈답게 끝에 올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환생자를 끌어들이려는 건 확실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이젤은 율리우스를 상대하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는 쇠사슬로 감싸여진 하나의 책이 보였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두 권의 책과 다르게 아직 자격이 부족하다는 듯 두꺼운 쇠사슬에 휘감겨 묶여 있는 책.
“만약,”
알렌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 몸에 무엇인가 스며들던 기억을 떠올랐다.
“…저 감긴 쇠사슬을 풀어낼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저 책을 자유롭게 읽어 낼 수 있게 된다면.
환생자의 행적이 기록되었을 저 책을 사용할 수 있다면….
-멈칫
“아니, 아직 모르는 일이지.”
생각을 너무 깊게 했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확실치도 않은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유적지를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 * *
베스틀라는 유적지를 빠져나가며 알렌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거인도 수명이 있나?”
거인이나 용과 같은 신화종들은 정해진 수명이 없다고 한다.
정확히는 수만 년 이상 사는 것도 가능하지만, 거기까지 사는 개체는 드물다고 했다.
「수명? 에이, 누가 거기까지 살아요? 심심해서 죽을 일 있어요?」
전투를 하다 죽는 게 대부분이고, 다들 몇 천 년쯤 살았다 싶으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어떻게? 산을 좋아하는 거인은 스스로 산이 되고, 다른 종족을 좋아하는 거인은 자신의 몸을 대지로 만드는 거죠. 그것도 몰라요?」
그녀는 알렌이 상식적인 것을 모른다는 것에 의아했으나, 지금 시대에 거인은 고대의 신화로 취급된다고 말하자 칼날을 부르르 떨며 격분했다.
「뭐요? 고대? 하, 진짜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고요? 내 꽃다운 나이가…」
그녀는 가벼운 성격과 다르게 꽤나 방대한 지식을 자랑했다.
‘그 시대에는 누구나 이러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나?’
짐작도 가지 않는 그때의 거인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사회 제도까지. 모르는 정보가 없을 정도.
「당신 공무원이 뭔지는 알아요? 당신은 지금 거인을 야만인쯤으로 생각하는가 본데, 저는 초초초 엘리트 공무원이었거든요?」
그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직책을 언급하며 잘난 체를 했다.
「안 믿긴다고요? 당신이 말한 현재의 문명이 더 야만적인 건 알죠? 하, 봉건제라니, 언제 적이야?」
봉건제, 라. 어떤 의미인지는 어렴풋이 이해가 갔으나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알렌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을 대부분을 답해주었으나, 몇 가지 질문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 있었던 이유는 뭐지?”
「…….」
“용과 거인의 시대가 끝난 이유는?”
「…….」
그녀는 그 질문을 못 들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알렌은 그와 비슷한 질문을 몇 번 더 하고 나서야 그것에 관해 묻는 것을 포기했다.
「미안해요. 이건 말할 수 없어요.」
“아니,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
자신도 그녀에게 모든 걸 밝히고 도움을 구한 건 아니지 않은가.
회귀자, 빙의자, 환생자.
이것에 관해서 뭔가 물어볼 만함에도 그녀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아직 그런 종류의 질문을 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 그들의 사이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연대도 없었고, 믿음과 신뢰를 주고받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저, 유적지에 있었기에 함께 나왔을 뿐인 관계. 알렌도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알렌이 꼭 필요하진 않겠지만….
‘나는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
책의 제목조차 있는지 알지 못했던 그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알렌은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도 아닌 검에게 까지 진의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
“이제 유적지에서 풀려났으니, 어디 갈 곳이 있나?”
「음, 아뇨? 없는데요. 왜요?」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네가 필요하다.”
「네?」
알렌은 저 앞에 입구로 드리우는 빛을 바라보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나는 네 능력이 필요하다. 정작 책의 주인이 읽지도 못하는 제목을 읽는 네 능력이 필요하고, 너에게서 여러 지식과 검술을 배웠으면 좋겠다.”
율리우스도 베스틀라에게 검을 배웠을 터.
놈이 했다면 자신도 못 할 게 있나.
거기에 그녀는 꽤나 유식했다. 그러니 잊혀진 여러 지식을 배울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녀를 영입하려는 이유로 충분했다.
심지어 튼튼하기도 하니 무기로서의 성능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직설적인 말에 그녀는 당황했는지, 유려하게 허공을 날던 검 자루가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어… 음, 네. 고백은 당황스러운데, 뭐, 좋아요.」
어떤 조건으로 회유할지 생각하던 알렌과 달리, 그녀는 검날을 좌우로 흔들더니, 곧바로 그의 요청에 응했다.
「어린 거인을 도와주는 건 어른의 의무니까요.」
그녀의 허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알렌은 그의 눈앞으로 날아온 그녀를 붙잡고 답했다.
“고맙군. 그런데… 다른 특별한 능력은 없나?”
「특별한 능력? 말하는 검 이상을 원해요?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냐?」
알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자, 베스틀라가 손잡이를 흔들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은 힘을 다 써서 무리에요. 지금도 사실 바로 자고 싶은데, 버리고 갈까 봐 그랬죠. 이제 나왔으니 저는… 하암, 잠시 눈 좀 감을게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
「네…. 저도 잘 부탁해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그의 손에 안착했다.
알렌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유적지의 입구는 여전히 검은 아가리를 벌린 채 침입자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목표로 한 건 다 마쳤구나.”
유적지에서 계획했던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사실에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율리우스, 놈이 기다리는 저택으로.
* * *
알렌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지역에 숨어 이동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는 것과 잠을 줄이며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새롭게 얻은 신체도 며칠 움직이다 보니 얼추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세밀한 힘의 장악은 힘들겠지만, 이제 한걸음에 땅을 부수는 일은 사라졌다고 봐도 괜찮았다.
알렌은 이동하는 중에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건 잊지 않았다.
‘우선, 프란시스카 양을 만난다.’
정확히는 그가 그녀에게 건네준 키메라에 관한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후에 이넬리아에게 듣기로 그 키메라의 혼은 알렌의 짐작대로 악마가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알렌은 키메라에게서 자신이 직접 느껴 보았던, 악마 특유의 꺼림칙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만약, 그놈이 악마가 맞다면.
자신이 전생에 만났던 건?
‘악마가 아니었다?’
무엇이 다른지, 어째서, 왜 그런지 알아야 했다.
다음은 이넬리아.
자신과 그녀 사이에는 키메라 술사에게서 빼앗은 진명으로 이어진 계약이 있었다.
그것으로 무언가를 강제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것과 관련해서 그녀와 대화를 한 번 나눠 볼 필요는 있었다.
‘키메라 술사의 행적은 여러모로 의문이 들었으니.’
그녀가 키메라 술사와 이어진 세력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좋다.
애초에 산맥에 처박혀 있던 그가 그런 물건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에 사용했던 돌검과. 고대 요정족의 신체. 그리고 마법 촉매를 비롯한 장비까지.
곱씹어 볼수록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알렌이 저택으로 돌아간 후의 일을 계획하고 있을 때 베스틀라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하루에 몇 번씩 정신을 차렸는데, 오랜 시간 의식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했다.
「여기는 어디예요? 마차가 꽤 많네요? 당신이 사는 곳은 구석진 곳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일어났나? 구석지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마차가 많은 이유는, 아.”
알렌은 불현듯 자신이 저택에서 외출한 날로부터 얼추 한 달 이상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그 사건이 시작될 때인가.’
율리우스가 영지에 있었을 당시 일어났던 사건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일 필요 없이 자세한 정황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영지를 나간 후의 행방은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했으나,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검은 책을 통해 자세한 정보를 취합할 수 있었으니.
‘지금 중요한 건….’
축제 기간에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
그 덕분에 가문은 주변 귀족들에게서 여러모로 망신살을 뻗쳤다.
알렌은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수련을 하는 데 생각보다 더 시간을 소비한 것 같았으니.
그녀의 물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히 답했다.
“…이제 추수 감사절이 다 되었구나 싶어서.”
「추수 감사절? 그게 뭔데요? 이름만 들어보면 일종의 기념일로 보이는데…」
그녀는 추수 감사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고대에는 식량이 풍부했나? 알렌은 순순히 추수 감사절이 갖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일 년에 처음 수확한 식량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라고.
제일 커다란 축제가 가문에서 직접 다스리는 도시, 엘 라운드에서 열리기에 마차가 몰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엄청 신기하네요! 그런 축제도 있다니. 역시 고대가 나았다니까요? 식량이 부족하다니….」
그녀의 말로는 지금은 사라진 요정족 덕분에 식량이 썩어 날 지경이었다지만… 글쎄, 알렌은 잘 믿기지 않았다.
‘거인이 하루 먹는 양도 엄청날 텐데 그걸 모두 생산하고도 식량이 남는다고?’
지금도 엘프들이 대륙에 공급하는 식량 덕분에 매년 기아로 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줄어들고 있을 뿐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사람은 죽어 나갔고,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식량이 끝이 없어서 썩어 날 지경이라.
고대는 위험한 괴물들이 넘쳐 났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빈민들에게 있어 일종의 낙원에 가깝지 않았을까.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고도의 문명사회를 가지며.
다른 종족에게는 숭배를 받았고.
또 용과 비견되는 무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고대 제국도 마찬가지인가?’
찬란한 문명을 영유하던 시대가 두 번이나 갑자기 저물어 버린 이유가 뭘까.
알렌은 많은 역사학자가 갖는 의문을 떠올리며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때.
“-죽여라!”
“-모두 뺏어!”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알렌의 심장이 은은히 진동하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감지력이 뻗어 나갔다.
전과 다른 압도적인 범위.
눈을 감고 집중하자 상황이 그려졌다.
몇 대의 짐 마차와 그걸 지키는 용병들, 그리고 용병보다 배는 차이 나는 도적들.
흔히 일어나는 상단 습격이었다.
평소에 병사들이 사고를 막고자 도시 주위를 순찰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파가 몰리는 축제 시기.
평소에도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막을 수 없는데, 지금 같은 때에는 뻔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한탕 해 먹고 빠지려는 의도가 아니면 뭐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적들의 기습이 성공할 확률은 없었다.
“마침 힘을 시험해 볼 기회군.”
그가 그렇게 놔두고 있을 생각이 없었으니.
알렌은 실타래로 몸을 휘감았다.
기하급수적으로 소모된 마나가 실체화된 실타래를 구성하여 그의 헐벗은 몸을 가렸다. 임시로 몸이 가려지자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타탁!
목적은 간단했다.
‘한 달간 영지에서 일어난 소문을 듣는다.’
상인이라면 주변 동향과 소문에 민감할 터.
거기에 백작가의 장남이라는 신분과 습격에서 구해 줬다는 명분까지 있다.
이득에 민감한 상인이라도 순순히 협조할 가능성이 높았다.
‘적당히 옷을 구할 곳을 찾으려 했는데 잘됐군.’
숨어 다닌다지만, 수치스러운 꼴로 어디까지 가겠나. 목적지도 가까워져 가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평범한 검인 척 부탁하지.”
「와, 저는 평범한 검이에요! 이러면 되나요?」
알렌은 답하지 않고 뒤돌아 있던 전장의 뒤로 난입했다.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조무래기들에게는 육체로도 벅찰 테니.
전투의 후미에 서 있던 도적은 무언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기척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곧바로 뒤로 돌아선 도적은 엉성한 자세를 갖췄다. 얼마 되지도 않는 마력을 믿고 자신감이 부풀어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넌 누…어?”
푸슉-
한순간에 잘린 도적의 목이 공중에 떠오른다.
알렌은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검격에 작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정말 다른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상관없겠는데.
그가 전장에 새롭게 난입하자, 도적들이 빠르게 소리쳤다.
“넌 뭐야!”
“새로운 적이다!”
“알아서 처리해! 여기 바빠!”
“아니, 젠장. 이 새끼 뭔가 이상하다고!”
“알아서 하라고!”
역시 도적답게 지휘도 명령 체계도 제각각.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지만, 대부분 마력을 조금씩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도적보다 더 위협적일까.
‘그래 봤자 도적이지.’
한탕 벌이를 하기 위해 많은 전력을 모은 듯싶었으나, 그것이 자신과 같은 상대를 만날 것이라고는 상정하지 못 했으리라.
다가오는 도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
푸슉-
“아니, 씨-”
날카로운 검날에는 조금의 피도 묻어 나오지 않았고, 주먹을 휘두르자 진흙 같은 감촉만이 느껴진다.
-퍼석
머리가 질척한 뇌수가 피와 함께 흘러나왔다.
‘버러지들.’
알렌의 싸늘한 눈이 그들을 향했다.
영지민들의 피를 먹는 기생충들. 이번에 일어나는 축제에 일어날 사고도 도적들과 관련이 있는 만큼 알렌은 자비를 두지 않았다.
감지력이 전장 전체를 뒤덮으며, 도적을 확인했다.
이제 도망치더라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렌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지를 박찼다.
“뒤, 뒤에 괴물이 온-”
“다른 놈들 더 불러! 제길, 더 부르라고!”
학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