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26화 (226/335)

226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26)

은행(금융회사)의 파산이라는 재해(災害) 앞에 힘도 정보도 부족한 평범한 대중(개미)들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투자판의 개미 인생이지만, 대처할 깜냥이 안 되는 은행의 파산이란 상황에서조차 구명조끼 하나 없다는 건, 가슴 아픈 것을 넘어 은행에 자금을 예치하는 것을 망설이게 될 정도로 두려움이 가득한 일이었다.

가계가 은행에 돈을 집어넣지 않으면 은행의 대출에도 문제가 생겼기에 정부가 나서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은행이 파산해도 파산한 은행에 돈을 저축해 두었던 이에게 5,000만 원까지 법으로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구제를 법으로 명시함으로써 두려움을 조금이나 감소시켰다.

정부가 법으로 명시한 최소한의 구제를 ‘예금자보호법’이라고 불렀다.

연이은 뱅크런으로 부실한 은행들이 부율경저축은행을 따라 파산하며, 파산한 은행에 돈을 저금해 둔 이들은 예금자보호법을 믿고 5,000만 원이라도 건지기 위해 정부에 매달렸다. 그러자 ‘후순위채권’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터져 나왔다.

기업(주식회사)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하여 발행하는 것을 세상은 채권이란 단어로 정의한다. 채권을 쥐여 주고 돈을 빌리는 구조여도 어쨌든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리는 행위다 보니 채권에도 이자가 붙었다.

우리가 흔히들 아는 제3금융권의 돈 ‘사채(私債)’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어 회사에서 발행한 채권이라 회사채로 부르기도 하는 이 사채(社債)는 조건에 따라 또다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뉘는데, 후순위채권은 이 회사채의 일종으로 주식회사가 발행한 여러 채권 중 거의 가장 마지막에 돈을 받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돈을 받게 되어 원금 환수에 대한 리스크가 큰 만큼 높은 금리를 지급했다. 정상적인 회사에 투자한다면야 돈을 마지막에 받아도 상관없어 후순위채권에 투자한다지만, 회사채의 발행은 은행에 대출을 받을 만큼 받았음에도 회사 재정 상태가 어려운 상황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위험한 것이었다.

회사채를 발행한 회사가 채권 발행 등의 행위로 끌어모은 자금으로 위기를 이겨 내면야 회사에도 후순위채권에 투자한 투자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스토리였지만, 아름다운 스토리라 부르는 건 대개는 파국으로 끝나기에 이를 아름답다고 치켜세우는 거다.

후순위채권에 투자한 이들은 주식회사가 파산 등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청산 절차를 밟을 때도 주식회사의 이름으로 달려 있는 다른 부채들을 모두 갚고 난 다음에야 돈을 받게 된다.

후순위채권을 사들인 이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갈 정도면 회사가 파산할 리도 없으니 사실상 돈을 못 받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아이고 선생님! 그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적금이 아니고 후순위채권이라는 것에 투자한 거라 물어주지 못한다니요!”

“금리를 높게 주는 좋은 게 있다고 해서 그러라고 그랬던 것뿐입니다. 근데 그게 예금이 아니라니요!”

“그게 어떤 돈인디, 우리 영감 목숨값입니다!!”

“내 자식 목숨값 돌려주십시오!”

저축은행 직원들의 달콤한 말솜씨에 넘어가 후순위채권이 뭔지도 모르고 구입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곡소리를 냈다.

저축은행은 본인들이 시중 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것을 잘 모르는 예금주들의 동의(?)하에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회사채 후순위채권을 사들여 금리를 쪽쪽 빨아먹으며 충당했고, 뱅크런의 연쇄로 파산하면서 그 면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뱅크런의 연쇄로 저축은행들의 파산을 다룬 언론은 이어 후순위채권 문제를 세상에 알렸다. 은행 직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후순위채권에 돈을 투자했다가 5,000만 원도 돌려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생겨난 상황에 넷상에서도 큰 소란이 일었다.

⌎한 푼 한 푼 모았을 텐데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진짜 나쁜 놈들입니다! 귀신은 뭐 하나,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귀신이 아니라 정부를 욕해야지. 똑바로 처벌해라 끝까지 지켜본다!

⌎무지가 죄라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구나.

⌎싸가지 없는 새X! 돈 잃어버린 사람들 두고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

⌎re: 아니 왜 열폭하고 그러냐?! 난 쟤가 맞는 말 했다고 보는데. 네 돈으로 메꿔 줄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도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안 그러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니냐?

부율경저축은행이 파산 후 14개의 저축은행이 부율경저축은행을 따라 파산했던 1회차 때와 달리 정호준의 이른 개입으로 11개의 저축은행이 파산하는 선에서 끝났다.

* * *

강현태는 분식회계 때문에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닌 상황에서 뱅크런이 일어나면 파국으로 치달아 부율경저축은행이 문을 닫게 될 거란 걸 정호준과 통화를 나누는 도중 알아차렸지만, 뱅크런이 연쇄해 다른 저축은행들이 부율경저축은행의 뒤를 따를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은행이 줄줄이 도산하는 것을 확인한 강현태는 정호준에게 연락해 흥분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정 대표님은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 추측이 틀립니까?”

-예. 당연히 여기까지 봤습니다. 뱅크런 사태가 일어나면 뱅크런이 터진 은행과 비슷하거나 더 낮은 신용도(지명도)를 가진 은행들이 줄줄이 털려 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그래서 금융 관계자들은 뱅크런에는 전염성이 존재한다고 말하곤 헀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뻔뻔한 대답에 강현태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뱅크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아도 될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아우성과 절규가 대표님께는 안 들리나 봅니다.”

후원자에게 비아냥거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쌍욕을 뱉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호준이 후원자라는 데서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한 거였다.

강현태는 돈을 잃어버린 인간은 원망할 대상을 찾게 된다는 본능이 있다는 걸 수십 년의 법조인 생활을 통해 깨달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냉정을 찾은 이들이 강현태를 선상에서 제외할 테지만, 당장은 피해자 중 최소 열에 하나가 ‘강현태만 아니었어도 뱅크런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럼 자기 돈도 무사했다’라는 식으로 회로를 돌릴 거라고 판단했다.

-저도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런 절규를 뉴스를 통해 보면 가슴이 아프죠. 하지만 어차피 잃어버려야 할 돈이면, 지금 돈을 잃어버리는 게 2년이나 3년 뒤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습니까?

정호준의 되물음에 강현태는 추궁을 이어 가지 못했다. 정호준의 논리는 합리적이었다.

이직해서 월급을 주는 통장이 틀린 경우가 아닌 이상, 보통 한 번 주거래 은행을 정하면 그 뒤로 다른 은행을 이용하는 일은 드물다. 금리를 민감하게 따지며 주거래 은행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드문 일이었다. 낮은 금리를 이유로 삼기에는 시중 은행에서 지급하는 금리는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파산한 저축은행들은 모두 제2금융권에서 속해 있다는 이유로 시중 은행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공했다. 이 말은 즉 금리를 이유로 주거래 은행을 바꿀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진정되고 냉정을 되찾을 때까지 제가 듣게 될 원망은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그때 제가 이야기해 드렸잖습니까? 강현태 의원님의 자리는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자리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라고. 아마 곧 청문회가 열릴 겁니다.

“청문회요?”

-정부나 여당에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저축은행 11개나 파산한 이 상황이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책임을 어떻게든 줄이고 원망을 다른 쪽으로 돌려야 하니, 분명 청문회를 열 겁니다.

강현태의 머릿속에는 여당 측 의원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그려졌다.

-지금껏 만든 이미지대로 공정과 상식,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자리를 내려놓으란 말을 하시는 겁니까?”

-예. 한껏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 주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시죠.

대한민국을 위해, 서민 경제를 위해 올바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듯 책임을 짊어지고 직을 그만두는 강현태를 보며 동정심이 쏠릴 거고, 그 외에도 강현태의 이름을 되새기게 될 거다.

-2011년이나 2012년에 큰 자리가 하나 날 겁니다. 지금처럼 국민의 자산을 지키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이어 가면서, 2년 정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해 약자를 도와주는 이미지를 굳혀 주세요.

“2011년이나 12년에 큰 자리가 날 거라는 걸 대표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미래를 보고 와서 안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정호준은 강현태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공수표를 던졌다.

-JHJ Capital 대표로서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만약 자리가 안 나면 미국에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녹음하셔도 좋습니다.

녹음해도 된다는 데 안 할 사람은 없다. 강현태는 녹음 버튼을 눌러 정호준의 공수표를 녹음했다. 구두 계약이라도 증거가 있으면 법적인 효력이 존재했기에 공수표는 보증수표로 변했고, 그날의 통화는 청문회를 잘 준비하라는 말을 끝으로 끝이 났다.

* * *

권리는 책임을 동반함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는 건 즐거워해도 뒤따르는 책임은 부담스러워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치로 넘어가면 이러한 경향이 특히 심했다.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뉜 운영 체제에서 입법과 행정 두 곳에서 막대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김명호 정부와 집권 여당(그것도 슈퍼 여당이 된 보수당)은 부율경저축은행의 분식회계와 파산, 뱅크런의 연쇄, 잇따른 저축은행의 파산 등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의무는 결국 다음 총선이나 대선에서 자신들의 표를 깎아 먹는 원흉이 될 것이기에, 화살이 자신들에게 쏠리기 전에 어떻게든 시선을 책임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언론에 협조를 구했다.

정호준의 말마따나 부율경저축은행과 관계를 맺은 걸로 파악된 이들을 추궁하고자 청문회를 개최했다.

청문회를 개최하는 것까지는 김명호와 보수당의 의견이 일치했는데, 청문회에 참석시킬 명단을 가지고 처음으로 의견이 갈렸다.

“대통령님 청문회에 강현태 의원을 부르는 건, 괜히 사서 무리한 상황을 만드는 겁니다.”

“나는 강현태 의원이 언론에 공론화하기보다 정부와의 협력을 선택했다면 이 사태가 좀 더 적은 피해로 끝났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불러다 이쪽 방향으로 추궁하시죠. 언론에도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강현태를 청문회장에 불러들이는 건 김명호 나름의 복수였다.

정호준의 방해 때문에 4대강 정비 사업을 낙동강 정비 사업으로 대폭 축소했던 김명호는 지역감정을 이유로 전라도 영산강까지 사업을 확대할 계획을 실행 중에 있었다. 저축은행의 잇따른 파산은 사업 확대 계획의 나가리를 의미했다.

손해를 볼 위험이 높아서 이미 수정됐던 계획을 금융권에서 위기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진행한다? 건수를 노리고 있는 야당에게 먹이를 주는 꼴이란 걸 모를 정도로 김명호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감히 내 계획을 방해해? 정호준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내가 확실하게 발목 잡아 준다.’

자신의 행보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철퇴를 내렸다는 걸로 유명했던 김명호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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