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18)
정호준이 건네준 리포트는 정치, 경제, 세계 경제, 안보, 국가 간의 이해관계 등을 모두 고려해 만들어진 터라 감탄사가 절로 나올 퀄리티를 보였지만, 오리하와 백악관 핵심 관계자들은 한 가지 아이러니를 발견했다.
‘말의 앞뒤가 안 맞는데?’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길 추천한다면서 셰일오일 개발은 막지 않는다. 셰일오일 채굴 기술의 발전으로 셰일오일을 뽑아내도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된다면 수출로 이어지고 사우디와 치킨게임을 벌이게 될 거라고 예측해 놓고 분쟁 거리 자체를 차단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제 와서 정부가 메이저 정유사들의 기술 개발을 막을 수단도 없지만, 그래도 개발을 중지하거나 다른 방도를 권하지 않은 정호준의 리포트에 모순을 느꼈다.
정호준이 셰일오일 기술 개발을 막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호준이 셰일오일 혁명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정호준은 미국 내에 위치한 셰일오일 매장 지역(텍사스 사막 울프캠프, 델라웨어 소분지, 델라웨어 소분지 주변 퍼미안 대분지)과 멕시코, 아르헨티나에 위치한 네우켄 분지의 바카 무에르타, Eagle Ford 셰일지대를 선점해 두었다.
‘셰일오일 기술 개발은 내게 있어서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막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셰일 유전 지역 몇 곳을 선점하고 있는 정호준은 셰일오일이 경쟁력을 갖기를 간절히 갈구하는 이였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긴 해.’
아무리 핸드폰을 잘 만들고, 자동차를 잘 만들고, 반도체를 잘 만들어 봐야 땅에서 기름 나는 것만 못한 게 21세기의 슬픈 현실이다. 정호준이 주식과 선물, CDS를 통해 2,90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자산을 소유하게 됐지만. 정호준도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셰일 유전 하나당 0 하나가 더 붙을 테니까.’
물론 산유국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존재했다.
기름을 퍼 올려 팔기만 해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다 보니 기간 산업에 대한 투자가 소홀해지거나, 본인들의 기술로 원유를 퍼 올리지 못해 타국의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최고의 캐시카우, 유전을 믿고 국채를 발행하거나 큰돈을 빌려 사업을 진행했다가 유가가 폭락해 나락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존재했다.
특히 유전 채굴이라는 게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과 달리 노동력을 크게 필요치 않은 일이라 제조업과 달리 별다른 고용을 창출시키지 못한다. 원유를 채굴하는 회사가 국가 소유의 공기업이라면 소득이 국가 소득으로 잡히고 국가 예산에 포함되게 되지만, 만약 사기업이 원유 채굴권을 독식한다면 공기업이 유전을 쥐고 있을 때보다 더 부가 한쪽으로만 쏠리게 된다.
국가를 살찌우나, 기업을 살찌우나 똑같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업이 살찌는 것보다는 국가가 살찌는 게 낫다. 국가에 돈이 많을 경우 복지라는 명목하에 무언가 지급되게 되니 말이다.
유전이 가져다주던 달콤함 속에 숨겨진 사회 부조리 탓에 무너진 국가들을 보며 전문가들은 자원의 저주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그래도 세계에 존재하는 나라들은 모두 제 국토에서 석유가 나오기를 바라면 바란다.
정호준이 1회차 때 나고 자랐던 한국 또한 신세를 한탄하거나 대단함을 어필할 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가?
중동의 왕가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조금만 있으면 정호준도 막대한 유전의 주인이 되리라.
‘물론 나는 사우디와 치킨게임을 벌일 생각이 없지만 말이지.’
당장 돈이 간절하게 필요한 것도 아닌데, 사우디아라비아와 메이저 정유사들의 치킨게임에 끼어들어서 싼값에 기름을 팔 이유는 없다.
정호준은 셰일오일을 파내는 정유사들을 망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우디가 물러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격 경쟁이 끝나고 유가가 오르면 그때 유전 채굴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 * *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라고, 찰스 주니어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정호준의 저택을 방문했다. 정호준 부부와 저녁을 함께하고(재단 일이나 정호준의 회사 일 때문에 한 사람이 함께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한 뒤 귀가하는 게 보통 주니어의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일과를 진행하게 되었다.
“식사 후에 잠깐 서재에서 티타임을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리아가 바빠 사위와 단둘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정호준이 주니어에게 도움을 구할 게 있다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야기했던 대로 정호준은 서재로 이동해 차를 마시며 잠깐 소화를 시킨 뒤 용건을 꺼내 들었다.
“자금이 필요합니다.”
“자금 융통이 필요하다고?! 자네가?!”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정호준이 CDS를 매각하여 얻은 막대한 수익을 기억하고 있던 주니어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주식, 부동산, 실물자산을 사들이는 데 대부분의 자금을 썼습니다. 처음 세운 계획대로 투자를 마무리하기 위해선 자금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에릭 버펫의 권유를 받아 BA와 골드만에 투자한 걸 포함하면 JHJ Capital이 미국 주식 투자한 금액은 약 1,350억 달러, 그리고 한국 주식에 투자한 돈은 모두 합쳐 170억 달러가 조금 못 됐다. JHJ Capital은 주식 투자에만 1,520억 달러를 사용했다.
그리고 부동산 경매팀이 사용한 돈은 약 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밴쿠버 부동산 매입팀에도 따로 150억 달러를 추가로 쥐여 주었으니 부동산 시장에도 650억 달러를 풀었다.
전범 기업으로 유명한 미츠바시와 미츠이나 은행에게 CDS를 매각하고 받은 357억 달러 중 124억 9,500만 달러도 일본 엔화로 환전되어 있는 상태였다. 5년 동안 돈을 환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서 정호준은 그 돈을 본인의 마음대로 빼지도 못했다.
실물자산 매입팀이 사용한 금액과 재단에 쥐여 준 돈, 은행 인수에 사용된 돈까지 전부 차감하면 이제 돈은 400억 달러밖에 안 남았다. 400억 달러도 ‘밖에’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기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큰돈이긴 했지만.
그래도 정호준이 처음 세운 계획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조금 많이 모자란 돈이었다.
‘최소 배는 있어야 해.’
“JHJ Capital이 가진 부동산을 담보로 400억 달러를 대출받고 싶습니다. 금리는 최대한 싸게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자네의 부탁은 최대한 금리를 낮게 잡아 주길 원한다는 거군.”
“부끄럽습니다.”
조금 쪼잔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렇게 잠깐 수치스럽고 금리를 낮출 수 있다면 이득이다.
사실 정호준은 장인인 주니어를 통하지 않고 유니버셜 뱅크에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었다. JHJ Capital은 유니버셜 뱅크 전체 지분 중 약 7할에 달하는 지분을 보유 중인 만큼 금리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언제든 수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유니버셜 뱅크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지.’
부도덕적이라고 손가락질받고 여론몰이 등을 당해 상황이 최악으로 다다르면 예금주들의 변심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기와 한 장 아끼다가 대들보가 썩는 꼴이지.’
그래서 유니버셜 뱅크를 이용하지 않고 장인인 주니어를 찾은 거다.
“DT에 이야기해 놓겠네.”
사위 사랑은 장인이라고, 주니어는 정호준의 요청을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
장인인 주니어의 도움으로 정호준은 400억 달러를 본래보다 1.6% 싼 금리로 대출받았다. 1년에 이자로 내야 할 돈을 약 6억 달러 이상 절약한 셈이었다.
* * *
140불까지 올라갔던 유가는 모기지론 디폴트의 여파로 전 세계가 경기 침체에 빠지자 빠르게 하락했다. 유가가 얼마나 급격하게 빠졌는지는 140불이었던 유가가 50불 언저리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었다.
작업장을 돌리는 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정호준은 6월 초, 더 정확히는 쉬는 날인 6월 6일에 선물 담당팀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호준의 부름을 받고 모인 선물팀 중에는 COO인 조나단 또한 자리해 있었고, 조나단이 대표로 정호준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조나단 씨. 노아는 학교생활 잘하고 있나요?”
“가정에 신경 쓸 수 있게, 일을 좀 줄여주시면서 물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건 다 능력껏 조나단 COO가 사표를 내는 것 또한 방법입니다만?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하세요. 조나단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우리 회사에 수두룩할 테니까요.”
“하하하, 사표라뇨? JHJ에 뼈를 묻어도 모자랄 판인데요. 대표님께서 돈이라는 최고의 복지를 신경 써 주시고 있는 만큼 노아는 사고 안 치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조나단은 정직하고 믿을 만해서 뽑았을 뿐 위트나 능력은 조금 부족했던 남자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능력도 능력이지만 꽤 많이 능글맞아졌다. 정호준에게 가족이 생기고 한국에 다녀오느라 사담을 나눌 시간이 마땅치 않았던 만큼 정호준은 오랜만에 조나단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몇 차례 더 대화가 오간 뒤에야 정호준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바쁜 사람들 잔뜩 불러 놓고 사담을 나눴네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는 WTI 원유 선물로 돈을 조금 굴려 보기 위해서입니다.”
정호준의 입에서 용건이 나오자마자 자리에 모인 직원들은 흥미가 담긴 얼굴로 정호준을 바라봤다. CDS로 벌어들인 소득과 관련해서는 아직 세금을 내지 않았다. 네바다주와 버진 아일랜드 등에 법인을 세워 절세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챙겨 먹었지만, 그래도 수백조를 벌어들인 만큼 소득세로 내야 할 세금이 막대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자뻑 같아서 부끄럽지만, 나와 회사의 이름값이 너무 커졌습니다. JHJ Captial의 이름으로 투자를 진행하면 이목이 집중될 게 뻔하겠죠. 그래서 돈을 조각내고 유령회사를 경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도쿄, 뉴델리, 런던, 파리, 베를린, 홍콩에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유가 선물투자를 진행해 주세요. 투입할 자금은 60억 달러입니다. 공평하게 잘라내시죠.”
“포지션을 따로 잡을 생각이십니까?”
조나단의 질문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풋 포지션을 잡을 생각입니다.”
스윽!
자리에 모인 트레이더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고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유가 폭락이 끝나고 다시금 유가가 오르는 추세입니다. 풋 포지션이 아니라 콜 포지션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발언권을 획득한 여성 트레이더는 이번에 새롭게 JHJ Capital에 입사한 사람인지 정호준의 방향 제시에 토를 달았다. 나름 합리적인 논리로 무장한 것 같지만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방향은 제가 정합니다. 책임도 제가 지고요. 우리는 풋 포지션을 잡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