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아….”
그녀는 그 대답에 구슬피 울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났을 때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즐거운 일이 있는 듯 활발한 어조로 일상을 이야기하며, 평소보다 훨씬 늦게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그리고 떠나갈 때, 한마디를 했다.
“나, 다음 주에 시집가요. 그동안 즐거웠고, 잘 있어요.”
그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가지 말라 붙잡을 수도, 온전히 축복할 수도.
그리고 며칠 후에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
저택에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고.
그리고.
-당신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당신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중간에 비라도 맞은 듯 잉크가 번져 있었다.
-지금쯤 이 편지를 받을 당신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쉽네요.
그녀다운 당당한 어조. 생생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지?”
-뭐…. 제 성격을 생각하면,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 편지가 배달되었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어요.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요?
“그래…. 그렇지.”
있을 때 잘했어야지.
유독 그 말이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물이라도 튀었는지 옷소매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저주하려는 건… 더욱 아니고.
“아니기는 무슨.”
-사실, 조금 생각하긴 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몇 번을 갔는데 문 한 번을 못 열어 줘요? 내가 차 한 잔 마시자고 했어? 나가자고 했어? 얼굴 한 번 보자는데 그게 왜….
“그래, 내가 너무하기는 했지.”
후회하고 있어.
그래도 강제로 들어와도 됐을 텐데.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렇게 하니 내가 진 거 같잖아요?
너는 그런 여자였지.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일말의 선은 지키던 여자.
그는 그렇게 누가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음습한 단칸방 아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미소가 나왔고, 자신을 장난스럽게 탓할 때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 새로운 약혼 상대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아. 당신 방금 표정 딱딱하게 변했죠?
움찔-
-두리번거리지 마요. 나 찾아도 이제 없다니까? 그냥, 그냥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그 말에,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듯한 대답에.
-그러니까 당신도 조금 느껴 봐야 해.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조금 아프면, 나중에 만났을 때 잘해 주지 않겠어요?
더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솔직히 당신이 천국 갈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으니까…. 특별히 내가 먼저 지옥에서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당신은 조금 늦게 와요.
“……그래.”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가문은… 내가 당신 약혼자라서 말해 주는데, 후계자는 못 되니까 그냥 땅 하나 받아서 독립이나 해요.
“그건…. 생각해 볼게.”
-새로운 여자는 질투나지만…. 어쩌겠어. 당신을 그 골방에서 꺼낸 여잔데 그 정도는 인정해 줘야지. 하지만 내가 정실인 건 분명히 해요.
“약속하지.”
-더 쓰고 싶지만 원래 말 많은 여자는 구질구질 한 법이라, 이만 마칠게요.
어느새 편지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이 이야기를 준비해 와요. 남자는 여자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줘야 하는 거 알죠? 그럼… 조금 있다 만나요. 사랑해요. 언제나.
편지를 들고 있던 팔이 부들거렸다.
-당신의 약혼자, 레이첼 그라나프로부터.
그날, 그는 연구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게으름을 피웠다.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 * *
과거를 회상하다 도착한 곳은 저택의 뒤편, 작은 오솔길을 지나 도착한 화원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돌탑이 쌓여 있었다.
동생이 죽었다 생각하고 만든 돌무덤.
사실, 무덤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돌무더기에 가까운 모양새였지만 상관없었다.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됐으니.
묵묵히 화원에 앉아 있으면서도 뭐 하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없어진 일인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 않은가.
이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에 너무 우스웠다.
“너무 감상에 빠졌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웃음을 흘리며, 이제 돌아가려던 차에….
“당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들렸다.
고압적이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 그리고….
“레이첼.”
그의 몇 없는 후회 중 하나이자, 그리워했던 여인.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보였다.
상아색의 머리칼과 하늘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 그녀는 짜증이라도 난 듯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왜 여기 있냐고 묻…. 꺄악!”
그는 그녀인 걸 확인하자 성큼 성큼 발을 내디뎠다.
“…레이첼.”
그리고.
-와락
“아야, 아프잖아요! 왜 달려들고…. 당신 울어요?”
힘껏 껴안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끝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감정을 주체할 수 있을까.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다.”
미안하다. 입에 맴도는 말이었지만, 그걸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회귀 전의 그녀에게 품은 감정을 들이대는 건, 지금의 그녀에게 실례였기에.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는 같은 사람이자,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이 못내… 슬펐다.
“푸흐,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할게요.”
그녀는 그를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얼른 그쳐요.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 하겠어요?”
“……그래.”
그렇게 가만히, 그녀를 껴안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 *
“그래, 하자. 파혼.”
툭- 내뱉은 말에 상대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파, 파혼하자고? 진심이야? 너?”
“네가 하자며?”
율리우스는 상대의 가문을 떠올렸다.
노블리에 가문.
몇 대 전부터 쌓아 올린 명성과 가문의 비전이 꽤 쓸 만하다고 알고 있다. 서쪽 왕국인 이곳에서는 제법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봤자, 엑스트라도 못 되는 가문.’
당장 초반-중반의 무대인 아카데미에만 들어가도 노블리에 가문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가문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여기서 파혼하지 말자고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얼굴은 좀 괜찮긴 한데….’
그렇다고 결정을 바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만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특성 [무지개 마안(S)]이 발휘되자 일순간 눈동자가 다채롭게 빛나며 상대를 감정했다.
‘밑에서 세 번째…. 파란색.’
별 같잖은 재능을 가지고.
지역 단위로 재앙이 벌어지는 중반부만 지나가도, 만나는 인물 대부분이 저것보다 높으면 높지, 낮지 않을 것이다.
“너,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랑 파혼하겠다고?”
부들거리는 몸과 수치심인지 새빨갛게 물든 얼굴. 눈까지 크게 뜨인 게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반해 율리우스는 태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너도 파혼하고 싶어서 온 거잖아? 아니야?”
“너, 지금 나한테…!”
율리우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딜 저 정도 재능으로 자신을 묶어 두려 한단 말인가.
‘내가 더 아깝지.’
형 정도 재능이라면 모를까.
율리우스는 며칠 전에 보았던, 검게 꾸물거리는 색을 떠올렸다.
그런 경우도 있을까 싶어 원작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시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까웠을 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정략결혼이라는 카드가.
첩을 더 들일 수 있다고 해도, 정실이 되는 단 하나의 자리를 이렇게 허투루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율리우스는 더 이상 대화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 하품을 쩍쩍-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됐고, 파혼할 테니까, 나 그만 간다?”
“뭐, 뭐? 이런 무례한…!”
그도 그녀가 재능에 관계없이 엄청난 뒷배경을 가졌거나, 재능은 부족하더라도 원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 있을까?’
이름 하나 짤막하게 언급된 적도 없는 가문에,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은 약혼자.
거기에 상대가 먼저 파혼을 하자고 소리쳤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굳이 매달릴 필요도 없었다.
“이름이… 카타리나? 카트리엘? 어쨌든, 이만 갈게.”
율리우스는 상대가 뭐라 하든 대충 손을 내저으며, 응접실을 나갔다
“이, 이…!”
카트린느는 얼이라도 빠졌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근처에 있는 히든 보스를 잡아야 하는데….’
이번 유적 투어가 끝난다면 본격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원작 주인공을 만나기 전에 최대한 무력도 키워야 되고, 재능 있는 조연들도 끌어와야 했다.
지금쯤 상황이 안 좋을 조연이 근처에 누가 있더라?
여기 근처에도 한 명 있었던 거 같은데….
‘서남쪽 근처던가?’
그의 뒤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트린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지나가던 하녀가 화들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율리우스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아서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