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93)
미래를 보고 왔기에 넓고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정호준은 IT 분야에 정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투자자로 활동하며 IT산업에 대한 공부를 간간이 해서 그런지 대화가 통하긴 했다. 후딱후딱 바뀌는 화제도 대충이나마 따라갈 수 있었고 말이다.
수박 겉핥기로 공부한 수준이라지만 비전공자인 정호준이 이 정도로 대화에 잘 따라오는 것에 속으로 감탄했던 샘 앨리슨은 미국 금융가와 실리콘밸리에서 유명한 정호준의 식견을 시험해 보고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정 대표님은 IT산업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갈 것 같습니까?”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행동에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비서팀과 전략팀 직원들로부터 친분을 쌓아 둬야 한다고 귀가 아플 정도로 이야기를 들었던 정호준은 탐탁지 않다는 감정을 노출하지 않은 채 답했다.
“IT산업이 추구해야 할 종점은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상현실은 제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나왔으면 좋겠네요. 어릴 때 즐겨봤던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가상현실게임을 꼭 한번 즐겨 보고 싶거든요.”
비전을 가지고 기술력을 키워 창업을 한다는 건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인 경우가 많다. 냉철하고 세파에 찌든 미국 금융권 사람들과 달리 꿈을 꾸며 창업을 하는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뭔가 어린아이 같은 기질이 종종 남아 있곤 한다.
정호준은 의도적으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가상현실게임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가식적인 행동이지만 세상일이란 게 들키지 않으면 장땡인 법. 감정, 표정, 어조. 모든 것이 완벽한 정호준의 연기는 창업하며 나름 쓴맛을 맛본 경험이 있는 세 명의 거물을 어렵지 않게 속였다.
“좋은 아이템 있으면 우리 JHJ Capital의 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비전이 있다면 언제든 투자할 용의가 있으니까요.”
* * *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되어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대개 친분이라는 건 자주 만나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거다. 적어도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생일잔치를 조금 크게 준비하고 샘 앨리슨과 레논 호프먼, 그리고 이슈메이커인 엘튼 머스크와 미라클의 래리엇 닉슨, 동업자인 위즈니악 등을 초대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위즈니악의 명성은 샘 앨리슨이나 창업왕 레논 호프먼에게도 통했다. 위즈니악을 처음 보는 샘 앨리슨은 정말 영광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나눴고, 레논 호프먼이나 일튼 머스크는 면식이 있는지 서로 아는 체를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거물들이 모여 있는 이 생일파티 자리에는 정호준의 집에서 머물며 특파원 활동을 이어 가던 박기태도 자리해 있었다.
“야, 호준아.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
원래도 친했는데 레전드 리그 월드 챔피언십에 한 팀으로 나가며 더 친분을 굳건히 한 영양사 제임스 밀러와 카메라팀의 올리버 윌슨을 통해 래리엇 닉슨 등의 명성을 전해 들은 박기태는 살짝 겁을 먹었다.
“쫄지 마. 여기서 너보다 부자라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래리엇 닉슨과 위즈뿐이니까.”
실리콘밸리의 큰손이라 불리는 래리엇 닉슨이나 박기태보다 5배나 많은 지분을 보유 중인 위즈니악과 비교하면 자산이 적은 편이지만, IPO에 성공한 링크온의 CEO 레논 호프먼이나 작년에 IPO를 마친 테슬러의 CEO 일튼 머스크과는 비슷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리라.
테슬러가 드라마틱한 성장을 거두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현재 테슬러의 시가총액은 기껏해야 6조 정도였다.
‘유니버셜 히치 주가가 처음으로 100달러를 돌파했었지?’
JHJ Capital 주식 1%를 보유 중인 박기태는 가만히 주식을 보유하기만 했을 뿐인데 앉아서 1조를 벌었다. 박기태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는 현재 약 3조 원. 스페이스 Z나 다른 여러 스타트업에 돈을 투자한 건 정호준도 합산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산만으로 사람의 수준을 나누면 저 사람들 재산 다 합쳐도 나한테는 상대가 안 돼. 그러니까 쫄지 말고, 그냥 놀자. 어려운 사람들도 아니야.”
정호준은 바짝 쫀 박기태의 등을 떠밀며 위즈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 기태! 오랜만이야. 호준한테 특파원으로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박기태와 나름대로 안면을 텄던 위즈니악은 박기태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었다. 위즈가 친근하게 대하자 다른 세 사람도 박기태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여기는 제 절친(Best Friend) 기태 박입니다. 미국으로 장기 출장을 와서, 제집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기태는 한국에서 기자로 활동 중이야.”
“기자라! 피곤한 직업을 가졌군요.”
엘튼 머스크가 위즈의 소개에 후렴구를 붙였는데, 그 후렴구를 들은 위즈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를 이어 갔다.
“기태는 우리 유니버셜 히치의 대주주이기도 하다고. 기태의 보유 주식은 1%나 된다고!”
물려받았든, 덤으로 받았든. 어떤 이유에서건 돈이 있다는 건 어울릴 만한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어울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박기태를 처음 보는 네 명의 거물들은 박기태를 편하게 맞이해 주며 자연스레 어린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야기할 슈퍼가에 대한 이야기와 시계는 어느 메이커가 진품인지 등을 놓고 토론의 장이 벌어졌다.
그들의 배려 덕에 박기태는 금방 녹아들었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평소의 박기태 모습이 나왔다.
‘조금 편하게 해 줬다고 금방 기가 살아서는. 단순하다니까.’
* * *
본래라면 11월에 IPO를 실시했을 클럽폰은 JHJ Capital이 대주주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굉장히 수월하게 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래 봤자 1회차 때보다 1개월 정도 빠르게 계획이 잡힌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9월 초에 열었던 생일파티를 무사히 마친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나씩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늘어가는 걸 통해 아이들이 커 나가고 있는 걸 체감하곤 그 사실을 즐거이 여겼고, 9월 말에 개최된 공화당 쪽 자선행사에도 참석해 본인이 골수 민주당 지지자가 아님을 어필하기도 했다.
정호준이 지분을 정리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클럽폰과 강현태의 선거 날이 껴있는 운명(?)의 10월이 도래했다.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유니버셜 히치가 상장될 때처럼 클럽폰의 본사가 위치한 시카고의 어느 한 빌딩 1층에 나스닥 IPO를 위한 이벤트 재단이 설치되었다. 위치도 가깝고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정호준 또한 IPO 이벤트를 위한 행사에 참석했다.
“IPO를 축하합니다.”
“정호준 대표님이 잘 봐 주신 덕분입니다.”
정호준이 회사를 강탈할까 봐 걱정했던 건 옛말인 듯 조던 메이슨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창업자인 정호준이 직원들에 둘러싸여 사인했던 것처럼 클럽폰의 창업자 조던 메이슨의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정호준은 축하 인사를 건넨 뒤 무대에서 수십 걸음 뒤로 떨어졌다.
‘유니버셜 히치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네.’
정호준의 자금만으로 필요한 자금을 모두 조달했던 유니버셜 히치와는 조금 다른 광경이 보이긴 했다.
유명 회사에서 한자리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빛내고 조던 메이슨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벤트에 참석한 것. 오늘 이 이벤트에 참석한 사람 중엔 정호준이 산세이 은행 주식을 교환했던 C&L 인베스트먼트와 리처드 캐피털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C&L인베스트먼트에서는 과거 지분 교환을 위해 불러들였던 에드워드 클락이 참석했고, 리처드 캐피털의 경우 무려 회사의 주인인 이삭 리처드가 직접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정호준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IPO 이벤트 재단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호준에게 재빨리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호준 대표님.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C&L인베스트먼트의 에드워드 클락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처드 캐피탈의 이삭 리처드입니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는 체해 주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했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무리한 요구 없이 거래에 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리처드 캐피탈의 CEO 이삭 리처드와도 악수를 나누며 자신을 소개했다.
재단에 자신의 서명을 하고 종을 치는. 형식적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기쁠 이벤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클럽폰의 총발행 주식 수는 608,747,600주. 공모로 시장에 내놓은 주식은 6,500만 주에 달했다.
처음 주식을 청약받기 전에는 3,000만 주를 공모하는 걸로 결정했었는데, 신청이 워낙 많아 추가로 3,500만 주를 더 공모하기로 결정했다. 3,000만 주는 모두 JHJ Capital의 것으로 체결됐지만 뒤의 3,500만 주는 2,500만 주를 회사의 몫으로, 나머지 1,000만 주는 CEO인 조던 메이슨가 700만 주 클럽폰 공동창업자인 빅토르 레프코프스키가 300만주를 내놓기로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회사나 창업자들의 몫을 나눈 건 자신들의 실패를 염려해서가 아닌 혹시나 나중에 정호준이 악감정을 가질까 염려한 처신이었다.
‘우리 JHJ Capital의 눈치를 본 게 회사의 명줄을 늘렸다는 걸 저들은 과연 알까?’
1회차 때 20달러였던 공모가는 무려 25달러까지 상승한 상태였고, 조던 메이슨이 나스닥 상장 돌입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클럽폰 주식은 29.11달러로 장을 시작했다.
* * *
정호준은 즐거워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C&L인베스트먼트 에드워드 클락과 리처드 캐피털의 이삭 리처드를 이끌고 빌딩을 빠져나왔다.
“…….”
정호준이 시간을 내달라며 자신들을 끌고 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에드워드 클락은 침묵했다. CEO인 이삭 리처드가 있는데 자신이 운을 뗄 필요는 없기 때문. 이삭 리처드는 에드워드 클락의 의도대로 정호준이 그들을 끌고 나온 이유를 물었다.
“저희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예, 한 가지 충고를 드리고 싶어서요.”
“경청하겠습니다.”
JHJ Capital은 C&L인베스트먼트, 리처드 캐피털이 보유한 산세이 은행 주식을 클럽폰 주식 600만 주, 700만 주와 교환했었다.
“길게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서로의 몫이니까요. 우리 JHJ Capital이 클럽폰을 엑시트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겁니다.”
“예, 경영권 문제로 분쟁이 있어서 다툼 끝에 엑시트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클럽폰이라는 회사가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다퉜다고 주식을 모두 정리할까요?”
돈이 걸린 문제는 감정적으로 해결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면 감정이 상해도 들고 있는 게 옳았다. 정호준은 그 점을 피력했다.
‘굳이 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두 회사는 JHJ Capital이 산세이 은행 지분을 확보하는 것에 순순히(?) 협조했다. 그런데, 만약 교환한 주식이 손해를 본다면 그 적의는 어디로 갈까? 안 봐도 훤했다. 투자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지만 그 진리는 항상 성립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호준은 두 사람을 보며 넌지시 주식을 정리할 것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