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74)
2000년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기업은 JHJ Capital, 구골, 엔플. 이렇게 세 곳이다. 이 중에서 JHJ Capital의 경우 정호준의 개인 자금을 운용하는 비상장 회사인지라 사람들이 돈을 투자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엔플이나 구골의 경우 개인 투자자들도 얼마든지 투자 가능한 기업이었다.
다만 2004년 구골이 IPO에서 성공을 거뒀을 때도 월가의 투자자들이나 평범한 대중들은 구골이 이렇게까지 거대한 회사로 성장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로 구골이 상장한 2004년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IT업계에 치솟았던 거품이 터진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는 점이다. 한번 IT 주식에 데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투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둘째로 이미 자리를 잡은 IT업계의 공룡 ‘야호’의 존재였다. 제조업, IT업계, 금융업계, 보험업계 등 경쟁이 존재하는 모든 분야에서 선점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골의 경쟁자인 ‘야호!’는 IT 버블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수혈하며 이미 업계에서 공룡이라 불리며 백 보는 앞서 있었다.
깊숙이 파고들면 야호는 디렉터리, 전자우편, 개인 홈페이지를 비롯한 서비스들이 통합된 포털 사이트고, 구골은 검색엔진을 기반으로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라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고, 구골은 충분한 경쟁력을 가졌지만.
IT업계에서 근무하는 당사자가 아닌 외인(外人)들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월가 투자자들은 저점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지점, 혹은 배 위에서 구매했다. 정확히는 배 위에서 구매했다고 여겼다.
2020년도를 살다 온 정호준이 보기엔 그조차도 늦게 들어간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판단이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거니 정호준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JD플라워가 유니버셜 히치의 주식을 노린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한 번은 실수해도 두 번은 아니지.’
구골은 제때 알아보지 못해 무릎 아래에서 주식을 매수하지 못했지만 ‘유니 톡’을 서비스하는 ‘유니버셜 히치’는 JHJ Capital이라는 보증수표가 달라붙어 있다. 그렇다 보니 월가에 작은 사무실이라도 가지고 있는 투자 회사라면 모두 유니버셜 히치 주식이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구골 때와는 반대로 유니버셜 히치의 주식을 매수하는 건 상당히 경쟁이 심했다. 경쟁을 심화시키는 이유는 더 있었다.
대개 IPO를 진행하는 기업들은 기업 명의로 주식을 풀 때 창업자들 또한 자신이 보유 중인 주식을 일부 시장에 내놓는다. 성공했잖은가? 차도 사고, 집도 사고, 후줄근한 옷차림도 바꾸고. 이것저것 할 게 많았다.
연봉도 안 받으면서 개발에 매달린 창업자들이 자신을 가꿀 돈이 어디서 나오겠나? 자신의 명의로 돌려진 주식을 시장에 내놓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유니버셜 히치는 대다수의 창업자들과는 달랐다. 본래부터 주머니에 가진 게 많은 대주주 JHJ Capital은 51%의 지분을 꽉 쥐고 시장에 풀지 않았고, 다른 창업자들도 손에 쥐고 있는 10%의 지분을 풀지 않았다.
단순 계산상으로는 39%의 지분을 가지고 나눠 먹는 형국인 것.
그런데 사실 이런 단순 계산도 제대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시장에 풀린 39%의 지분 중에는 JHJ Capital이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으로 지급한 주식도 포함되어 있다.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이라고 생각이 없는 게 아닌지라 스톡옵션으로 지급된 주식을 받자마자 매각하는 이는 몇 없었다.
시장에 풀린 주식을 매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주식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JD플라워의 대표들이 유니버셜 히치의 주식과 교환하자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JD플라워 입장에서만 놓고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자신들은 유니버셜 히치 주식을 원하고, 정호준은 그들이 보유한 ‘산세이 은행’ 주식을 원한다.
서로가 원하는 걸 주고받는, 윈윈이 되는 결과잖은가?
“우리 JD플라워는 유니버셜 히치 주식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니버셜 히치에 투자하고 싶은 JD플라워의 입장이었다.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정호준은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정호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JD플라워의 대표 크리스토퍼 조셉과 이안 데이비드는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JD플라워와 주식 교환을 해 대표님께서 보유하신 주식 보유량이 줄어든다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우리 JD플라워는 JHJ Capital의 우호 세력으로 있을 테니까요.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계약서에 조항으로 넣으셔도 됩니다.”
“JD플라워가 수익 실현을 위해 주식을 매각하는 시점이 오면 JHJ Capital에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달콤한 조건들을 덧붙였지만, 한 번 일그러진 정호준의 표정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아메리카 드림이란 말로 전 세계에서 인구를 끌어당기는 미국이지만 미국에는 분명한 차별이 존재한다.
정호준은 이민자 출신이다.
그것도 백인이 아닌 백인과 흑인 양쪽으로부터 차별받는 황인종의.
자본주의의 총본산답게 돈이 많으면 그러한 경계를 넘을 수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이 있었다. 진짜 기득권 세력은 최소 수십 년은 미국 재계에 뿌리를 박았으니 말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기에 정호준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말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미국계나 EU권 국적의 금융 기업, EU권 국가를 공격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유럽의 금융 세력을 공격했던 2008년에도 어느 정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 줬고, 로슬러라는 100년 넘게 미국 재계에 뿌리를 내린 기득권 세력과 혼맥으로 엮인 뒤에도 정호준은 행동을 조심했다.
‘그래서 나를 만만하게 본 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저들은 상식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정호준은 JD가 선을 넘어도 분명하게 넘었다고 여겼다. 시장에 나온 것을 노리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보유 중인 지분을 노렸잖은가? 본래 상장도 하기 싫었던 ‘유니버셜 히치’다. 정호준의 수중에 있는 것까지 노렸다는 건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이미 기분이 상해서일까?
지분 교환을 통해 대주주로 등극해도 우호 세력으로 있겠다고 말한, 나름 정호준을 생각해서 던졌다는 조건조차 오만 가득한 소리로 들렸다.
자신의 것을 노리는 JD의 행보에 자기도 모르게 분노해 표정 관리에 실패했던 정호준은 일그러진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아뇨. 저는 JHJ가 보유 중인 유니버설 히치 지분율을 줄일 생각이 없어서요. 배려는 감사하지만 주신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JD플라워에서 정호준이 역린이라 여겨지는 곳을 건드려서일까? 따로 다른 제안을 던지지도 않았다. 정호준은 단호하게 끊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JD플라워 CEO들과의 미팅을 일방적으로 깨고 시카고의 본사로 돌아온 정호준은 은행 인수를 진두지휘 중인 조나단을 사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조나단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자넷 다음으로 정호준과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한 조나단은 정호준의 나이가 어림에도 조심스럽고 존중 가득한 태도를 보여 왔는데, 오늘은 특히나 조심스러웠다.
비서팀이나 경호팀을 통해 정호준이 분노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정호준이 분노를 표출한 건 조나단이 정호준과 함께한 6년의 세월 동안 단 두 번밖에 없었다.
‘대표님께서 분노를 표출한 건 다 유니버셜 히치와 연관되어있군.’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정호준을 보며 조나단은 정호준이 무엇에 분노했는지를 정리했다. 조나단이 정호준의 앞에서 유니버셜 히치를 언급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까지 생각의 흐름을 이어 갈 무렵 정호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JD플라워와의 협상이 파투 났네요. 일본 정부와 일본 기관들이 보유 중인 지분 인수를 서둘러 주십시오.”
평소와 같은 냉정한 어조의 지시였지만 오랜 세월(?) 정호준과 함께한 조나단은 그 속에 숨겨진 정호준의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
소름이 끼쳤다.
“예, 곧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화난 사람한테 말을 걸어 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정호준의 지시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지시를 이행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와 정부 관계자와 접촉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내에 비밀은 없다고 정호준이 분노했다는 사실이 퍼져서인지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되었다.
일본 정부 기관이 보유 중인 산세이 은행 지분은 28(57,148,378주)%.
JHJ Capital과 유니버셜 뱅크 관계자들은 주당 1,050엔을 지불해 60,005,796,900(600억 579만 6,900)엔에 일본 정부 기관이 보유 중인 28%의 지분을 인수했다.
JHJ Capital은 그렇게 산세이 은행 지분 84%를 확보했다.
* * *
상장폐지(上場廢止/Delisting).
주식시장에 상장됐던 회사가 주식시장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뜻하는 용어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대개의 경우 상장된 회사에 문제가 생겨 상장이 폐지되지만, 간혹 상장된 기업이 상장폐지를 행보를 걷는 경우도 있다. 이를 한국에서는 ‘자진 상장폐지’라고 부른다.
‘자진 상장폐지’는 보통 1대 주주가 다른 주주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 하고, 파이(이득)을 독차지하고 싶어 할 때 발생하는데 자진 상장폐지를 위해서도 몇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요건은 1대 주주가 발행 주식의 95%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JHJ Capital과 유니버셜 뱅크는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1대 주주가 95%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해도 ‘주식 분산율’이나 ‘거래량’ 등을 충족해서 상장폐지를 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빨리 마무리하는 게 좋아.’
배타적인 경향이 강한 일본인의 습성을 알고 있기에 JHJ Capital은 2011년 내로 산세이 은행과 라소니 은행을 상장폐지하고 유니버셜 뱅크에 합병시킬 계획을 세웠고, 진행 중이었다. 그냥 손 놓고 조건이 만족시키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었다.
“주주총회를 엽시다. 안건은 유상증자입니다. JD플라워의 지분율이 5% 미만으로 줄어들도록 증자를 단행할 겁니다.”
유상증자란 자본을 대가로 주식을 추가 발행하는 행위다. 추가로 돈을 소요되는 행위지만 정호준의 지갑 상황은 넉넉했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주식을 넘길 대상은 주주총회를 통해 선정 가능했다.
‘유니버셜 뱅크나 JHJ Capital이 못 받으면 SSL Capital이나 일본 법인이 받아 줘도 무방하지.’
추가로 법인을 설립하는 방법도 있었다.
유상증자가 불발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1대 주주(유니버셜 뱅크), 2대 주주(JHJ Capital)가 한통속으로 84%의 지분을 확보한 주주총회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니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었지만 정호준은 개의치 않고 강행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정호준의 행보에 반대할 법도 하건만 ‘대표님 이건 대놓고 JD와 싸우자는 이야기입니다’라고 정호준의 말에 반대를 표하는 이는 없었다.
정호준이 JD플라워를 방문 후 분노를 드러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유상증자 한마디를 통해 정호준의 생각을 읽은 유니버셜 뱅크와 JHJ Capital의 임원진들은 그저 거수기 역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