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레이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른 하녀의 눈을 피해, 4층에 위치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레이나입니다.”
“들어오거라.”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 가이엘은 그녀의 목소리에 곧바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정기 보고 시간은 이미 지났을 텐데.”
그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급히 보고할 사항이 있어, 부득이하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더욱 짙어지자, 레이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알렌 공자님께서 율리우스 도련님께 사과하셨다고 합니다.”
“알렌 그 아이가? 자기가 뱉은 말에 사과했다고?”
한껏 놀란 표정을 짓던 그의 뇌리에 불과 며칠 전 알렌과 벌였던 논쟁이 떠올랐다.
“율리우스 도련님을 안심시켰지만, 평소 알렌 공자님의 행실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기에…. 율리우스 도련님 같은 경우일 수도 있다 싶어서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렇다면 인원을 추가시켜 감시를….”
“아니.”
“예?”
“그만두지.”
그녀의 어조가 의아함에 물들었으나, 가이엘은 명령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고요히 가라앉아있던 그 눈을. 그런 첫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그럼, 제 행동에도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명했다.
“그 아이가 하는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말게.”
“하지만 그건….”
“이미 많은 상처를 줬네. 그리고, 어차피 앞으로의 대업에는 영향이 없지 않나?”
그의 말에 잠시 침음을 흘리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카샤 님께 보고할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건 마음대로 하게.”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처음 왔을 때와 같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집무실 안, 가이엘은 조용히 읊조렸다.
“아들아.”
이 정도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그러니….
“…내 선택이 틀렸으면 좋겠구나.”
담담히 말을 내뱉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 * *
알렌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회귀 후 얻은 검은 책.
알렌은 책의 내용의 토대로 율리우스가 도시 안에서 ‘우연히’ 얻었을 영약을 미리 가로챘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배 속으로 들어간 영약에 감응된 마력이 그의 몸을 부셔 버리겠다는 듯 들끓고 있었다.
‘놈을 어떻게 할지는 구상을 마쳤다.’
지금은 그 준비의 일환일 뿐.
아직 너무나 멀리 있어 거기까지 닿을 수 있을지 불명확했으나 알렌은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우….”
마법사로 몇 십 년째 습관이 된 아침 명상은, 과거로 돌아온 후로도 행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명상은 명백히 평소의 그것과 달랐다.
점점 정신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내면으로 빨려 들어간 정신은, 새까만 어둠 사이에서 단 하나만을 보았다.
심장의 고리.
완벽한 원의 형태를 따라 한 동그란 고리를.
마법사는 심장의 고리를 서클이라 부르며, 그 고리의 개수에 따라 위계가 늘어난다.
‘따라서 하나의 고리밖에 없는 지금의 나는 1위계에 불과하지만….’
글쎄, 다른 마법 체계라면 어떨까.
우우웅-
심장 어림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고리에서 퍼져 나간 강력한 인력에 신체를 순화하던 마력이 강제로 심장으로 끌려왔다.
평범한 마법사와는 명백히 다른 움직임.
‘1위계에서 2위계, 2위계에서 3위계, 4위계, 5위계….’
시간은 유한하다. 언제 위계를 끌어 올리지? 상대는 그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던가?
나는, 놈을,
김우진을.
‘죽일 수 있나?’
바깥에서 끌어 당겨진 마나는 전신이 아닌 심장에 뭉쳐 거대한 원의 고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신체를 순활하던 마력이 역류하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정도는.”
상정 범위 내였다.
작금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서클 마법 체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과거에는 수많은 방법을, 천재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시도하며 연구했다.
하나의 체계가 처음부터 영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는 계속해서 발전한다.
서클 마법 체계는 정립되고 고안된 수천 가지의 방법 중, 부작용이 없으면서 안정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체계였기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다른 방법이 사용되었고, 미래에는 새로운 체계가 정립되겠지.
하지만…. 과거에 만들어진, 실패한 모든 마법 체계가 쓸모가 없을까?
그렇게 묻는다면, 당연히.
“쓸모가 있다.”
실패한 것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는 건 각자의 몫이니.
우우웅-
고리가 지속적으로 진동했다.
신체 내에서 끌어 당겨진 마력은 흩어지지 않고 심장에 뭉쳐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녘부터 시작했던 의식은,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그의 얼굴을 드리울 때가 되어서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후읍…. 후.”
이제 기본 준비는 끝났다.
하인이 새벽에 떠온 대야로 세안을 마치자, 매끄러운 재질의 거울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곱슬거리는 청발과 단정한 외모, 조금 차가운 인상의 청년이 그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17살.
청년이라기에는 어렸고, 소년이라 하기에는 늙은 나이.
그 경계에 걸친 모습에 괜스레 손끝으로 얼굴을 만진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주름이 져 가던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고, 초조함에 물들였던 눈도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젊어진 건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되는구나.”
회귀 전의 그도 늙었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어려진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처음에 그가 그 괴리감의 차이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거울을 보고 놀랐을 때를 떠올리기를 잠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도련님. 가주님께서 기다리시니 출발하시지요.”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거의 다 끝났으니.”
“예, 알겠습니다.”
알렌은 미리 준비된 옷으로 천천히 갈아입었다.
시녀가 있었다면 그가 준비하는 것을 도왔겠지만 그를 도와줄 시녀는 없었다.
3대 전부터 망하기 시작한 백작가.
작위를 유지하는 것도 간당간당한 시점이다.
그런 곳에 어떤 영애가 기회를 잡기 위해 시녀로 들어오려 할까, 아니 고가의 노예라도 산다면 전용 시녀로 들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럴 돈이 있으면, 영지 내정에 사용하겠지.’
아무 평민이나 데려와 시녀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귀족은 드물었다.
시녀의 격이 그 주인의 품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적어도 회귀하기 전의 알렌은, 일반적인 귀족의 시선으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녀를 뽑아 주겠다는 어머니의 권유도 거절했다.
이런 상황일진데, 율리우스는.
“…가족들은 이미 도착했나?”
놈은, 언제가 되어서야 형도 가지지 못한 시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낄까.
“예,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서두르지.”
“예, 안내하겠습니다.”
고급진 장식이 달린 의류보다 실용성과 단정함을 중시한 옷으로 갈아입은 알렌은 피식 웃으며 하녀의 안내를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 * *
식당에는 이미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니 어서 앉거라, 알렌.”
알렌이 작게 고개를 숙이자, 아버지는 그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 번 째려보더니 웃으며 답했다.
율리우스는 어제 무엇을 했는지 살짝 졸려 보였다.
“예, 어머니.”
알렌이 자리에 앉자, 백작가의 아침이라고는 조금 단출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의 분위기는 괜찮았다.
망나니 동생은 보란 듯이 바뀌어 가는 중이었고, 그 형은 동생과 다투는 듯하다가 먼저 고개를 숙였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이 없었다.
알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아침이 우스웠다.
그렇게 조용한 식사가 진행되는 중에 어머니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율리우스, 그냥 편하게 먹어도 된단다.”
어머니는 자애로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네? 아, 아닙니다. 저도 귀족인데 식사 예절 하나 못 지켜서야 되겠습니까.”
“머리를 다치고 한 달도 되지 않았잖니. 한동안은 그냥 편하게 먹어도 된단다.”
놈은 조금 전까지 힘겹게 식사 예절을 지키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당황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꾸 권하자, 그도 귀족의 예법은 힘들었는지 눈치를 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익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렴.”
어머니는 기쁘다는 듯 웃었고, 아버지는 상관없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알렌은 내심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참견하지 않았다.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었다.
영지와 관련된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며, 저택 내의 대소사는 어머니가 맡으셨다.
부족한 재정으로도 현명하게 일을 해결하던 어머니가.
정말로.
‘놈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셨을까.’
전부터 의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사치에 빠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철저한 교육을 받으셨을 분이.
그깟 재화에 혹해, 가족을 내팽개칠 분이었나?
‘…거리의 빈민처럼 향락에 빠지실 분이었다고? 그럴 리가.’
그렇게 조용히 생각을 이어나가며 식사를 다 끝마칠 때쯤, 지금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버지가 두 명의 이름을 불렀다.
“알렌, 율리우스.”
“예, 아버지.”
“웁, 네. 아버지.”
율리우스가 급하기 음식을 삼키고 대답했다.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이었으나 가이엘은 그저 담담히 그들에게 고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 오찬을 하기 전까지 찾아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사라졌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답답한지 한마디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마 너희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떠나가자 남은 것은 알렌과 율리우스였다.
“…형님은 아버지가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율리우스는 알렌과 둘만 있는 게 어색한지 먼저 그에게 물음을 건넸다.
그래도 전과는 달리 그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유의미한 변화에 알렌은 웃음을 삼켰다.
“글쎄, 아마 영지 순찰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영지 순찰…. 말씀이십니까.”
“그래, 영지 순찰. 아버지께서도 근처에 도는 소문에 대외적으로 확신을 심어 주고 싶은 거겠지.”
놈은 그의 대답에 의아한 듯 의문을 띄었으나, 알렌이 손가락으로 자신과 그를 가리키자 이내 알아들은 듯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러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먼저 일어나겠다.”
“예, 나중에 뵙지요.”
알렌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식당을 나서며 누구도 들리지 않게끔 작게 중얼거렸다.
“순찰이라….”
웃기는 소리.
알렌은 냉소를 지었다.
이제 곧이구나. 놈의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던 순간이.
아버지가 시험이란 명목으로 그에게 사건을 맡길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기점으로 점차 날아오르기 시작할 테지.
‘지금 그를 방해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시간만 조금 늦추고 말 뿐.’
그것도 놈의 세계가 도와주는 듯한 기이한 행운과 특별한 능력이라면 조만간 이름이 알려지는 건 막을 수 없다.
‘그러니…. 방해하는 건 의미가 없다.’
자신도 인간인지라 사건의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놈의 행적이 서술된 검은 책 덕에 시간에 맞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알렌은 죽기 직전,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의 속도로 움직인 그를 떠올리고는 안색을 굳혔다.
강해져야 했고, 따라잡아야 한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오늘을 대비하며 계획을 생각해 둔 지 오래였다.
남은 건 움직일 명분, 그것만 있다면 충분하다.
그의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