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알렌은 대답하는 것이 늦었음을 깨닫고,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과 마주 보았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시녀라면… 말할 것도 없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알렌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프란시스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란시스카 양, 그래서 놈의 위치는….”
그가 그녀에게 놈이 어디까지 이동했는지 물으려는 그때, 주변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외쳤다.
“습격이다!”
“공자님, 습격입니다!”
“대열 맞춰! 빨리! 다 뒤지고 싶어?”
알렌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키에에에엑!
-카아아아악!
-끼에에에에!
키메라들이 몰려온다.
놈들은 산맥에 이동하기 적합한 역관절의 육체로 땅을 거세게 박차며 돌격해 왔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수백 마리는 될 법한 키메라가 갑자기 등장했다.
알렌은 키메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곳까지 들어온 걸로도 충분하다.’
병사들을 데려온 이유도 수백의 키메라를 상대할 인원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각자 대열 맞춰! 부상자는 뒤로 빼고! 훈련대로 한다!”
가문에서 직접 키운 병사들답게 여기저기서 빠른 대응이 이루어졌고, 순식간에 네 면을 막는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카아아악!
깡!
“죽어라, 괴물아!”
-푸슉
막고 찌른다. 정석적인 대응이 시작되자, 괴물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알렌도 전황을 살피며 대기하던 그때.
돌연 프란시스카가 외쳤다.
“공자님! 키메라가 눈치챈 것 같아요!”
그녀는 급히 북쪽 방향을 돌아보며 외쳤다.
알렌은 주변의 숲을 둘러봤다.
대낮임에도 음침한 분위기, 그 주위로 잘 자란 흑단목들이 거대한 몸체를 들이밀며 검게 그늘진 공간을 만들었다.
“와요!”
프란시스카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급히 검은 보호막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늘에서 그림자가 솟아나며 보호막을 내리쳤다.
-쾅!
“이걸 반응했다니… 역시 성가시군요.”
그녀를 기습한 건, 산맥으로 도망쳤던 키메라였다. 3m 남짓한 크기에 울긋불긋한 근육으로 휩싸인 악마를 닮은 괴물.
그를 확인하자, 린벨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너…!”
레그놀은 킬킬 웃음을 흘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반달로 휘어지며,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오호…. 이넬리아의 인형이 아닙니까.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찾아갈 수고를 덜었군요.”
“엄마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지 마!”
알렌은 당장 달려들려는 린벨의 몸을 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
병사들은 거대한 키메라가 등장한 순간 동요했으나, 물러섬 없이 맞서는 프란시스카의 모습에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린벨, 진정하거라.”
“…네.”
린벨은 알렌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말없이 괴물을 노려봤다.
알렌만 아니었다면 달려들 것 같은 그녀의 분노어린 모습에 레그놀이 환하게 마주 웃었다.
“하하, 그렇게 바라보면 조금 부끄럽군요.”
알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레그놀을 살폈다.
이넬리아는? 없다. 그렇다면, 공방에 있다는 말이겠지.
그의 심장 어림에서 거대한 원이 묵직한 굉음을 발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웅-
“프란시스카 양.”
“네, 공자님.”
알렌은 자신의 영역 아래 마력으로 실타래를 뽑아냈다.
“죄송하지만, 저놈을 맡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두 명이 힘을 합쳐 키메라를 쓰러트리는 게 더 옳은 선택인 것을 알았다. 산술적으로 봐도 1 대 1보다는 2 대 1이 더 유리하다는 것도 안다.
병사들을 도와 키메라를 모두 정리하고 공방으로 향하는 게 더 옳은 선택이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공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뇌리를 찔렀다.
자신이 알던 미래가 자꾸 달라진다.
무능했던 남작은, 그가 알던 것과 다르게 적절한 대응을 한다.
이넬리아를 살리기 위해 시녀로 들였으나, 과거와 다를 것 없이 납치당한다.
더 이상 휘둘릴 수는 없었다.
‘아마, 이것 이상으로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전생에 겪었던 일이 다시 재현되겠지.
그렇기에 그는 그녀에게 부담을 지운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미래의 상암의 마녀라 불리게 될 그녀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반드시,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제가 부…?”
“제가 맡을게요. 그러니 가세요.”
알렌은 그녀의 깔끔한 수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미래에 그가 알던 그녀의 괴리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걸 느긋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알렌 공자님, 하지만….”
린벨은 그녀가 자신을 도와준 그녀가 저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게 신경 쓰이는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강하니 혼자서도 충분할 거다.”
“강하니까, 네, 프란시스카 님은 강하시니까….”
그녀는 그 말을 몇 번 곱씹더니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강하게 쥐었다.
“네, 그렇다면, 이제 가요. 공자님.”
레그놀은 이 모든 대화를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는 것처럼 지켜보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이제 대화는 다 끝났습니까?”
그의 몸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근육 자체만으로 흉기라 할 수 있는 신체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저는 이런 광경이 너무 좋습니다. 우정, 연대, 믿음. 마치 제가 악역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런데….”
레그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가 보내 준다고 했습니까?”
알렌은 직감에 의존해 마력을 엮어 무형의 방패를 만들어 냈다.
방패는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부서졌지만, 알렌이 몸을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쾅-
바닥이 흔들리며, 흙더미가 날아올랐다.
병사들은 빠르게 전장의 위치를 옮긴 지 오래였다. 괴물과 초인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들은 장정 백 명이 모여도 하나의 초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잘 피하….”
레그놀이 곧바로 알렌에게 돌진하려는 순간, 커다란 촉수가 그를 후려쳤다.
팡-
레그놀이 거대한 흑단목 나무를 연이어 부수며 땅에 처박혔다. 그를 쫓아 커다란 촉수들이 빠른 속도로 공중을 꿰뚫었다.
“얼른 가세요!”
프란시스카는 알렌의 뒤를 막아 주며, 크게 외쳤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알렌은 곧장 린벨을 데리고 앞으로 달렸다.
그의 뒤로 분노에 물든 목소리와 커다란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 * *
알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회귀 전, 그러니까 전의 사건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퀘스트창] 이라는 능력으로 도시의 습격을 예견하며, 습격을 대비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알렌은 그가 하는 행동 모두를 방해하며, 조금이라도 공을 세울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는 도시가 큰 피해를 입는 것뿐이었다.
알렌은 큰 공을 세워 실수를 만회하고자 키메라 술사의 공방으로 향했다.
흔적 자체는 적었다.
그러나 키메라 수백이 움직였기에 적은 흔적을 가지고도 수월하게 추적할 수 있었고, 하루가 지났을 때는 그는 키메라 술사의 공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방은 방비가 허술했다.
멍청하고 허약한 키메라 수백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키메라 술사의 수준, 딱 그 정도의 공방.
그렇기에 그와 함께했던 병사들 수준 정도로도 쉽게 함정을 뚫고 공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후에 발견한 대규모 실험장의 끔찍함을 견디지 못한 알렌은 도망쳤고….
‘후에 듣기로 율리우스, 그놈이 뒤늦게 나타난 키메라 술사를 정리했다고 했지.’
그 키메라 술사도 별로 강하지 않다고 했다.
그게 전부고,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 왜.
“고개 숙여라. 린벨.”
“네, 네!”
린벨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도끼가 지나가며 거친 풍압을 일으켰다. 도끼의 주인인 키메라는 기괴한 함성을 내지르며 다시 도끼를 수거했다.
그의 주위로 수십의 키메라들이 몰려들었다. 알렌은 벽을 등지고 가까이 다가오는 키메라들에게 약한 충격파를 터트렸다.
-팡!
가까이 있던 키메라가 쓰러지며, 다시 공간이 만들어진다.
알렌은 양손으로 각기 다른 수인을 얽고, 풀며 다시 맺었다.
마력이 줄기줄기 엮이며 술식을 구성한다.
‘수가 너무 많아. 정말 같은 장소가 맞나?”
처음 동굴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의 기억을 의지하며 길을 찾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함정이나 도시에 쳐들어왔던 것보다 강한 키메라의 향연에 그는 그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알렌이 손을 휘두르자 먼저 완성된 술식에서 충격파가 터지며 다가오던 키메라의 머리를 터트린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 키메라가 울부짖으며, 다시 빈자리를 채웠다.
끝없는 연쇄에 알렌은 한꺼번에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심장의 마력 노심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웅웅-
뱃고동 같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모인 마력이 실타래가 되어 형상을 고정하기 시작한다.
[영혼], [소리], [충격], [공간].
알렌의 심상에서 구상한 4개의 개념이 정렬되며, 그가 이해한 마법 계통을 통해 현실로 구현된다.
‘마법의 본질은 세계를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한 세계의 본질을, 인간의 의지 아래 비트는 것.
알렌은 상상했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단을, 적들을 해칠 무기를. 알렌의 마력 노심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마력을 뽑아냈다.
‘너무 강할 필요도 없어.’
적들을 무력화시킬 정도만.
그가 평생을 익힌 공간과 영혼에 대한 이해와 상상이 합쳐져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그의 등 뒤로 실타래가 엮이기 시작한다. 평생을 바느질을 익힌 수선사처럼.
더욱 정교하고, 더욱더 세밀하게.
만드는 건 하나의 현상이자 마법.
술식 하나하나가 알렌에 의지 아래 통제된 마법은 잿빛으로 명멸하며 거대한 북으로 만들어졌다.
그래, 이 정도의 마법, 1위계 수준으로 이 정도가 한계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린벨, 귀를 막거라.”
도시로 진격한 키메라보다 한 단계 강화된 키메라들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눈을 감았다.
그의 곁에서 린벨의 겁에 질린 목소리와 웅크린 존재감이 느껴졌다. 알렌은 주의 깊게 그녀를 대상에서 제외하며 술식을 조정한다.
그의 머리 뒤에 떠 있는 회색빛의 북이 꿈틀거리며 스스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차분히,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처럼.
“요람의 부름.”
북을 두드렸다.
둥―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잿빛의 파동이 퍼져 나가며, 모여들던 키메라를 뱀처럼 휘감는다. 알렌은 이 정도로 부족하다는 듯 더욱더 거세게 손을 휘둘렀다.
둥둥―
“키에에에엑!”
“크르르륵-!”
퍼져 나간 파동은 저주처럼 키메라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본 그들은 회색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변했다.
그리고.
-털썩
순식간에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그의 주위로 정적이 내려앉자, 알렌은 손을 휘저었다.
잿빛의 북이 흩어져 사라지며, 알렌의 눈이 뜨였다.
“후우….”
“다 끝났나요…?”
귀를 꽉 막고, 눈까지 감은 채 웅크려 앉은 모습에 알렌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녀가 번쩍 뜬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공자님, 이, 이건 와….”
그녀가 황급히 다가가려 하자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살펴보거라,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래도 엄청난 마법이네요, 저도 이렇게 강했다면….”
무기력하게 엄마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을 텐데.
알렌은 그녀가 흘린 뒷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를 바꾸려고 했던 건데.
“너도 할 수 있을 거다.”
“…제가요?”
“그래. 마법은 힘들겠지만, 검이라면.”
내가 기억하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너였으니.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자,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업적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마법을 보고 놀라다니.’
전생의 그녀가 봤으면 아마도 그럴 리 없다 부정하지 않을까.
그가 사용한 마법은 그녀가 보기에 대단할지 몰라도 사실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약점이 뚜렷하고, 위력도 애매한 마법.’
그가 사용한 마법은 귀를 막거나, 소리를 차단한다면 쉽게 막을 수 있다.
혹시 몰라 그녀를 범위에서 제외했지만, 귀를 막아 소리를 차단한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마법이었다.
위력 면에서도 마찬가지.
이 마법은 상대의 정신력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지능이 낮은 키메라였기에 확실한 효과를 봤지만 뛰어난 전사는 그대로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키메라 술사가 이 전투를 지켜봤다면, 다음 전투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알렌은 상대가 그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방에 발을 들인 순간, 아니 키메라와 마주친 순간부터 놈은 자신을 파악했을 테니.
파훼법은 알려졌다고 봐야겠지.
그는 주위에 널브러진 검 하나 주워 쓰러진 키메라의 목을 내리쳤다.
-뎅겅.
“목을 베고 심장을 터트리는 일이다. 너도 할 수 있겠느냐.”
“아. 그, 해 보겠습니다.”
린벨은 용케도 검을 들어 올리며 목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몇 번 반복하자 점점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천재, 인가.’
알렌은 그녀의 부름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다 끝났어요.”
“그럼….”
가자.
저 너머로.
공방의 저 깊은 곳에서 불길한 파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