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여인과 병사들이 소리치며 벌어지는 소란에 선술집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알렌은 그 사이에 섞여 그들을 지켜봤다.
‘지금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반항해봤자 좋은 꼴을 못 볼 텐데.’
“당신들은 돈을 그렇게 받아 처먹어 놓고, 지금 뭐 하는….”
“아니, 좀 닥쳐!”
“할 말 없으면 닥치래. 하. 아까도 다 봤어. 돈도 안 내고 밥 먹고, 누가 물건을 훔쳐 갔다고 해도 무시하고! 진짜 양심이 남아 있으면 지금 당장…!”
“이런 망할 년이….”
과연, 알렌의 예상이 맞았다. 병사들은 그녀의 모욕을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구경하던 병사들도 일어서자 그녀의 안색이 겁에 질린 듯 새파랗게 변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내 입을 닫지 않았다.
“당신들이 약속을 안 지키니까 그런 거 아냐! 어, 엄마가 밖에 있다고! 데려와! 당장 데리고 오라고!”
오히려 두려움에 악을 쓰며 소리친다.
그러나 병사들 중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조장 옆에 있던 병사가 슬쩍 주위를 살피더니 속삭였다.
“조장님, 저대로 놔두다가 윗분들 귀에 들어가면….”
“알아.”
조장은 언짢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소란에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돈도 충분히 다 챙겼지 않습니까. 새로 귀족 공자님도 오셨다는데, 이제 슬슬 철수하는 게….”
조장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 더 남겨 먹었다가는 덜미라도 잡히면 끝이었다.
뒤를 봐주던 경비대장에게 찔러 주는 돈도 점점 커져서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슬슬 끝낼 때가 되기는 했지.
“그럼, 확실하게 처리해. 뒷정리는 늘 하던 대로 알지?”
“예, 알겠습니다.”
대화를 끝마친 그가 주위 병사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걸음을 멈춘 행인들을 쫓아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퇴로를 막았다.
“뭐, 뭐야! 지금 뭘 하려고, 당장 처먹은 돈값이나 하란 말이….”
뒤를 막았던 병사가 눈짓했다.
-끄덕
그 신호에 앞에 있던 병사가 움직였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이, 이거 놔!”
그녀는 병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저항했으나, 다음에 내뱉은 말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엄마를 데려오라고?”
움찔-
그녀의 몸이 떨렸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앙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그래. 전 재산을 다 가져가 놓고, 왜 엄마는 밖에 놔두는 건데!”
“그래, 그래 다 좋은데.”
병사의 손이 그녀의 손을 따라 어깨까지 올라갔다.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대가가 살짝 부족한 것 같은데 말이야. 네가 조금만 협조해 준다면 충분할 것 같기도 한데….”
거기까지 지켜보던 알렌은 움직였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그만.”
차가운 목소리가 선술집의 내부를 울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향했다.
알렌은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호위하고 있는 병력을 조금만 움직여도 해결되는데, 굳이 직접 나설 이유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저 여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를 뒤덮은 오물 사이에서도 특징적인 흑발과 자색 눈동자. 거기에 기억에 있던 입술을 악다물고 노려보는 귀기 어린 얼굴이 합쳐지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잖아.’
지금껏 그가 고민하게 만들었던 존재.
회귀 전 율리우스와 다투느라 병사를 늦게 보낸 탓에 어미를 잃은 소녀.
복수를 위해 율리우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몬스터를 학살한 기사.
과거와 다르게 흘러간다면,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는 일 없이 평온한 미래를 가지게 될 여인.
그녀란 걸 확인하자, 알렌은 생각할 새도 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뚜벅뚜벅
나무 바닥 위로 뚜렷한 발걸음 소리가 선술집 내부를 울렸다.
“당신 누구쇼? 아니 시벌, 뭔 놈의 날에….”
자기 마음대로 지껄이던 병사는 율리우스의 고급스러운 복장과 그의 뒤에 서 있는 호위병의 존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 나리. 보니까 어디 나들이라도 왔다가 끼어들었나 본데. 모두 감옥에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신경 끄쇼.”
알렌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의 인장을 봤을 텐데? 설마, 남작의 뒷배를 믿는 건가? 아니면 백작가의 문양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누군지 아직 모르겠나?”
“나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가십쇼. 지금 전시 상황인 거 모르십니까? 남은 체면 다 구겨지기 전….”
그때 뒤에서 구경하던 병사 한 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곧바로 조장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조장님! 씁… 우리 다 엿 된 것 같습니다. 저분, 저 문양 오늘 지원 오셨다는 그 귀족 공자님 아닙니까?
-뭐라고?
만약을 대비해 감지력을 활성화시켜 두고 있던 그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엿들을 수 있었다.
조장은 감흥 없는 얼굴로 상황을 바라보다 곧장 눈을 크게 뜨고는, 곧바로 알렌의 몸에 박힌 백작가 문양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막말을 지껄이던 병사의 입을 막았다.
“…에 꺼지십…웁웁.”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놈이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라…. 이런 모욕을 듣고서?”
조장에 의해 억지로 입이 막혀 있던 그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되자 순한 양처럼 조용해졌다.
알렌도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 남작 놈은 변했어도 밑에 놈들은 변함없구나.’
알렌은 기억하던 것과 달리 변한 것은 남작뿐이라는 사실에 안도감과 가문의 위치를 말해 주는 것 같은 놈들의 반응에 모멸감을 느꼈다.
아무리 백작가에서 직접 다스리는 도시가 아니라지만, 백작령에 속한 영주민이 백작가의 문양을 못 알아본다고?
“그래, 자비라. 자비 좋지.”
알렌이 명백히 실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조장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솔직히 적당한 상인의 자식이라 생각했기에 부하의 행동을 관망하고 있었는데.
‘잘못하면 목이 잘린다.’
차라리 부유한 상인의 자식이라면 무마하기 쉬웠을 텐데. 괜히 잘못 건드려서는. 괜히 부하 놈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너는 어떠냐.”
알렌은 옆에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물었다.
“네, 네?”
“너 때문에 내가 나선 게 아니냐. 그러니 너에게 묻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물음에 당황한 듯 어버버- 거리다 그가 한 번 더 묻자, 병사들을 노려봤다.
“저는…. 마음 같아서는 하반신을 다 뽑아 버리고 싶지만….”
그녀의 대답에 병사들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그만둘게요. 아니, 그만두겠습니다. 기분은 나쁘지만, 아직, 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않았습니다?”
그녀의 기묘한 어투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그녀에게 말을 했다.
“존댓말이 힘들다면, 편히 말해도 된다.”
“그건….”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보내자, 한숨을 내쉰 알렌은 빠르게 재촉했다.
“어서.”
“으…. 그, 그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저는 괜찮아요.”
그녀의 대답에 병사들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알렌은 그저 끝낼 생각이 없었다.
“하나.”
“예?”
“눈 한쪽과 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아니, 말이 다르잖….”
“하.”
알렌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놈들은 귀족을, 그것도 장차 이 땅의 주인이 될 이에게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
“내가 언제 그녀의 말대로 따르겠다고 했지. 단지 의견을 물었을 뿐이다.”
“그, 그건 너무 불합리….”
“너는.”
심장 어림의 고리가 웅웅 진동하며, 무형의 기세가 부풀어 올랐다. 알렌이 한 발자국씩 다가가자 거대한 압박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마치 커다란 무게로 누르는 것 같이.
“나를 모욕했단 말의 의미를 모르는군.”
웃음이 나온다.
이게 지금의 백작가의 현실인가. 영지민이 땅의 주인을 못 알아보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귀족이었다면 너는 목이 잘렸을 것이다. 내가 자비롭기에 선택할 기회를 주는 거지. 그러니 선택하거라. 눈과 혀 어느 쪽을 택하겠나?”
-스릉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의미는 간단했다.
목숨을 바치겠느냐, 둘 중 하나를 내버리겠느냐.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군기와 기세에 술에 취한 병사들은 대응할 수조차 없었고.
“끄아아아악!”
“내, 내 눈이…!”
“으아아아아!”
선술집에서는 잠시 동안 끔찍한 비명이 늦은 저녁을 울렸다.
* * *
그의 눈앞에는 기억하던 모습과 살짝 다른 모습을 한 그녀가 있었다.
말투, 행동, 표정 그 모든 게 다른 그녀.
알렌은 그 변화가 조금은 달가웠다.
미래는 아직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았으니.
“그…. 공자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래.”
알렌이 대답하자,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왜 그러지?”
보다 못한 알렌이 묻자, 그녀는 귀족의 앞이라 긴장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저기…. 무슨 일로 저를 데려온 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옷깃을 동여맸다.
그 모습을 본 알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맹랑한 녀석.
아까 선술집을 들렀을 때가 초저녁이었으니, 지금은 밤중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 늦은 시간에 방에 단둘이 있으니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너를 취할 생각은 없으니, 긴장 풀 거라.”
“…헤헤, 역시. 그렇죠?”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깨끗하게 씻겨 놓으니 둥근 자색 눈과 등허리까지 내려온 흑발, 그리고 오물로 가려졌던 새하얀 피부가 달빛에 반짝였다.
‘역시 맞았구나.’
알렌은 그녀가 맞다는 사실에, 기쁨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왜 그녀가 그런 봉변을 당하고 있던 걸까. 회귀 전에도 같은 사건이 있었나? 아니면 나비 효과?
그녀가 씻는 동안 검은 책을 살피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따로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리고 병사들과 대화 도중에 들었던 그녀의 모친에 관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녀가 알렌이 기억하는 그 모습으로 변했던 이유는, 그녀의 모친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나.
모친의 죽음.
그것이 그녀를 바뀌게 만들었으니.
그렇게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하기를 잠시, 문득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은?”
“히,힉! 저, 몸 엄청 별로예요. 그러니 덮치지 말…. 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맹랑한 꼬마 같으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지?”
“그, 그게….”
“나는 연상이 취향이라서, 너 같은 꼬마는….”
알렌은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작게 하악질을 해대며 몸을 움츠렸다.
“내가 바라는 이상형에 맞지 않는구나.”
의도적으로 몸을 뒤로 빼 놓자, 그녀는 조금은 안심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작게 항변했다.
“…린벨, 꼬마는 아니에요. 저도 이제 열다섯인데….”
“그래, 꼬마 숙녀겠지.”
알렌이 대충 동의하듯 답하자, 그녀가 토라진 듯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정작 본인은 눈치 못 챈 것 같았지만.
“그래서 린벨. 네가….”
그녀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것처럼 보이자, 알렌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랑 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뭐지?”
“그게….”
그녀는 긴장한 듯 몸을 떨더니 입을 열었다 닫으며 망설였다.
“얼핏 듣기로는 너의 모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알렌이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다독이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말하는 동안 손을 꼼지락거렸다.
“…병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약속?”
“네.”
알렌이 계속해 보라는 듯 기다리자,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사연을 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