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저희는 산맥 안에 있는 사냥꾼 마을 출신이에요. 저랑 엄마랑 두 명이 함께 지냈죠. 평소에는 엄마가 사냥해서 가죽을 팔고, 제가 근처 약초를 캐서 살았어요.”
사냥꾼 마을이라….
"완전히 어렸을 때 기억은 안 나지만요. 엄마 말로는 땅에 머리를 박은 이후로 그렇다는데. 헤헤…."
알렌이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그곳은 거친 사냥과 험한 산맥을 타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그런 곳에서 어미 홀로 자식을 키워 냈다라… 그것도 사냥꾼으로.’
평범하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괴물이 나타나서 옆집 약초를 캐던 헨켈 아저씨하고 겁 없다던 제이슨 아저씨가 사라지고, 상인들도 마을로 찾아오지 않아서….”
“그만.”
설명이 너무 길어진다 싶어 알렌이 끊었다.
“그래서 병사들이랑 다투게 된 원인이 뭐지?”
그녀는 눈을 흘기다가 상대가 알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네, 그게. 그렇게 해서 도시로 피난을 오게 됐어요. 그런데….”
“검문에서 막힌 거군.”
그렇게 말하고 나니, 알렌도 의아했다.
피난을 온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도시 바깥에 내버려 두고 있는 실정인데 그녀는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가.
“…그, 그래서.”
그녀가 또 우물쭈물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치자, 알렌이 강하게 말했다.
“그래서.”
알렌이 그렇게 재촉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뇌물을 주고 몰래 들어왔어요.”
“뭐?”
“큰 성문이 있는 북문과 남문 말고 서문이나 동문으로 가면, 적당한 뇌물을 주고 도시에 몰래 들어올 수 있거든요.”
그녀는 큰 죄라도 말한 듯 몸을 벌벌 떨었으나, 알렌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뇌물을 주고서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도시로 들어왔을 테니. 위험한 바깥에서 안전한 성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래서.”
“어?”
“그래서 네가 병사랑 다툰 원인이 뭐지?”
그녀는 예상과 달리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되묻는 그의 모습에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뇌물을 줬죠. 재산의 반이나 넘게 뜯어가는 건 심했지만, 엄마가 그래도 안전한 게 낫다고 그냥 지불하자고 해서 모피하고 약초까지 다 줬는데….”
그러다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에서 방울방울 액체가 맺히기 시작한다.
“…나쁜 놈들. 제가 넘어가고 엄마 차례가 됐을 때, 갑자기 남은 재산까지 다 내놓으면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흑….”
그녀는 병사들에게 소리쳤을 때랑 달리,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채 말했다.
훌쩍-
“…그래서 엄마는 결국 다 줬는데도, 흑…. 갑작스럽게 일정이 바뀌었다면서 쫓아내고…. 흐앙….”
알렌은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는지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잠깐 오거라.”
결국 그렇게 놔두기도 뭐해 그녀를 토닥이자, 그녀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앞섶을 적셨다.
“흐에…. 엄마 어떡해요. 공자님…. 흐윽….”
“괜찮다. 내가 도와주마. 아마도….”
‘내 탓 같으니까.’ 그렇게 된 것에 자신도 일정부분 기여한 것 같으니.
병사들의 행태는 그녀 입장에서 본다면 분노할 만했으나, 알렌은 냉정하게 말해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일정이 뒤바뀌었다는 말은, 아마도 우리 일행 탓인가?’
알렌과 프란시스카 일행이 성벽에 도착하자, 멀리서부터 그걸 목격한 병사들이 급하게 통제를 한 것으로 보였다.
“엄마 밖에서 잘못되면 어떡해요…. 흐윽….”
알렌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여러 가지의 수를 생각했다.
회귀 전에는 도시까지 오는 데 며칠의 시간이 걸렸지? 과거에도 그녀는 모친과 헤어졌나? 정확히 어떻게 됐었지?
‘지금과 비슷하게 도착했었다.’
이것도 검은 책을 살피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그라도 과거의,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난 기억을 완전하게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도 아직 위계가 높지 않을 적의 기억.
대략적인 건 기억했어도, 세밀하게 떠올리는 건 어려웠다.
‘세세한 부분은 책에 의지할 수밖에 없겠군.’
미래가 달라질수록 본래와 바뀌게 된 역사에 쓸 만한 정보는 적어지겠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지금은 충분히 유용하다는 것.
“내일 아침 일찍 직접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겠다. 어느 쪽 문이라고 했지?”
“훌쩍…. 서문이요….”
“아침에 직접 데리러 가게 해 주마.”
그녀의 몸이 크게 떨리며, 붉게 변한 눈망울이 커졌다.
“흐극…. 감사, 감사해요. 공자님. 진짜, 흐으, 은혜는, 훌쩍, 반드시… 반드시 갚을 테니까…. 흐앙!”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윤기가 흐르는 흑발을 쓰다듬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탓인데. 이렇게 기뻐하다니.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졸렸는지, 눈이 반쯤 감긴 채 작게 옹알거렸다.
“지금….”
“음?”
“지금 만지셔도 뭐라 안 할게요….”
그렇게 옹알거리던 그녀는 수마를 버티지 못했는지 빠르게 의식이 멀어졌다.
“하.”
알렌은 끝까지 의심을 버리지 못한 그녀에게 코웃음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들어가서 여분의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자, 그녀는 옷깃을 꽉 잡았다.
강하게 힘을 주면 깨어날까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상황.
거기에 열흘간의 여독이 겹치자, 알렌도 더는 수마를 참기 힘들었다.
“…내일 또 뭐라 하겠구나.”
내일 그녀가 하악질하며 소리칠 것을 생각하던 그는, 그 상태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알렌의 숨소리가 금방 고르게 변했다.
그 순간 그의 품에 잠들었던 그녀의 눈이 작게 뜨였다.
“…고마워요. 정말.”
잠시 후, 작은 소리와 함께 움직였던 인영은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알렌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졌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아직까지는.
* * *
“여기는…. 꺄!”
바닥에서 명상을 하고 있던 알렌은 작은 비명 소리에 눈이 뜨였다.
옅은 호흡을 반복하며 명상을 마무리하자, 당황한 표정의 그녀가 보였다.
“왜,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나?”
“그, 그게요….”
린벨은 무슨 생각을 떠올리는지 표정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알렌은 그녀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 내 자리에 누워 있던 건 괜찮다. 나도 피곤했으니.”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알렌은 굳은 몸을 풀며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말을 했다.
“그, 저기, 그런데….”
“새벽녘에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금 있다가 서문으로 같이 가자꾸나.”
그녀가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자. 그녀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우선 준비나 하거라.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곧바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예, 옙!”
* * *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알렌 공자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뒤편에서 검붉은 머리칼이 찰랑대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프란시스카 양.”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잠자리는 평안하셨나요. 알렌 공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여전히 부지런하시네요.”
“과찬입니다. 어제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네, 덕분에 오랜만에 깊게 잠들 수 있었네요.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그의 뒤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린벨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 짧은 비명을 질렀다.
“흐익…!”
“저 꼬마는…?”
알렌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어제 도시를 돌아다니다 구해 준 아이입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데리고 있었습니다.”
“흐응. 그런가요?”
“예.”
그녀는 무언가 탐색하듯 린벨을 몇 번 확인하더니,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자 이내 활짝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었군요. 어젯밤에 공자님이 어린 소녀를 데리고 왔다고 하기에 설마 싶었는데….”
알렌도 그녀와 발맞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린벨이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헛소리가 맞았네요.”
“하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만하지만… 저는 꼬맹이보다는 더 성숙한 쪽이 취향이라.”
알렌이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저도 그럴 거라….”
“…꼬맹이 아닌데. 흡!”
린벨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급히 입을 막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며 잘게 떨렸다.
그러나 말이 끊긴 프란시스카는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귀엽다는 듯 린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나… 애가 참 귀엽네요. 이름이?”
“…린벨 입니다.”
“내가 사과할게, 꼬마라 해서 미안하구나.”
“아,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인이 사과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리고는 급히 알렌 쪽으로 눈을 돌려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눈빛을 본 알렌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프란시스카 양, 저희는 급히 가야 할 일이 있어서….”
그녀가 잠시 멈칫했을 때, 린벨은 곧바로 알렌 뒤로 몸을 숨겼다.
프란시스카는 아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좋은 생각이 난 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요?”
“간단한 일입니다. 이 아이의 엄마가 도시 밖에 있다고 하기에, 찾아 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병사가 뇌물을 받는다느니, 몰래 들어왔다느니.
탁 트인 장소에서 공공연한 치부를 들춰 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아하- 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저도 같이 따라가도 될까요?”
“그건 무슨….”
꿍꿍이냐.
알렌은 튀어나오려던 뒷말은 삼켰다.
아까부터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었다.
방에서 복도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자칫하면 무례로 내비칠 수 있음에도 사생활을 넌지시 언급한다.
‘무슨 생각이지?’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히벨로 가는 중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마찬가지. 예언을 믿냐는 물음도 그랬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과 함께 그녀는 그가 알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알렌은 그녀가 저 웃는 가면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병사들은 오늘 새벽부터 어제 의논했던 내용인, 마을 주민을 대피시키는 일을 하느라 바쁠 테니 말이에요. 차라리 저를 데려간다면 찾기 수월할 거예요.”
알렌은 이득과 손해를 천천히 저울질했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을 도시로 이송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쓸모없는 짓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