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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6화 (26/212)
  • 제26화

    레이첼과 카트린느는 더는 머물 이유가 없기에 하룻밤만 보낸 후 곧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알렌은 레이첼에게 부탁해 그들이 떠나기 전 카트린느와 독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동생의 일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그녀의 눈은 공허해 보였다.

    율리우스를 위해 모든 일을 했는데. 그 결실이 고작 파혼이란 것에, 하루가 지났음에도 상당한 충격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 큰 남녀가 독대라니,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 빨리 끝내 주시길 바랄게요. 공자님.”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고.

    그녀를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자, 알렌은 작게 미소 지었다.

    “카트린느 영애.”

    “할 말이 없으시다면….”

    그녀가 곧장 일어날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그는 가식을 집어던졌다.

    “파혼.”

    움찔-

    “되돌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그 말에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당장, 공자님이 하신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지금 저를 모욕하기 위해….”

    “만약.”

    알렌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이 분노로 물들어 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동생이 진짜가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카트린느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동생의 몸을, 어느 악마에게 빼앗겼다고 한다면….”

    그녀의 눈을 보았다.

    경악, 의심, 불안 그리고 한 가닥의 희망이 섞여 검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눈동자는, 아직 피지 못한 꽃망울을 연상시켰다.

    “믿으시겠습니까?”

    무엇으로 개화할지 알 수 없는.

    “앉으십시오. 할 이야기가 조금 많을 것 같으니.”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며, 문을 바라보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말해 주세요. 공자님. 그게 무슨 말인지.”

    알렌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하얗게 미소 지었다.

    아주 새하얗게.

    * * *

    그 후로 그녀가 응접실을 빠져나온 것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들이 그렇게 늦게 나온 것에 레이첼은 의심을 하지 않는 것….

    “당신, 사실대로 말해요.”

    …같았으나.

    그녀는 도끼눈으로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응접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던 그녀가 한층 나은 표정으로 돌아오니 뭔가가 있었으리라 확신한 것 같았다.

    “저 아이에게 무슨 헛바람을 불어넣었어요.”

    다행히 알렌이 생각한 것과 다른 추궁에 그는 안도했다.

    “가뜩이나 안 좋은 일 때문에 힘들 텐데, 쓸데없는 희망 같은 건 주면 안 되는 거 알죠? 가령… 율리우스, 그 망나니 놈과 다시 이어 준다거나 그런 거요.”

    “별것 아니야. 그냥… 동생에 대한 사과랑 감사, 그리고 보상해 줄 방법이 있나 의논해 본 것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녀는 뭔가 느낀 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알렌은 그녀의 촉을 피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레이첼, 당신이 잘 챙겨 줘. 그녀가 아카데미로 갈 것 같다고 했지?”

    다행히 그녀는 의심하지 않고 대화를 받았다.

    “저도 그 생각 중이었어요. 솔직히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와줄 수 있는 곳까지는 해 보려고요.”

    “나도 미안하지만…. 아쉽게도 따라가지 못하겠군.”

    그녀는 순진무구한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괜찮아요. 당신, 금방 온다고 했잖아요?”

    “…그래.”

    알렌은 쓴웃음 지으며 답하고, 뒤로 물러났다.

    마차에서 카트린느가 기다렸기 때문에 그녀도 오랜 시간 대화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와 한 번 포옹하고는 뒤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마차로 들어갔다. 카트린느와 눈으로 인사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준비가 끝나 있을 것이다.

    자신이든, 그녀든.

    * * *

    알렌은 레이첼을 배웅한 후, 곧바로 도시를 나섰다.

    린벨과 이넬리아는 어머니 곁의 시녀장 라우라에게 그가 외출한 동안 교육을 받을 것이다.

    ‘심심하면 어머니도 시녀 교육에 참여하시겠고.’

    더군다나 가문의 여기사에게 특별히 린벨의 훈련을 맡겼으니 그녀는 그가 없을 동안 쉴 시간도 없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알렌은 울상을 지을 린벨의 표정이 떠올라 픽 웃고는 손을 휘저었다.

    파앙!

    이빨을 들이밀던 놀의 머리가 찌그러진다.

    놀들은 그의 반경에 접근하기도 전에 수십의 동료를 잃었고, 가까스로 접근한 놀도 그가 검을 뽑자 목이 잘려 나간다.

    ‘1위계.’

    전생에서 수십 년간 도달해 온 성과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결과.

    알렌은 죽기 전에 가까스로 도달했던, 악마와 계약까지 하며 얻어 낸 강함에 걸맞지 않은 위계를 가지고 있었다.

    1위계라기에는 이질적으로 커다란 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부족했기 때문이다.

    알렌이 목표로 잡고자 하는 건 회귀 전의 율리우스다. 각지의 재앙을 물리치며, 말 그대로 영웅의 행보를 밟고 다니던 상대.

    그런 놈에게서, 한 번 실패했던 길을 다시 걷는 게 옳을까?

    정면에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데도? 그것도 제대로 된,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얻어 낸 성과였다.

    그와 자신의 차이는 크다.

    ‘문헌으로만 쓰인 비약과 물건을 사용하고, 성장 속도가 나와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빠르다.’

    물론 전생에서와 달리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알렌은 그때와 달리 마법의 부작용에도 시달리지 않았고, 지금부터 다시 마법에 집중한다면 더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

    ‘그게 언제인데?’

    마법은 학문으로써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쌓아야 하며, 자신이 인식하는 마나의 성질과 비슷해야 한다.

    화염 계통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에 대한 지식을, 거기에 인식하는 술자의 마력도 그와 비슷한 형태를 띠어야 했다.

    개인이 각자 인식하는 마력의 형태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알렌은 실타래, 프린달은 옅은 바람, 프란시스카는 끈적한 어둠, 그리고 동생은….

    ‘작은 알갱이라고 했었지.’

    옅은 바람으로 마력의 형태를 인식하는 프린달은 바람 계통의 마법을 잘 다룬다.

    프란시스카는 마력을 끈적한 어둠이라는 형태로 인식하며, 또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계통을 창시하고 있다.

    ‘원래 동생의 서클이 박살 나지 않았다면….’

    무슨 마법을 사용했을까.

    세상 전체의 마력이 작디작은 일정한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하던 동생의 말은, 실타래로 밖에 마력을 보지 못하는 알렌과 달랐다.

    어차피 영원히 알지 못할 일.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새로운 마법을 배우기에는 늦었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성장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의 곁에서 동생을 구할 실마리라도 얻어 내기 위해서는, 여정에 동참할 수준은 되어야 했다.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입구가 보였다.

    * * *

    거인의 유적지.

    알렌은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백작령 남서쪽, 동쪽에 있는 대사막과 북서쪽을 감싸는 미켈란트 산맥 사이에 위치한 고시대의 유적.

    문명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고대 제국이 ‘대몰락’으로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 전, 그 시대에도 신화로 취급되었던 그때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용과 거인이 지배하고, 지금은 고서의 글귀에서나 언급되는 환상종이 넘쳐나는 시대였다는 것.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율리우스가 이곳에서 어떠한 ‘검’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놈은 그 검은 얻은 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것.’

    그것 외에도 이 유적의 지하에는 수많은 용과 거인의 유해가 묻혀 있었다.

    알렌은 그 유해를 이용해 현시대에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알려진 비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가 이 검을 고른 이유도 간단했다.

    ‘놈은 이 검을 얻기 전까지 검술의 성장 속도는 더뎠다.’

    알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놈이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아니 초월하는 그 모습을.

    마력을 조작하는 능력이 빠르게 상승하더라도, 놈의 검술 그 자체는 평범했다. 사실 당연하지 않은가, 라인하르트 가문에 계승되는 것은 마법인 것을.

    검술 하나만 보자면 가문의 무술은 다른 귀족의 비전보다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놈은 그걸 비웃어 버리듯 검을 얻고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그게 검의 능력이라면 자신은 신체의 약점을 보완하게 되는 것이었고, 아니더라도 이 유적에서 비술을 사용하기 위해 와야 했으니 회수할 생각이었다.

    놈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유적의 입구는 시꺼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이게 발견되는 게 지금부터 몇 년 후였나?’

    상관없었다.

    이제 다시는 재발견될 일은 없을 테니.

    알렌은 그곳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들이밀었다.

    유적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흔한 야생동물 하나 없는 상태.

    유적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따금 습격하던 괴물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취를 감췄다.

    벽면에는 세월에 스러져 흐릿해진 벽화가 가득했고, 작은 벌레들만이 그의 접근에 놀라 도망쳤다.

    그렇게 작은 램프의 불빛에 의지한 채 얼마나 나아갔을까.

    타닥-

    “여기인가….”

    눈앞에는 거대한 공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동은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고, 인적없는 고요함에 일종의 음침함 마저 느껴졌다.

    불빛을 비추자 수많은 용과 거인들의 유해가 그를 환영하듯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제각기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머리가 부서진 용, 두 팔이 잘린 거인, 벽에 기대진 용, 땅에 무릎 꿇은 거인.

    수많은 시체가 얽히고설켜 고아한 예술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 어지러운 유해의 중앙, 거대한 기둥 아니….

    “저게 검이라고?”

    기둥을 연상시키는 거검이 공동의 중앙에 꽂혀 있었다.

    알렌은 검에 다가가는 대신 가까운 바닥에 앉았다.

    -털썩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알렌의 심장 어림에서 원의 고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실타래가 끊임없이 뽑혀 나오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흔히 마법사가 하는 의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서클 마법 체계는 언제부터 있었는가?’

    왜 마법사들은 심장에 고리를 만드는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육체에 마나를 저장하며 사용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귀족가에서는 각자의 비전을 사용하고, 용병들도 돈만 있다면 저급의 비법을 사들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마법은 단일화된 체계를 가지고 있나?

    많은 마법사는 심장에 고리를 맺으며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답을 하자면 당연히….

    ‘있었다.’

    다른 방법이.

    -우우웅

    알렌은 하려는 짓은 그렇게 잊혀진 수많은 비전 중 하나였다.

    ‘드래고닉 마법 체계.’

    어느 한 마법사가 용의 심장은 왜 보석처럼 보이는가, 심장을 보석으로 바꾼다면 용과 같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에서 시작된 의문에서 만들어진 마법 체계.

    심장을, 마력이 흐르는 노심을, 용과 같이 고체화된 보석으로 바꾸는 것.

    필요한 재료는 적었다.

    그저 마력 전도율이 높은 보석 혹은 매개체. 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방법은 더욱 간단했다.

    처음은 서클 마법 체계와 비슷하다. 원의 고리를 심장에 만든다.

    그러나 그 후에….

    ‘고리의 수를 늘리지 않는다.’

    신체에 마력을 순환시키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고리의 크기를 끊임없이 키운다. 그렇게 고리를 키우고 키워, 이질적으로 커다란 원으로 만들어졌을 때.

    -빠각

    고리를 두드렸다.

    알렌의 귀에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진 고리에서 역류한 마나는 술자의 주변을 맴돌며, 마력 폭풍을 형성한다.

    그때, 준비한 매개체가 형성된 폭풍에 부서져 몸에 흡수된다면….

    ‘성공한다.’

    그러나 이 비전을 수련한 사람들의 끝은 매우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인공적으로 심장이라는 중요 기관을 변형시키는 건데.

    커다란 원의 고리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흡수한 매개체의 질도 매우 중요했다.

    용의 노심을 원한다면 용의 뼈와 같은 환상종의 신체나 오레이칼코스 같은 극상품의 전도체가 필요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신체가 심장의 출력을 버티지 못해 신체가 터지는 경우도 많았고, 비법 수련 과정 중에 수반된 엄청난 고통에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건, 분명히 실패작이라 할 만 했다.

    그럼에도.

    -쾅!

    다시 고리를 두드린다.

    고리에 금이 간다.

    마법사의 생명이라 할 만한 그것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공포감이 들었다.

    실패한다는 것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이 실패로 말미암아 다시 받은 기회를 허무하게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이제 와서?

    ‘이미 알고 있던 주제에.’

    회귀를 한 이후부터 이 순간을 준비했음에도 그랬다. 마법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마찬가지.

    그만두고 싶었다.

    사실 지금도 갈등하고 있었다.

    굳이 이런 모험적인 방법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을까? 키메라 술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불가능한 걸 바라느냐고.

    키메라 술사는 이런 신체를 변이시키는 비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말은 거짓 여부를 떠나 상식에 가깝겠지.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어떤가.

    그냥 서클 마법 체계를 따라가며, 아카데미에 가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렇다면 5서클, 6서클의 벽도 뚫고 어쩌면 7서클도 뚫고.

    그렇게 놈에게까지.

    생각이 그곳까지 도달했을 때.

    [형]

    목소리가.

    [이번에 구한 마도서인데….]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리를 두드렸다.

    -쾅!

    그의 가족이자 하나뿐인 동생,

    자신 때문에 서클이 깨진 동생을.

    망나니로 돌변한 동생을 구해 주기로 해 놓고서.

    동생을 구하겠다는 자신의 ‘다짐’은 그토록 필사적이지 않았던가? 편한 길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이었는가?

    아니다.

    -쾅!

    그딴 게 아니었다.

    지금 와서 뭐, 이제 돌아갈 건가? 그따위 각오뿐이었나? 그렇게 회피하기만 해서 상대가 기다려 준다던가?

    ‘아니.’

    -쾅!

    기회가 되지 않으면 포기할 건가?

    불가능해 보인다고, 겁이 난다고, 두렵다고 언제까지 그럴 셈인가.

    ‘부족하다는 걸 알지 않나.’

    쾅!

    언제는 동생을 구하고 싶어서, 천재의 영감을 얻기 위해 수많은 영지민을 바쳐 놓고. 회귀했으니 이제는 과거의 일이라 생각할 셈인가?

    아니다.

    ‘키메라 술사의 공방에서 느꼈지 않나.’

    쾅!

    놈을 쫓을 방법이 있다.

    놈을 따라갈 방법이 지금, 여기에 있다.

    ‘동생을.’

    고리를.

    -쾅!

    ‘포기할 건가?’

    두드렸다.

    끔찍한 고통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알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에 정신이 일깨워진다.

    고리의 실금이 가며, 원이 부서질 듯 떨리기 시작했다. 잔금 사이로 마력이 세워 나오기 시작했다.

    각오를 다진다.

    두려움을 무시했다.

    히벨로 향하기 전에도 이곳에 올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가지 않았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키메라 술사를 상대하고, 죽은 영지민을 보기 전에는.

    나는 그들에게 충실했는가? 귀족다웠는가?

    아니다.

    절감했다.

    제 스스로의 모순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알량한 과거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영지민을 내버렸다. 그게 놈과 다를 바가 무엇이지?

    그러면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다시 방에 틀어박힐 생각인가? 그때처럼?

    답은 나왔다.

    아니. 이제는.

    “부서져라.”

    피하지 않으리라.

    쾅!

    머릿속에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고리가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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