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뭐라고?”
알렌은 방금 들은 소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패른 남작이 연금된 방을 탈출했다?”
“네! 지금 하녀들 사이에서도 엄청 시끄러워요.”
린벨은 잠자리가 편했는지 반짝이는 자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답했다.
이넬리아를 쳐다보자 그녀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금방 들킬 거짓말이라면 더욱.
“아니, 하. 설마.”
너무 놀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지금이 그랬다.
그가 연금된 장소는 본관에서 떨어진 장소에 있는 별관이다.
패른 남작은 백작령의 주인인 아버지께 직접 재판받기 전까지 그곳에 갇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무력화된 패른 남작이.
햇빛 하나 없는 독방에서.
문을 지키던 병사를 물리치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저택에 가득한 하인과 하녀의 눈을 피해서.
“도망쳤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저택의 경비 수준이 그렇게 낮았나?
그녀들은 아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아 행동이 어색했지만, 매번 홀로 갈아입던 것보다는 속도가 빨랐다.
“아버지께 가야겠다.”
알렌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일에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으리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독이 됐다.
문 앞에서 잠시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올렸다.
똑똑-
알렌은 성급해지는 마음과는 다르게, 귀족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손길로 일정하게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알렌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가이엘은 언제나처럼 딱딱한 어조로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들어오거라.”
철컥-
아버지는 평소의 자주 보이던 차가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알렌은 속에서 차오르는 의심을 애써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 패른 남작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오늘 새벽에 보고를 받았다.”
아버지는 이미 들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알렌은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목적을 밝혔다.
“제가, 그를 쫓는 추격대를 꾸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버지.”
“이미 추격대를 보냈다. 그러니 네가 그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버지는 그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알렌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 저택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아래에 있다.
그런데 패른 남작이 탈출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아니, 애초에.
“…그럼 프린달 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분이 있었다면 금방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요.”
5위계 마법사의 감지 범위에서 무사히 도망치는 게 가능한가?
운이 좋게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금방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율리우스와 함께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던가?
분명히 프란시스카가 만나러 가는 걸 봤는데?
“그분께서 저택에 계셨다면 알아채지 못하셨을 리 없습니다.”
“프린달 님은 귀환한 직후 급한 일이 생겨 프란시스카 양과 함께 떠났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다.
패른 남작이 탈출을 시도했던 밤에, 그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던 5위계 마법사가 급한 일이 생겨 도시를 떠났다?
패른 남작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고, 아버지는 무엇을 꾸미는 거지? 아니, 정말로 아버지가 꾸민 짓은 맞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몸을 휘감았다. 마치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검은 책도, 회귀 전의 기억도 모두 쓸모가 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뭐 하는가.
알렌과 율리우스, 그들이 기억하는 편향된 정보만이 있는 것을.
그렇다고 책에서 먼 미래의 정보를 읽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니 답답함은 배가되어 돌아왔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다.
이렇게 일을 진행한 것만으로 뻔하지 않은가.
동생이 바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이라고 바뀔까?
차라리….
‘패른 남작에 대한 것을 알아볼 수 없다면.’
“마나에 맹세해 주십시오, 아버지.”
가이엘은 여전히 깊은 눈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지른 무례의 값을 달게 치를 테니. 부탁드립니다.”
곧게 뻗은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마주친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다. 이전에도, 지금도, 또 미래에도.
“패른 남작이 도망치는 데 관여하지 않았노라고, 맹세해 주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적막한 방 안에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 정확히 30번 흘렀을 때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무례를 저질렀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안다, 알고 있다.
고작 후계자 따위가 백작가의 가주에게 맹세를 강제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이 모든 게 우연인지, 아버지의 뜻인지, 그게 아니라면 배후의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조종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는지.
“책임지겠습니다.”
확실히 알아야 했다.
그렇기에 알렌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무례한 행태를 저질렀다.
그가 평소에 혐오하던, 귀족답지 않은 행동을. 논리나 이성이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그런 짓을.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것밖에 답이 없는데.
“저지른 무례의 값을 달게 치를 테니. 부탁드립니다.”
가이엘은 한동안 알렌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뒤로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패른 남작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적이 없다. 마나에 맹세하지.”
그의 몸 주위로 마나가 요동치며, 그의 주위를 휘감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만족했느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이엘은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는, 알렌 네가 패른 남작이 도망친 것 때문에 자칫하면 율리우스의 공이 퇴색될까 봐 저지른 일탈로 받아들이겠다.”
알렌은 그 말의 뜻을 알았다.
“동생을 지극히 생각하는 너의 성격은 저택 모두가 알고 있으니, 분명히 납득하겠지.”
이것은 명분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체면치레를 해 주겠으니, 얌전히 물러가라는 뜻과 진배없었다.
“그러니 얌전히 방에서 여독을 풀 거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그 소리에 알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방금의 행동으로 누가 일을 주도했고, 누가 일을 보조했는지 판단이 섰다.
알렌이 힘없는 걸음으로 집무실에서 빠져나오자,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갔던 알렌이 걱정스러웠는지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던 린벨이 작게 속삭였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그래.”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렌은 이넬리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에서 얌전히 쉴 시간은 없었다. 비록 패른 남작을 추격할 수는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은 더 있었으니까.
“어머니께 가지. 너희들을 소개해 줄 겸,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겠다.”
이참에 계획한 일을 할 동안, 그녀들에게 시녀에 대한 교육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패른 남작에 대해 알아보지 못한 것은 뼈아팠으나, 아버지와 대화하며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알렌은 그녀들을 이끌고, 어머니가 자주 가시는 저택 본관의 야외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윤기가 흐르는 자색의 머리카락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외모. 남다른 품격과 기품을 가진 그녀는, 백작가의 안주인이자 알렌의 어머니인, 엘리자였다.
“알렌, 요즘 얼굴을 못 봐서 매우 섭섭하구나.”
그녀는 알렌이 찾아왔을 때까지만 환하게 웃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뒤바꾸고는 섭섭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하하…. 다음부터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몇 번.”
“예?”
“일주일에 4번, 아니 3번은 찾아와야 하지 않겠니?”
알렌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고집스러운 성격에 거절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네, 일주일에 4번은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알렌이 마지못해 답하자 엘리자는 다시 환하게 웃고는 그를 맞은편에 앉혔다.
“그래, 그래야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졸졸 따라다녔는데. 엄마 요즘 너무 서운한 거 아니? 너도 그렇고, 율리우스도 그렇고. 그이도 자기 일에만 빠져 있어서 얼마나 외로운데.”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저 두 명이….”
한참 자기 이야기를 떠들던 어머니의 시선이 그의 뒤를 향했다.
린벨은 여독이 다 풀리지 않았는지 고개를 꾸벅였고, 이넬리아는 그런 린벨을 깨우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고 있었다.
“새로 들었다는 시녀니?”
“예.”
“직접 뽑아 준다고 할 때는 한사코 거절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글쎄요. 이 나이까지 시녀 하나 없이 다니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그에게 진심이냐는 듯 물었다.
“나는 몰라도….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는데? 아마, 네가 그렇게 말하던 격 떨어지는 행동이라 비웃음당할 텐데?”
알렌은 일부러 약 올리는 듯한 말을 쓰는 그녀에게 쓴웃음 지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회귀 전에 시녀를 가지지 않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돈이 없어서?
맞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원했다면 가문에서 그를 위해 시녀 하나 못 구해 줬을까?
영지 하나 없는 작은 귀족가의 영애든, 철저한 교육을 받은 특급 노예든.
그가 원했다면 가지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시녀가 백작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하르트 가문은 지금은 쇠락하고 있다지만, 엄연히 백작령을 다스리는 거대 가문이다.
그런 그가 변변찮은 시녀를 데리고 다니면 되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굳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은 아니었다.
“어머? 알렌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이야. 히벨에서 여러 가지를 겪었나 봐?”
“예, 뭐. 가치관을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행동이 바뀔 계기 정도는 주었지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그는 율리우스가 더 중요했으니까.
미래의 대륙 8강 중 한 명이 될지도 모르는 인재와 한순간이나마 반신의 전력을 내보이는 인재 모두를 영입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깟 남의 시선이 중요할까.
“그거 잘됐구나, 나는 네가 언제나 시녀를 들이길 바라는 입장이었으니. 그런데….”
어머니는 재밌는 모습을 봤다는 듯 조용히 입술에 손가락을 댄 후, 린벨의 말캉한 볼에 손가락을 푹- 찔렀다.
“흐악!”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쳐들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행동을 멈췄다.
어머니는 귀엽다는 듯 말랑한 두 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얘는 귀엽구나. 아직 젖살도 안 빠졌고.”
린벨은 가만히 굳은 채 그녀의 손길에 농락당했다.
“아들이 뽑은 이유가 있었네. 아직 때도 덜 탔고. 음음.”
이넬리아는 린벨이 어머니의 손에 잡혔을 때부터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렌은 결국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긴장해서 굳지 않았습니까.”
“아들의 시녀니까, 말을 들어야지. 어쩔 수 없구나. 그래서….”
한참 볼을 만지작거리고 자리에 돌아온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아온 진짜 이유는 뭐니?”
“당연히,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
“저 두 명의 교육을 맡기기 위해서 왔니?”
어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린벨과 이넬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
“아니기는, 나는 알렌 네가 그렇게 엄마를 챙겨 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단다.”
몇 년을 키웠는데. 엘리자는 난감한 미소를 짓는 알렌을 무시하고 눈을 돌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걷는 자세도 제각각이고, 시녀라는 직책을 가진 주제에 졸고 있고. 주인의 의중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알렌 네 노리개로 데리고 온 줄 알았잖니?”
엘리자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러면서 가늘게 눈을 뜨고 그들을 살폈다.
린벨은 실수한 것을 깨달았는지 몸이 굳은 채로 있었고, 이넬리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깎아내리는 와중에도 일말의 반항기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는 않는구나. 이건 장점이지만….’
엘리자는 천천히 그녀들의 모습을 살피며 평가했다.
‘피부는 평민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력이 있어, 이종족 혼혈인가? 심성도 나빠 보이진 않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몇 마디를 더 던지며 이모저모를 파악했다.
알렌은 저런 어머니의 모습이 익숙했기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철저한 어머니가 율리우스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실, 알렌은 아버지의 변화보다 어머니가 사치에 빠졌었다는 사실이 제일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업무 일부를 도와 저택 내 살림을 책임지시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변했다는 것이 놀랍고, 항상 의아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둘 다 괜찮은 것 같구나.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
한동안 두 명을 살펴보던 그녀가 다시 환하게 웃자 린벨과 이넬리아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너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니 내가 며칠 교육을 시키마.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왔잖니?”
엘리자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알렌은 그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는 소리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섭섭해하신단 걸 듣고 걱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얘도 참? 당연히 알고 있단다.”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너는 진심을 말할 때, 턱을 살짝 당기는 버릇이 있으니 조심하렴.”
알렌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리는 그녀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일주일에 4번 찾아오는 건 잊지 말고?”
“예.”
알렌은 그를 애써 바라보는 린벨의 시선을 무시하며 저택으로 향했다.
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그녀들이 교육을 받는 사이, 그것을 얻기 위해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