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304)
청천벽력처럼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정호준의 선전포고에 회의장은 얼어붙었다. 냉각된 분위기를 그 누구보다 확연하게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정호준은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더, 저는 하이스트 반도체가 비메모리 분야나 자동차 반도체 분야에서도 점유율을 높여 가길 희망합니다.”
정호준은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 증가, 비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파운드리의 비중을 넓히면서 비메모리 반도체 중에서도 가장 비전 있다고 판단한 로직 반도체의 경쟁력 강화, 그리고 자동차 반도체 업계 Top 3를 비전으로 내걸었다.
정호준은 앞으로 하이스트 반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읊었다.
“자동차 반도체가 회사에 남는 것도 많지 않고, 메모리 반도체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과 비교해 시장의 규모가 작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장이 작다고 앞으로도 작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기술을 계속 발전해 나갈 거고, 자동차에 요구하는 성능은 점점 늘어 갈 겁니다. 그럼 자연스레 자동차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차량이 늘겠죠?”
기업은 돈을 벌려는 목적하에 만들어진 집단이다. 여기서 돈을 번다는 건 당장 돈을 버는 것 외에도 많은 요소가 포함된 표현이다. 한 시장의 점유율을 유지 및 개선하기 위한 전략을 짜기 전에 앞으로도 꾸준한 수요가 있을지에 대한 계산이 전제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말이다. 자동차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과 비교해 시장의 규모가 작았고, 시장의 성장세 또한 두 시장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게다가 수익성 면에서도 높은 생산비 때문에 수익성 또한 다른 반도체와 비교해 조금 처지는 편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세상에 돈 안 되는 곳에 자금을 투자할 기업은 없다. 반도체 사업이라는 사업 특성상 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데도 큰돈이 필요해 진입장벽이 높았다.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적었기에, 터줏대감처럼 자동차 반도체 시장의 점유율 태반을 집어삼킨 몇몇 대기업들조차도 기술 발전에는 돈을 투자해도 생산 설비 증설에는 크게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현재 시설만 가지고도 충분히 생산하고도 남는데, 굳이 큰돈을 들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돈도 안 되는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동차가 요구하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 자동차 반도체의 수요가 증가하긴 했지만 그래도 3교대, 4교대로 공장을 쉬지 않고 돌리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큰돈을 써야 하는 공장 증설을 컨펌하지 않았다.
우연히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인재(人災)는 대개 무리를 하다 문뜩 찾아오는 법. 자동차 반도체뿐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나 비메모리 반도체 회사에서도 기계가 쉬는 텀을 줄여 가며 무리하게 공장을 돌린 여파로 종종 화재가 발생하곤 했다.
자동차 반도체 업계 같은 경우 2021년 일본의 반도체 업체 ‘르네사스 에밀레’에서 화재가 터진 게 가뜩이나 공급이 부족해 불맨 소리가 가득했던 현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물량이 없어 정호준이 죽기 직전에도 차를 구매하면 최소 4개월은 기다려야 인도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그 텀을 더하리라.
‘뭐,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나 죽고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을 거 같은데?’
“자동차 반도체에서 비롯되는 적자는 JHJ Capital의 돈을 가져다 쓰더라도 메꿀 테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돈을 내 주머니에서 빼서라도 메꿀 테니 회사가 망할 일은 없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을 끝으로 정호준은 연설을 마쳤다.
* * *
정호준이 청주까지 내려가 과장급 이상의 임직원들에게 경고 겸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미래 자동차와 지아 자동차에는 비상이 걸렸다.
“잘 쉬고 있는데, 왜 갑자기 출근하라 그런 거지?”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고 비상 떴으니 출근하라는 말에, 경영전략팀 막내 윤일섭은 속으로 불평을 해 대며 황급히 회사로 들어갔다.
집이 멀고, 학자금 대출과 부모님이 집을 살 때 졌던 대출을 갚는 데 돈을 조금 보태느라 따로 차를 구매할 여력이 없었던 윤일섭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바람에 회의실에 가장 늦게 도착했다.
“JHJ Capital이 주주총회를 소집했어. 이유가 뭔지 아는 사람 있어?!”
회의 중이었는지, 모두를 모아 놓고 박의선 부회장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박의선이 길길이 날뛰는 게 이해 못 할 일도 아닌 게, 정호준은 미래 자동차와 지아 차동차의 지분 30%를 가진 대주주였다. 정호준이 가진 30%의 지분이 갖는 힘은 국민연금하고 박몽구 회장 일가의 지분을 합쳐야 겨우 정호준의 지분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다른 백기사들의 도움까지 계산하면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묻겠지만, 이건 모르는 소리다.
미래에게 도와줄 백기사들이 있듯 JHJ Capital에게도 손을 빌려줄 사람들은 존재했다. 한국에 자금을 투자한 외국자본들은 JHJ가 돈 버는 일이라고 설득하면 금방 넘어가서 도와주리라.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JHJ Capital과 접점을 만들고 싶어 안달 난 외국계 자본들은 JHJ Capital에게 빚을 지워 둘 수 있다며 발 벗고 나설 거다.
‘원래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인 건가? 아니면 갑자기 욕심을 낸 건가. 대체 뭐지?’
주식을 매입한 후로 4년 넘게 잠잠하게 배당금만 받아먹던 JHJ Capital이 대체 왜 갑자기 행동을 시작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박의선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JHJ Capital로부터 별개로 투자받아 새로 설립한 수소차 합작회사는 JHJ Capital에서 파견한 감사 때문에 깔끔하게 운영 중이었기에 정말 왜 그러는지 알고 싶을 지경이었다.
경영권에 대한 위협 말고 별다른 내용을 생각하지 못한 윗물들과 달리 늦게 와서 눈치만 보고 있던 경영전략팀 막내 윤일섭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SNS를 통해 하이스트 반도체 다니는 친구에게서 전해 들은 소문인데, 하이스트 반도체 직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정호준 회장이 자동차 반도체 사업에 키우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미래 자동차나 지아 자동차가 하이스트 반도체가 생산하는 자동차 반도체를 사용하길 바라는 건 아닐까요?”
처음으로 나온 근거도 있고 나름 참신한 의견에 갈구다 말고 ‘오!’ 하는 시선을 보냈다. 다만 나름의 추론으로 윤일섭의 의견을 반박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정호준 대표는 나나 아버지와도 인연을 텄거든요. 그런 부탁은 주주총회가 아닌 따로 사적으로 만나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대주주라는 명분으로 압박하면 한 번 이상은 더 고민해 볼 테니까요.”
아무리 JHJ Capital의 뒤에 줄을 서고 싶다 해도 외국계 자금은 돈 앞에 냉정한 집단이다. 이제 막 자동차 반도체 업계에 뛰어든 회사의 물건을 사다 썼다가 탈이라도 나면 미래 자동차나 지아 자동차에 투자한 돈이 위험해진다.
JHJ Capital의 모태는 냉혹한 금융 자본. 자기 때문에 입은 손해일지라도 JHJ Capital이 보살펴 줄 리는 만무했고, 외국계 투자자들 중에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어리석은 이는 없었다.
“그렇군요. 괜히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래도 접근은 좋았어요. 이름이 뭐라고 했죠?”
“윤일섭, 대리 윤.일.섭입니다!”
관등성명을 대는 윤일섭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윤일섭 대리. 머릿속에 기억해 두겠습니다.”
공격적인 반응이 조금 죽었다 생각한 전략팀 직원들은 하나둘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며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 * *
세상일이란 건 모두 주고받는 거다. 군부대를 대여받고 국빈급 환대를 받은 만큼 정호준도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청와대의 초대를 받아들여 날을 잡고 청와대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정호준이 있을 거라고 예상 못 한 한 명이 좌석에 앉아 있었다.
정호준이 청와대와 트리오플 소속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호준을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 박정혜예요.”
8월 12일 예정된 경선이 개최되기 전이라 아직 대선 후보가 아닌 여당의 경선 후보에 불과하지만 박정혜의 승리는 이미 옛날 옛적에 정해진 상태였고, 대한민국 국민 중 그 누구도 박정혜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대선 후보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김명호가 힘을 빌려준 느낌이다.
‘워낙 적이 많은 양반이니까.’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되면 망설이지 않고 공격했던 인간이다. 전임 대통령도 공격한 양반이잖나? 국민이 원해서 독재 때문에 법정에 선 ‘전’ 씨나 ‘노’ 씨를 예외로 빼면 대한민국에서 전임 대통령을 공격하는 건 김명호가 스타트를 끊은 셈이다.
정호준이 일으킨 변화들 때문에 이번 생에는 노민현 대통령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 숨쉬지만 그렇다고 야당 출신 대통령을 공격한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대통령이 된 후까지 박정혜와도 여러 번 다퉈 왔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예 적보단 박정혜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박정혜 의원님께서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네요.”
잠깐 당황했지만 김명호와 단둘이 만찬을 먹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로 이동했다.
[대통령, 대통령이 될 사람, 그리고 세계 최고 부자가 함께한 만찬!]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존재 자체가 특별해진 탓에 미리 불러 둔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며 여당의 대선 홍보에 이용되었다.
* * *
정호준이 소집한 미래‧지아 자동차 주주총회를 사흘 앞둔 날, 정호준은 에이든 무어 단장의 연락을 받았다.
“대표님, 바이에른 뮌헨과 유벤투스, 인터 밀란, AC밀란, 레알 마드리드 FC가 즐라탄에게 오퍼를 넣었고, 최종적으로 인터 밀란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기사로 나가기 전에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경우 있는 에이든 무어의 일 처리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중요한 사항을 물었다.
“인테르라.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나면 꽤 무서운 팀이 되겠네요. 그나저나 이적료는요?”
“최종 합의된 금액은 1억 유로입니다.”
“최고 이적료를 갱신했네요.”
1억 유로. 파운드화로 환산하면 8,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이적료였다. 1억 유로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선수 몸값에 거품이 꼈다 어쨌다 하면서도 2016년 유벤투스 소속의 존 포그바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그랬는데, 1억 유로가 너무 일찍 깨져 버렸다.
“1억 유로 정도면 그래도 즐라탄을 판 것에 크게 논란이 일 것 같진 않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루카스 수아레즈가 남아 있으니까요.”
목소리만 들어도 다행이란 기색이 역력했다.
‘나 때문에 선수 몸값 거품이 더 심하게 일겠네.’
뭐 그렇다 할지라도 새싹일 때 데려오면 큰 이적료를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정호준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음을 논했다.
“수아레즈의 부담이 조금 심하긴 하겠네요. 첼시의 스터리지와 접촉해 보죠. 이적료로 3,000만 파운드까지는 사용해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이적 관련해서 오피셜이 뜰 겁니다.”
[깨져 버린 1억 유로, 즐라탄 인터 밀란의 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