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77)
시곗바늘을 조금 거꾸로 돌려, 정호준이 실리콘밸리에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폴론의 창업자 메리 홈즈예요.”
여성답지 않은 중저음. 듣기 좋고 집중되는 중저음으로 메리 홈즈는 정호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월가의 거물께서 방문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메리 홈즈는 살짝 고개를 꺾어 들며 미소를 지었다.
‘얼짱 각도까지 이용하는 건가?’
아름다운 외모, 새하얀 피부. 그리고 금발까지. 미국인하면 떠오르는 게 백인 금발 미녀지만, 미국에서 천연 금발은 스물에 한 명꼴이었다. 게다가 백인과 미녀라는 카테고리까지 겹치면 그 비율은 더더욱 줄어든다.
메리 홈즈는 미국인들이 백인 금발 미녀에게 갖는 환상까지 이용하기 위해 금발로 염색하는 치밀함을 가진 여성이었다.
인사를 나눈 뒤 사적인 대화를 이어 갔고, 스탠퍼드에 입학한 여자답게 아는 게 많고 말이 잘 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치켜세워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사업인 것 같으면 투자를 하는 게 투자자로서 당연한 건데요. 제게 아폴론의 비전을 설명해 주겠습니까?”
홈즈는 정호준이 홈즈가 자신을 꼬신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메리 홈즈의 표정이 바뀌었다.
“혈액 검사를 하는 데만 해도 수백 달러(수십만 원)가 들죠. 대표님은 미국에서 의료 서비스를 부담하다 빚을 지거나, 빚을 지는 거로도 모자라 파산에 이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메리 홈즈는 의료비가 부담돼 제때 검사를 받지 않다가 병이 심각해진 상태로 병원에 가게 되는 미국의 현실을 꼬집으며 자신의 사업의 타당성을 어필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피검사에 필요한 피의 양을 말해 주며 자신은 혈액 검사를 받는 것도 무섭다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참 잘 만들어졌다. 진짜 어떻게 이러지?’
연기를 하는 거라곤 믿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였다. 메리 홈즈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런 기색을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는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스토리텔링을 정말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메리 홈즈가 딱 그랬다.
자신이 지어 낸 스토리텔링과 환경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 이런 모습은 보여 주기 힘드리라.
‘대단하다, 대단해.’
하나 확실한 건,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게 아니란 걸 느꼈다는 거다.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면서도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홈즈 대표님의 고결한 비전은 잘 들었습니다. 미국인들을 위해서라도 상용화가 됐으면 좋겠네요.”
“정호준 대표님께서 투자를 해 주신다면 제 이상이 조금 더 빨리 실현될 겁니다. JHJ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죠.”
정호준의 투자를 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 수 있기에 홈즈는 정호준에게 투자를 권했다.
“글쎄요. 홈즈 씨의 고결한 비전에는 동감하고 대단하다 여기고 있지만 사업은 현실이라서요. 투자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투자를 부결시키기 위해 정호준은 투자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언급했다.
“투자하기에 앞서 기술개발팀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요.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정호준의 요청에 웃음기를 띠거나 진중한 모습만 보이던 홈즈의 표정이 깨졌다. 다만 정호준이 그 사실을 인지하는 일은 없었다. 표정 관리가 어려울 것 같다고 인지한 홈즈가 정호준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굴 방향을 돌렸기 때문.
“죄송하지만 기술 유출의 위험성 때문에 불가합니다.”
홈즈는 세상이 아폴론에 기술을 증명하라고 할 때마다 나왔던 레퍼토리 중 하나를 내뱉었다.
“그렇습니까? 아폴론의 기술이 혁신적인 만큼 홈즈 대표님의 결단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아폴론에 투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반드시 내 눈으로 확인하고 가치를 재단한 것에만 투자를 하거든요.”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월가에서도 가장 도박적인 성격이 강한 투자회사 JHJ Capital의 대표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말이었지만, 홈즈는 정호준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사람을 많이 만나 본 만큼 정호준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투자를 이어 가지 않을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쉽다고 달라붙었다가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좋게좋게 마무리하는 게 맞았다.
[조건이 맞지 않아 아폴론에 투자를 못한 게 아쉽다는 정호준 대표!]
[JHJ Capial 정호준 대표 ‘아폴론의 메리 홈즈 대표의 비전은 참으로 고결해’]
질척이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게 존재했다.
* * *
자기 PR만으로 세상을 속여 먹은 메리 홈즈다. 메리 홈즈는 정호준의 찬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역량을 가진 여자였고, 아니나 다를까 정호준을 이용해 회사의 이름값을 높였다.
정호준을 알차게 팔아먹으며 지분을 대가로 투자받을 곳을 구했고, 복수에 눈이 멀었던 JD플라워는 정호준이 의도했던 대로 그녀의 낚싯바늘에 꿰였다.
“이런 말씀 드리면 화를 내실 수도 있지만, JHJ Capital에 크게 한 방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는 돈을 버는 거죠. JHJ Capital이 투자하려다가 못한 아폴론에 투자하시고, 우리 아폴론이 성공하면 정호준 대표님께서 배가 아프지 않을까요?”
홈즈의 꿰임에 넘어간 JD플라워는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홈즈의 말처럼 정호준이 배 아파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너무 달콤했기 때문이다.
월가에서 나름 성공한 축에 속하는 JD플라워치고 너무 멍청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원래 복수라는 감정이 이성을 흘리는 데다가 메리 홈즈가 워낙 말을 잘하긴 했다.
정호준의 회귀 전 역사에서 메리 홈즈는 언론의 황제라는 FOXI의 ‘루퍼트 머레이’나 정호준과도 다툰 적이 있던 미라클의 ‘래리엇 닉슨’, 미국 엔터프라이즈 업계 강자 중 한 곳인 코니 엔터테인먼트의 ‘코니 가문’, 미국 마트 점유율 1위 윌마트의 ‘윌튼 가문’ 멕시코 통신 산업의 황제 ‘카를로스 슬링 엘튼’ 등.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들로부터 투자금을 이끌어냈던 메리 홈즈에게 JD플라워쯤은 설득하기 쉬운 대상에 불과했다.
‘뭐, 어쩌면 이렇게 거물들에게 투자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홈즈가 사기가 미국 전체를 흔들었던 거지.’
성공해서 돈이 많다 할지라도 더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지, 돈을 잃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정호준 본인만 놓고 봐도 1회차 때 만족하며 살았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욕망 복합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돈을 잃는 것에 초연한 사람이면 애초에 그 정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거다. 투자가 실패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전폭적으로 협조했기에 홈즈의 사기 행각이 이슈가 된 걸 거다.
‘정치인들을 잘 활용하기도 했고.’
은퇴한 유명 정치인들을 회사로 스카우트해 정치 쪽에 인맥을 만들었고, 기술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들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극복(?)했었다.
어쨌든 JD플라워가 아폴론에 투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발품을 판 값을 톡톡히 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관심을 꺼도 되겠다고 생각할 무렵,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다.
‘오리하에게 따로 언질을 주는 게 맞겠지?’
사기 행각이 밝혀지기 전까지 아폴론은 미국에서 뜨거운 이슈 거리로 떠올랐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백악관에 초청되고 미국 홍보대사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홈즈의 사기 행각이 발각된 뒤로 그녀를 홍보대사로 삼았던 백악관 또한 체면이 깎였었다. 이런 실수 하나하나가 지지율을 깎아 먹어 종국에는 공화당의 스트롱맨이 대통령이 된 것임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알려 주는 게 맞아 보였다.
* * *
지갑(?)에 천문학적인 돈을 보유 중인 정호준은 다시금 유망한 곳에 투자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정호준의 포트폴리오에 포함된 기업 중에는 한국 기업도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JHJ Capital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이름을 올린 한국 기업은 ‘하이스트 반도체’였다. 약 1조 1,311억 원을 들여 총발행 주식의 17.5%를 보유 중이었던 정호준은 2009년, 2010년에도 꾸준하게 지분을 사들여 28%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 EU, 일본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들이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작하기 직전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고, 정호준의 지시를 받은 JHJ Capital 실무진들은 먼저 나서서 인수 제안서를 제출했다.
[JHJ Capital 하이스트 반도체 인수하나?]
[고생 끝에 빛이 오는 건가? 하이스트를 지켰던 정부의 판단을 옳았다!]
사실 2012년 정부가 인수자를 구할 시점에 인수 제안을 던질까도 고민했지만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할 조짐을 보였기에 정호준은 선수를 쳤다.
‘은성이 끼어들 줄은 몰랐는데.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뒤늦게 부랴부랴 스마트폰 개발을 시작했던 회귀 전과 달리 은성전자는 정호준에게 컨설팅을 받고 애플폰이 출시됐을 때부터 경쟁에 뛰어들었다. 반도체가 스마트폰에 필요한 핵심 부품인 만큼 안정적인 수급처가 필요했는데, 경쟁사인 오성전자에게서 반도체를 받아 오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한국 주식시장을 주시하는 팀으로부터 은성전자가 하이스트 반도체 지분을 조금씩 사들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정호준은 지분 매입을 지시하며 인수 절차를 밟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정호준에게 매물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은성전자 또한 언론을 움직여 수를 쓰기 시작했다.
[은성전자 하이스트 인수전에 참전하나?! 인기 매물로 급부상한 하이스트 반도체!]
[하이스트 반도체가 걸어온 역사!]
하이스트 반도체 지분 5%를 확보한 은성전자를 시장에 지분율을 공지했고, 언론사를 움직여 그들이 하이스트 반도체를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수요가 늘면 당연히 주가가 상승하는 법. 갑작스럽게 발생한 인수전에 하이스트 반도체의 주가는 급격하게 상승세를 띠었다.
주식시장에서 주당 23,870원 하던 하이스트 반도체의 주가는 JHJ와 은성이 인수 경쟁을 벌임과 동시에 천정부지로 상승했다.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하이스트 반도체 29,760원.
[한국 세금으로 살린 하이스트 반도체를 외국계 자금에 넘기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인가?]
[대한민국의 국부가 빠져나가고 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답게, 정호준에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은성전자는 인수 경쟁에서 가차 없었다.
일본만큼 배타적이진 않지만 한국 시장 또한 배타적이긴 마찬가지다. 은성전자는 언론을 통해 한국인들의 애국심을 부채질했다.
-JHJ Capital 지분 공시. 30% 확보
[2008년. 하이스트가 흔들릴 때부터 꾸준하게 주식을 사들이고 지켜본 건 은성이 아닌 JHJ Capital이었다?!]
정호준 또한 은성의 수작에 지지 않고 광고를 줬던 ‘중심일보’를 통해 반격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