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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 빙의를 싫어함-25화 (25/212)

제25화

격한 해후를 만끽하던 알렌과 레이첼이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나가던 하녀의 눈초리에 그녀의 뺨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을 때였다.

그들은 화원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당신… 으흠, 조금 달라진 거 아니에요? 이렇게 대담하지는 않았는데….”

펄럭펄럭-

그녀는 덥다는 듯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며, 그를 힐끔거린다.

달아오른 뺨과 반짝이는 하늘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분홍빛 입술, 그리고 부드럽게 풀어진 눈꼬리. 그녀의 몸에는 은은한 뮤게 향기가 났다.

“그런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보고 싶었을 수도 있지.”

환히 미소 지으며 답하자,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당신.”

어느새 달아오른 뺨이 식고, 수상하다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본 그녀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누구예요.”

“뭐?”

뭘 말해? 누구라니.

그녀는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어떤 년이에요.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당신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그녀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맞아, 새로 시녀 들였다고 했죠? 설마….”

아니, 이 대화에 어디서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지금 말하면, 그년을 죽… 아니, 아니지… 바른대로 말해요. 어디까지 갔어요? 뽀뽀? 아니야, 고작 그 정도로 당신이 이럴 리가 없는데, 키스? 아니, 설마… 자…!”

쪽-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입까지 조금 벌어져 당황한 듯 굳은 모습에 몇 번 더 입술을 훔쳤다.

사릅, 사르륵-

바람결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아니, 다른 여자는 없어. 마나에 맹세하지. 이제 믿겠어?”

그의 선언과 동시에 몸에서 옅은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녀도 마법사에게 이 선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어, 어…. 아니, 그, 의심, 한 건 아닌데….”

그녀는 다시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숨기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호수 같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요동치며 시선을 피한다.

“그, 그게 그렇잖아요? 갑작스럽게 안기고, 울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고… 바람 핀 남자의 49가지 증세라는 책에서도….”

그녀는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거지. 알렌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작게 웃어넘겼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녀 입장에서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정 표현 하나 제대로 못 하던 남자가 대담하게 나오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상한 책을 읽는 건 자제시켜야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나오는 건 꽤 좋네요.”

그녀는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며, 환하게 웃었다.

알렌은 홀린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려는 그때.

“언니! 흐윽, 언니… 언니… 흐에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중 찾아온 상대는 그들이 아는 사람이었다.

다른 상대였다면 무례하다고 쫓아낼 수 있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가 있나요. 흐윽….”

눈물을 흘리며 둘만의 시간에 억지로 끼어든 것은 동생의 약혼자였던 카트린느 노블리에였다.

“파혼이라니, 흐윽…. 이걸 어떻게, 어떻게….”

레이첼도 오붓한 시간을 망친 그녀에게 분노한 눈치였으나, 흐느끼며 이야기하는 카트린느의 모습에 서서히 화가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랑 파혼했다고?”

레이첼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네, 언니, 흐흑…. 망나니 같은 모습에, 흐윽 정신이나 차리, 흐윽, 라고 홧김, 흐윽, 에 소리쳤는데….”

카트린느는 새벽부터 공들여 준비했을 화장과 머리가 엉망이 되어 감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흐윽, 출발 전부터, 흐윽, 준비, 크흥, 했는데….”

그녀의 차림새는 확실히, 하루 이틀로 준비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한 장식에서부터 구두와 드레스까지.

최대한 그녀의 매력을 승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들어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필시 본인 스스로 노력했겠지.

“이, 이름도 카타리나라고…. 크흥.”

그녀는 말하다가도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레이첼의 품에서 엉엉 눈물을 흘리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카트린느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이첼은 안타깝다는 듯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녀는 최근 망나니로 악명이 퍼지게 된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미 바뀌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극약처방을 하려 했다고.

그것이 바로 파혼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기에 이번에 파혼을 빌미로 약혼자가 완전히 갱생하게끔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파혼이라….”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내심 착잡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파혼이라니. 당신,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요?”

레이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혼자를 갱생시키겠다며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파혼을 해서 돌아온다는 말인가.

그녀는 지금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전혀.”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아직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런 증거와 준비 없이 모함했다가는, 전과 같이 쓸모없는 협작질에 불과해질 뿐이다.

‘증명해 낼 방법과 증거가 있어야 해. 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일반인과 다르다는 소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놈은 명백히 이상하다.

‘마치, 세계가 돕는 것 같은….’

가까이에서 놈을 지켜본 자신도 이렇게 생각할진대, 멀리서 소문만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놈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평범한 준비로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전에는 주변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

그의 눈이 잠시 카트린느에게 닿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실연당한 여자. 가까운 위치에, 동생을 사랑하며, 동기도 충분하다. 지금은 슬픔만 가득하겠지만….

잘만 벼려 낼 수 있다면.

‘비수가 될 수 있겠어.’

“진짜,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은 아니지만, 율리우스, 망나니가 되었다고는 해도 이번 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어렸을 땐 귀염성이라도 있더니 지금은… 후.”

레이첼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내가 대신 사과하고 싶을 지경이야.”

알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하자, 그녀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카트린느가 그 노… 율리우스를 만나겠다고 얼마나 준비했는데. 당신 내가 왜 갑자기 여기 찾아왔는지 알아요?”

“그건….”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본적인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도저히 모르겠군.”

애초에 그녀는 지금 시기에는 대사막에 위치한 아카데미에 있어야 했다. 그랬기에 그도 그녀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카트린느의 부탁 때문이에요.”

“그녀가?”

그녀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니는 갈슈딘 아카데미는 보통 두 가지 경우로 입학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직접 대사막을 뚫고 찾아와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 일반 학생 대부분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만…. 힘을 가진 이들은 아니에요.”

알렌은 회귀 전에도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상위 등수의 학생 8명의 추천과 교수진 한 명의 허락이 있다면 입학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죠.”

물론 재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한 학기도 버티지 못하겠지만요.

그녀는 짧게 덧붙이며, 창백한 낯의 카트린느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고위 세력의 자재들은 그 재능도 겸비하고 있기에 아카데미의 주인인 ‘그녀’도 허락해 주는 거고요. 그런데 노블리에 가문은….”

“세력이 크다고 할 수 없지.”

서쪽 왕국으로 한정한다면 세력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대륙 전체로 본다면 이름도 날리기 어려웠다.

“그렇죠. 그래서 그녀는 가문의 원로들까지 설득해 가면서 최대한 인맥을 동원한 거예요. 서쪽 왕국 출신 중 상위 등수의 학생에게 보상을 쥐여 주고, 교수 중 한 명에게 뇌물까지 바쳐가면서 저희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예요”

알렌은 슬슬 전체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를 입학시키기 위해?”

“그렇죠!”

레이첼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진심으로 율리우스의 행동에 분노한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이 일을 허락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신만 차리면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가 성공한다면 가문으로 이득이 돌아오지 않겠냐고 그렇게,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놈은…!”

“잠시, 잠시. 진정하는 게 어때, 레이첼.”

알렌은 레이첼의 손을 붙잡으며 깍지를 꼈다.

“후우….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오늘의 만남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 결과가 파혼이라니….”

그녀는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것도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따라온 것뿐이에요. 다른 학생은 노블리에 영지에 머물고 있고요.”

갈슈딘 아카데미라….

지금 동생을 놈에게서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곳에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금서와 잊혀진 지식이 가득하다고 했으니.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할 거지?”

“글쎄요…. 아마, 일이 이만큼 진행됐으니 멈출 수도 없고….”

슬쩍 말끝을 흐린 그녀는, 그에게 불쑥 물었다.

“당신이 해 볼래요?”

“내가?”

흥미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영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마쳐야 되고 또, 아직 몸을 움직이기에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

“흥미는 있지만, 지금은 안 되겠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카트린느가 대신 입학하지 않을까요? 조금이라도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그녀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더니, 무언가를 상상하고는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럼 가고 싶다는 건 맞죠?”

그녀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렇지.”

“그럼 됐어요. 아카데미에서 커플인 놈들, 진짜 눈꼴 사나웠는데, 히…. 잘됐어. 나도 빨리 다른 놈들 놀려 주고 싶으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와요.”

그녀는 알렌이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이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아니, 나는….”

“알았죠?”

“아니….”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어서 대답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그래.”

알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당신이랑 더 있고 싶은데. 카트린느 상태가 별로 좋지 않네요.”

카트린느는 무서운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식은땀이 흐르며, 작은 신음을 흘려댔다.

그녀는 일어나며 깍지 낀 손을 미련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데.”

그녀는 카트린느를 슬쩍 쳐다보더니, 얼굴을 숙였다. 진한 뮤게 향기와 달달한 숨결이 느껴졌다.

“이, 이거 엄청 부끄럽네요. 역시, 당신이 이상해진 거야.”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 이상했죠?”

“글쎄?”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다음까지 가고 싶지만…. 지금은 안 되려나.

그의 눈길이 카트린느를 향하자, 레이첼이 빽- 소리쳤다.

“이다음은 안 돼요! 지금은… 야외고, 카트린느도 있고, 시간도 없고….”

그녀의 말소리가 작아지더니, 끝내 속삭이는 듯 작아졌다.

“다음을 하고 싶으면… 아카데미로 와요. 나, 나도… 흥미는 있으니까.”

알렌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반드시 갈게.”

그것으로 그날의 만남은 끝이 났다.

그녀도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 듯 빠르게 카트린느를 데리고 화원을 나섰다.

알렌은 그녀들이 떠난 자리에서 조용히 돌무덤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날 날이 머지않았다.

‘아카데미는…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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