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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79화 (279/335)

279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79)

일본 투자팀을 불러 일거리를 잔뜩 안겨 준 후 스케줄을 조정하여 빠른 시일 내로 고분호 회장과 약속을 잡았다.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거니와, 은성그룹 고분호 회장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호준은 10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에 당도해 냉랭한 기색을 연출했지만, 의도된 냉랭함은 약속 시간을 5분 남기고 도착한 고분호 회장이 보인 행동 때문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노인네가 못 지낼 게 뭐 있겠나? 그냥 세월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거지. 정 대표는 아주 잘 지내는 것 같더군.”

“그나저나 만나자고 요청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은성과 JHJ가 웃으면서 밥 먹을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만남을 가지면 예의상 나누는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정호준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뉘앙스를 띠는 정호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고분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얼굴을 붉히는 일쯤은 허다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는 듯한 뻔뻔함에 정호준이 인상을 구길 찰나 고분호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이번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 건에 있어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 건 명백한 우리 은성의 실수입니다. 사장단의 의욕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선을 넘어서 미안합니다, 정 대표.”

주름 가득한 노인이 고개를 숙인다.

새파랗게 어린 정호준에게 노인인 고분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 자체도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이의 정체가 재계를 주름잡는 고분호 회장이라는 것은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호준은 그 점을 의식히지 않았다. 그저 뒤이어 들려온 고분호 회장의 변명(?)에 집중할 뿐.

“밑에 사람의 실수라고요?”

정호준으로부터 설명해 보라는 시선과 질문을 받은 고분호 회장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이스트 반도체가 우리 은성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어 줄 거란 생각에 인수전에 뛰어들긴 했지만. 정 대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내가, 굳이 사서 감정이 남을 만한 짓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미국 재벌도 아니고 한국 재벌이라 정보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정호준이 세간에 밝혀진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파악할 역량은 가지고 있었다.

일을 지저분하게 진행하면 결국에 손해를 보는 건 은성그룹이지 않냐는 의도가 내포된 너무나 합리적인 질문에 정호준은 일순 말문이 막혀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으음.”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못 하는 정호준을 보며 고분호 회장은 설명을 이어 갔다.

“…….”

* * *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경영을 맡기든, 재벌 일가가 직접 회사를 경영하든 CEO(회장)는 방향을 설정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 선택을 위해 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부터 정보를 긁어 오고, 회사 임직원들의 프레젠테이션과 보고가 잇따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직원들처럼 발로 뛰며 제안서를 작성하진 않는다는 거다.

고분호 회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물론 하이스트 반도체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평소보다 더 많은 보고를 받고, 다른 업무 때보다 더 많은 신경을 쏟으며 진행 과정을 챙기긴 했지만 말이다.

“JHJ Capital이 꾸준하게 주식을 사들여서 지분 보유율이 25%를 넘겼다며? 그런데 우리가 인수해도 될까?”

고분호는 은성전자 임원들이 주도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청취한 후 JHJ Capital이 보유한 지분의 리스크와 관련해서 염려를 드러낸 적 있다. 타사가 높은 지분을 보유 중이면 누구든 부담스럽기 마련이잖은가?

여기서부터 은성전자 사장단의 실수가 시작되었다.

“JHJ Capital이 하이스트 반도체 지분을 다수 확보 중인 건 사실이지만, 배당금이 목적이고 회사 인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근거는?”

“정부 쪽 인맥을 통해 알아낸 정보인데, 산업 은행과 하이스트 반도체 경영진, 정부 관료가 전부터 몇 차례나 JHJ Capital에 하이스트 인수를 제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안서를 보낼 때마다 인수할 생각이 없다는 답만 반복됐답니다. JHJ Capital이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에 관심이 있었으면, 진작에 정부나 산업은행 측이 건넨 제의를 받아드렸을 겁니다.”

경선그룹. 대한민국 대중에게 KS그룹으로 더 익숙한 대기업이 하이스트 반도체를 인수한 시기에 맞춰 하이스트 반도체를 인수하려 한 정호준의 플랜은 은성전자의 사장단에게 착각을 심어 주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정보의 출처까지 확실하게 밝혔고, 근거로 사용되기에 합당했던 터라 고분호 회장은 인수계획을 수락했다. 고분호 회장이 듣기에 ‘전자 쪽에서 최소한의 반도체 매출을 보장해 준다는’ 프레젠테이션은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시너지효과가 난다는 말은 하나 틀린 게 없지. 한국 기업들은 뭉쳐야 살아.’

문어발 확장이라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재계 회장들은 대게 뭉쳐야 산다는 말을 신뢰하는 편이다.

고분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성전자 임직원들은 준비해 두었던 대로 인수를 위한 절차를 밟았다.

[JHJ Capital 하이스트 반도체 지분 30% 확보!]

[JHJ Capital 하이스트 인수 의사 밝혀?!]

은성전자 사장단이 JHJ Capital이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이미 은성전자도 5%가 넘는 지분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5%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은성전자는 이미 많은 자금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제 와 포기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했다.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는 적어지고 그 자리를 원하는 경쟁자는 많다. 승진에 성공해 이사, 전무, 부사장, 사장, 부회장직을 쟁취해 냈다 할지라도 자리를 유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사장단을 포함해 사람들이 임원이라 불리는 직책은 모두 계약직이었고,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선 성과가 필요했다.

가뜩이나 성과가 필요한 상황에서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도 무엇 하나 이뤄내지 못한 상황을 상사인 고분호 회장이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기업은 돈만큼이나 시간 또한 귀중한 자원으로 봤으니깐 말이다.

‘우리 예측과 달리 JHJ Capital이 경쟁자로 떠올랐지만 이기면 돼.’

‘JHJ Capital의 명성이 크긴 하지만 똥개도 제집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간다 했다. 뇌물을 찔러 주긴 해야겠지만 산업은행이나 정부 기관은 우리를 밀어줄 거야.’

‘정부가 우리를 밀어주는 데 부담이 없도록 밑 작업을 해 둬야겠군.’

임원단은 미국에서 막대한 성공을 이룩한 JHJ Capital보다 그들의 생사(生死)를 움켜쥔 고분호 회장의 질책이 더 두려웠다.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는 은성전자 사장단은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한국의 대기업이 외국계 기업이나 중견기업들과 인수 경쟁을 벌일 때 보여 주곤 하는 습관을 보여 주었다.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분호 회장으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정호준은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내 것을 욕심냈다고 뭐라 하기엔, 고분호 회장의 말처럼 내가 너무 헷갈리게 만들긴 했네.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건 은성이지만 그럴 만했던 거 같은데?’

세상에 어느 누가 인수 제의를 몇 번이나 걷어찬 이가 인수전에 참전할 거라 생각할까?

일본에 신경을 쏟느라 뒤늦게 은성전자의 의도를 인지한 것도 문제였다. 정호준이 조금만 더 빠르게 대처했다면 굳이 경쟁까지 가지도 않았으리라.

“이 노인네가 이렇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책임자를 문책할 테니, 혹시 기분 상한 게 있다면 풀어 주지 않겠나?”

정호중에게도 충분히 오해할 만한 소지를 제공했다는 과(過)가 있음에도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청한다. 누가 강자인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셈.

‘이게 군부 독재 시절에도 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갔던 경영자의 관록인 건가?’

충분히 억울할 만한 상황임에도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오성그룹의 김건희 회장과 함께 재계의 전설답다면 다웠다.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야기한 대로네. 이번 인수를 책임졌던 임원진을 물갈이하겠네. 문책성 사직을 권고하든 계약 갱신을 하지 않든, 방법은 정 대표가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겠네.”

정호준은 아무렇지 않게 사장단을 처분할 권리를 넘겨주는 고분호를 보며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양보하시는데 제가 더 뭘 할까요.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악감정은 품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사장단은 어떻게 마무리하길 원하나?”

“저와 진흙탕 싸움을 하겠다는 심보가 고약하긴 한데, 우리 JHJ Capital에서 오해의 소지를 잔뜩 안겨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같네요. 그냥 재계약을 안 하는 선에서 끝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남의 밥줄을 함부로 끊는 건 좋을 게 없었고, 정호준에게도 분명 오해의 소지를 제공했다는 잘못이 있기는 했다. 더군다나 은성 쪽에서 먼저 숙였잖은가? 고분호 회장의 체면을 살려 줄 필요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그냥 얌전하게 마무리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은성전자는 하이스트 인수전에서 빠지도록 하겠네. 언론에도 내가 직접 이야기해 두도록 하지.”

문제가 어느 정도 잘 해결된 탓에 어색하고 냉랭했던 기류가 풀렸는데, 이때 고분호 회장의 회심의 한 방이 시작됐다.

“다만 그와 별개로 하이스트 주식은 좀 더 인수하려고 하네.”

“?”

인수전에서 철수하겠다면서 지분을 추가로 인수하겠다니. 말의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정호준은 의문 가득한 시선을 던졌고, 고분호 회장은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정호준의 시선을 마주한 채 뻔뻔하게 이야기했다.

“지분을 좀 더 확보해서 JHJ Capital의 우호 세력으로 남도록 하겠네. JHJ Capital이 외국 자본인 건 분명한 사실이잖은가? 우리 은성이 대주주로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분명 자네가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될 걸세.”

파이를 나눠 달라는 의도에서 한 말인 게 분명해 보임에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고분호 회장은 헛소리가 헛소리로 들리지 않도록 매력적인 미끼까지 걸었다.

“은성전자에 필요한 반도체 물량을 하이닉스에서 구매하겠네. 실적에 분명 도움이 될걸세.”

그리고 퇴로까지도 확실하게 확보했다.

“산세이 은행과 라소니 홀딩스를 인수했을 때처럼 정 대표가 상장 폐지를 원한다면, 적당한 값에 주식을 넘기겠네.”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을 눈앞의 고분호 회장을 통해 확실하게 체험하는 중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은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르잖습니까? 원하시면 사는 거죠.”

사실상의 허가가 떨어졌고, 그렇게 만남은 끝이 났다.

[은성전자 인수의사 철회!]

[JHJ Capital 최종 인수 대상자로 선정!!]

정호준이 고분호 회장과 미팅을 가진 다음 날 언론을 움직여 은성전자의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 철회를 공표했다.

‘나이 든 사람답지 않게 빠릿빠릿하네.’

* * *

승자의 저주(Winner’s Course).

경쟁에서는 이겼으나 경쟁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을 소비한 탓에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는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다.

2011년 현재. 한국에는 승자의 저주 때문에 고생하는 기업이 있었다.

하이스트 반도체를 인수한 JHJ Capital이 승자의 저주에 걸린 거 아니냐고?!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에 본래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소모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사용한 예산보다 배 이상을 사용해도 JHJ Capital이 승자의 저주에 걸릴 일은 없었다.

정호준은 승자의 저주에 걸려 허덕이는 기업을 향해 인수제안서란 구원의 손길(?)을 보냈다.

여기까지가 한국행을 통해 달성할 목표였다.

‘대회가 얼마 안 남았다. 빨리 마무리하고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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