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300)
시계 태엽을 조금 뒤로 감아 2012년 4월 20일, 청담동의 한 한식집에서 거물들의 회동이 있었다.
본인이 아쉬운 형편이어서일까? 진보당 측 경선 후보로 나올 거란 소문이 자자한 민재민이 가장 먼저 식당에 도착해 손님들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보다 15분은 이른 도착이었다.
민재민이 음식점에 도착하고 10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안티바이러스와 컴퓨터 보안과 관련한 회사‘KimLab’를 경영 중인 김철수가 모습을 드러냈고, 약속 시각을 2분 남겨 놓고 강현태가 도착했다.
“이거 제가 제일 마지막인가요? 큰일 하시는 분들과 약속 잡아놓고 늦게 오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민재민과 김철수가 있는 것을 확인한 강현태는 너스레를 떨며 들어와 악수를 청했다.
“공무가 바쁘신 걸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늦으신 게 아니니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쉬운 게 많은 민재민은 정말 저자세 그 자체였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장님.”
민재민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아쉬운 게 적은 김철수는 덤덤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사적인 이야기가 오가며 식사가 시작되었고, 술이 한잔 두잔 오가면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본격적인 대화의 포문을 연 건 원하는 게 많은 민재민이었다.
“강현태 서울시장님, 그리고 김철수 대표님.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정치란 더불어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두 분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셔서 큰 문제 없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가셨지만 언제까지 홀로 다 감당하며 해낼까요? 조심스럽지만 비바람을 피할 터전을 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호준의 1회차 삶에서 무소속 출신으로 입후보해 서울시장의 권좌에 앉은 정선준 인권변호사는 진보당의 러브콜을 받고 2012년 2월 진보당에 입당한다. 입당하는 과정에서 바깥에 알릴 수 없는 정치적 약속을 받았겠지만 그거야 당연한 거였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운동권과 가까워 보수보단 진보 쪽에 기울어진 인사이긴 하나, 어쨌든 무소속인 서울시장을 당으로 영입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변화를 촉구하고 주도하고자 노력하는 우리 진보 진영이 김철수 대표님과 강현태 시장님이 활동하시기 더 편할 겁니다.”
급진적인 변화보단 천천히 안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 진영에서 정치 경력이 전무한 문외한을 받아들일 리 없다. 민재민은 그렇게 판단했다.
민재민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강현태와 마찬가지로 국민적인 인기를 끈 김철수쯤 되면 보수 측에서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애쓸 것 같지만, 자리를 내준다는 건 지금껏 자리를 지켜왔던 누군가가 자리를 잃는 것을 뜻했다. 김명호의 대선 승리 후 총선까지 보수 진영의 압승으로 끝나 아쉬울 게이 없는 보수 진영은 김철수의 영입을 위해 그의 구미가 당길 만한 양보를 제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보수 진영의 움직임 속에는 박정혜 의원의 입김도 들어가 있었다.
‘두 번 빼앗길 순 없지.’
이미 김명호라는 거물을 대선 후보로 받아들여 경선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는 박정혜는 변수를 원치 않았다. 대선보다 경선이 더 어려워지는 경험을 또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김철수는 영입하지 않도록 당심을 부추겼지만, 경선에서 자신의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없는 강현태 서울시장에게는 그녀도 배척하기보단 러브콜을 보냈다.
시민 단체에 돈을 퍼주지 않고, 이세현 서울시장이 벌여 놓은 사업들은 이어 갈 건 이어 가고 정리할 건 정리하며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 모습은 보수 진영으로 끌어들인다고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양보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그 양보가 강현태에게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진보도 보수도 선택하지 않고 무소속을 유지 중이었다.
진보 진영도 고일 대로 고여, 진영 논리와 달리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진 않고, 자기 자리 챙기기에 급급한 상태지만. 대선에서 승리하고, 의석수가 한참 뒤떨어진 현재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면 뒤집을 방법이 필요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기 있는 누군가를 끌어다 당에 입당시키는 것. 즉 김철수와 강현태를 영입하는 거였다.
‘그리고 되도록 그 일은 내 선에서 처리가 돼야 해.’
민재민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 * *
광우병 소고기 사태로 떨어진 지지율에 대한 보복 겸 4대강 정비 사업에 방해하는 이들을 잘라내고자 김명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수사라는 카드를 꺼냈다.
평소 노민현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검찰은 노민현에 대해 강도 높은 수사를 감행했다. 탈탈 털었다는 말이 아깝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민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공소권 없음’이란 판결로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노민현 전 대통령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살 직전까지 별다른 먼지가 나오지 않던 노민현과 달리 노민현의 가족들에게는 먼지가 있었다.
검찰의 계속된 수사에 지친 건지, 그도 아니면 자신을 표적 삼아 시작된 수사로 가족과 자신의 사람이 다치는 것을 보다 못해 자살을 감행한 건지는 자살을 감행한 당사자만이 알겠지만, 중요한 건 1회차 때와 달리 현재 노민현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삶을 이어 가고 있다는 거다.
한국에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정호준에 의해 4대강 모두를 정비하는 건 예산 낭비임이 까발려진 김명호 정부는 전임 대통령 수사 지속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노민현 전 대통령에 관한 수사를 중지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미래가 변한 거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모두에게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냉정해 보이긴 하나 이러한 변화는 민재민의 정치 인생을 회귀 전만 못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죽은 사람이 저질렀던 부정에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몰아간 보수 진영과 검찰에 대한 반감이 진보 진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노민현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무기 삼아 인지도와 정치적으로 큰 수혜를 누렸을 민재민은 노민현의 생존으로 인해 회귀 전과 비교해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1회차 때와 똑같이 노민현의 후계자란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죽은 자의 뜻을 계승한다는 1회차 때만큼의 대의, 공감, 분노를 끌어내지 못했다. 보수 지지자들에게 민재민은 ‘죽은 노민현의 뜻을 계승한 이’가 아닌, 그저 노민현 정부 시절 관료로 일하고 노민현이 공격받을 때 변호를 맡았던 정치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청와대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고, 노민현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아주 약빨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2012년 4월 12일 있었던 19대 총선에서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부산 사상구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9대 총선에서 ‘보수당 152석 : 진보당 127석’이라는 성적표를 받았을 회귀 전과 달리 ‘158석 : 120석’이라는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진보당은 마음이 급했고, 경선에 나가 대통령에 도전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민재민은 더 급했고 말이다.
강현태와 김철수가 진보 진영 쪽으로 오는 게 맞다는 의견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민재민 의원님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죠.”
민재민이 먼저 선수를 치며 제의를 건네긴 했지만 이후 진보당에서도 따로 제의가 올 것이라 판단한 강현태는 대답을 미뤘다.
“보좌관 편으로 구체적인 제안서를 보내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강현태는 대답을 미루며 김철수에게 따로 시간을 내주길 청했고, 민재민을 보내고 단둘이 2차를 나섰다.
“김철수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보수 진영에서 나를 원하지 않을 거라 돌려 말한 민재민 의원의 말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김철수의 지지자들은 김철수가 처음 정치판에 끼어들었을 때 민재민 대신 김철수가 대선에 나갔다면 김철수가 박정혜를 이길 수도 있었을 거라 말하곤 한다.
하지만 김철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대선에 나가 봐야 이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박정혁 전 대통령의 휘광을 업은 박정혜 의원이잖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박정혜의 부친인 박정혁에게 존경과 환상은 절대적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했다.
박정혁이 독재를 했다고 깎아내리고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를 위주로 발전시켰다고 깎아내리는 운동권에서조차 박정혁이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키고, 더 멀리 뛸 수 있게 인프라를 구축한 점은 인정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보다 더 잘 살던 필리핀에도 박정혁과 마찬가지로 독재자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박정혁은 대한민국을 발전시켰고, 필리핀의 대통령은 그렇지 못했다.
독재자라고 깎아내리지만 적어도 박정혁은 능력 있는 독재자였다. 민주국가에서 말하기에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유능한 독재는 경우에 따라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박정혁 전 대통령이 보여 준 셈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박정혜가 박정혁처럼 한국을 위해 무언가 해 주기를 바랐다.
“역시 사람은 생각하는 게 비슷합니다. 김철수 의원님도 19대 대선을 노리는군요.”
강현태가 ‘의원님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김철수는 강현태가 19대 대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김철수는 확실히 하기 위해 질문했다.
“강현태 시장님께서도 다음 대선을 노리시는 겁니까?”
“예, 19대 대선에서 진보 진영 측 후보로 나가고자 합니다. 김철수 대표님과 선의의 경쟁을 하게 생겼네요.”
강현태가 자신과 비슷한 계획을 준비 중이라는 말에 김철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김철수를 이해하면서도 강현태는 김철수를 바라보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김철수 대표님. 저는 우리가 경쟁을 할 때 하더라도 우리끼리 했으면 합니다.”
“경선에서 누가 승리할지 모르지만, 경선 승리자가 다음 경선에 나오지 않도록 미리 약속을 받아 두자는 말로 들립니다.”
“예, 맞습니다. 우리가 진보 진영으로부터 뜨거운 구애를 받고 있다지만, 진보당에 입당한 뒤에도 똑같겠습니까?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심리는 다른 법입니다.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는 둘만의 약속이 아닌 국민 앞에 공언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선에서 패배할 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공언을 듣길 원한다는 강현태의 말에 김철수는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태 시장님은 참 무서운 분이십니다.”
“무섭긴요. 저야말로 김 대표님의 유능함이 두려운걸요.”
“협조하겠습니다.”
김철수의 확언에 강현태는 썩소를 지으며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그럼 공동의 목표를 이룰 때까지 우린 같은 배에 탄 동지가 되겠군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