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12화 (212/335)

212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12)

전용기를 타고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당도한 정호준은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경호팀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려 할 때 정호준의 발걸음을 붙잡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정호준의 앞을 막은 이는 자리가 자리인 만큼, CIA 포함 정보기관의 국장 외에도 선이 닿는 고위 인사들에게 돈을 챙겨 주며 친분을 쌓아 온 정호준의 눈에 익숙한 이였다. 해밀턴은 CIA에서 본인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이로 임무나 사고로 죽거나 비리에 연루되지 않는 한 오래 자리를 유지할 남자였다.

“해밀턴 요원이 어쩐 일입니까?”

“CIA에 새로운 국장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정 대표님과 짧게나마 미팅을 갖길 원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공화당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가 민주당으로 갈아탄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시죠, 아마?”

신임 국장의 이름은 리온 에드워드 페트. 1회차 시절 한때나마 소식을 들었던 남자다. 군 경력을 제외하면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없어 잡음이 꽤 생겨났다.

‘정치인으로서 완전 초짜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지.’

신임 국장 리온 에드워드 페트는 힐링턴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고,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을 갈아탄 만큼 정치적으로 민주당이 더 낫다는 증거가 되어 주는 남자였다. 당사자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1회차 때 정호준이 리온 에드워드 페트를 알게 된 이유는 2014년에 그가 출간한 회고록 때문이었다.

‘만약 북한이 남침할 경우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생각이었다지?’

리온 에드워드 페트가 회고록에 적은 내용이 진실인지, 책을 팔아먹기 위해 자극적인 내용을 담은 건지는 정호준이 그 당시 미국 정계와 연관이 없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핵심 인사가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해 줬기에 한국에서는 한때나마 그의 회고록이 이슈가 됐었다.

“경호팀과 함께해도 된다면 잠깐 시간을 낼 수 있겠네요.”

JHJ Capital이 미국 금융업계에서 한 자리 차지한 만큼 목숨을 위협하거나 협박을 가하지는 않겠지만 세상만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물론입니다. 무례한 요청임에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건 달린 정호준의 수락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정호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제게 이런 요청을 한 게 해밀턴 요원이니까, 시간을 내드리는 겁니다.”

“영광입니다.”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며 정호준은 해밀턴의 안내를 받아 페트 국장이 머물고 있다는 공항 VIP실로 향했다.

* * *

해밀턴의 안내를 받아 경호팀과 함께 VIP실에 들어선 정호준을 보며 살짝 당나귀 상의 노인 페트는 정호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CIA 국장 리온 에드워드 페트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접견을 요청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시는 분에게 잠깐의 시간이야 언제든 내드릴 수 있죠.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국장 취임 축하드립니다. 따로 축하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요즘 제가 너무 바빴네요.”

오리하 행정부에 의해 CIA 국장으로 임명됐지만, 눈앞의 남자는 오리하의 사람이라기보단 클라라 힐링턴의 사람이라 보는 게 맞았다.

‘민주당 출신이면서 자신을 임명해 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을 상대로 개기곤 했지.’

경선에서 승리한 릭 오리하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가 대통령의 권좌에 앉았지만, 한국의 김명호와 박정혜의 관계처럼 오리하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릭 오리하와 클라라 힐링턴은 민주당 내 영향력을 놓고 정치적으로 다툼을 벌였다.

리온 에드워드 페트는 클라라 힐링턴에게 줄을 댔는지 이후 국방장관직을 역임하다 물러나기 전까지 오리하와 종종 대립각을 세웠다.

“이번에 한국에 큰돈을 투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이번 한국행의 목적이 한국 주식 매입이었습니다.”

“CIA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200억 달러 안팎이더군요. 조금 과한 투자였던 것 같습니다.”

외환은행 지분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4조 원은 JHJ Capital의 자산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유니버셜 뱅크의 자금만 사용해서 인수한 거라 주식시장에 쏟아부은 돈은 200억 달러에 못 미치겠지만, 어쨌든 후진국의 1년 예산보다 더 많은 돈임은 분명했다.

“미국 주식이 저평가됐다고 판단해 주식시장에 1,200억 달러를 풀었던 것처럼, 한국 주식도 저점이라 생각해서 사들였을 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추궁하는 듯한 뉘앙스에 정호준의 반응 또한 날카로워졌다.

“정호준 대표님께서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조국인 미국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듣고 싶습니다.”

전임 국장이나 CIA의 요원들로부터 정호준이 미국에 우호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전해 들었지만 리온 에드워드 페트는 남에게 전해 들은 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 남자가 가진 게 너무 많다.’

모기지론 디폴트 사태가 벌어지기 전의 정호준과 그 후의 정호준은 다른 차원에서 노는 사람이었다.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 돈을 쏟아부어 가진 현금을 소모하긴 했지만 어쨌든 막대한 개인 자산과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은행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호준 대표가 사들인 주식도 문제야.’

위기가 진정되고 경기가 호황으로 돌아서면 정호준이 위기를 틈타 사들인 주식과 부동산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를 것이다. 포보스 선정 세계 최고 부자라고 일컬어지는 지금보다 더 큰 거물이 되리라.

그런 거물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저 전임자나 타인의 말만 전해 듣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본인이 직접 만나 두 눈과 귀로 확인해야 할 사안이었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냐라. 미국이란 국적을 획득하기 전까지 조국이었던 만큼 한국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대표님의 이득이나 미국의 이익과 대치된다면요?”

“되도록 함께 이득을 보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죠. 하지만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저는 저의 이득을 최우선 순위로 둘 겁니다. 그다음이 미국의 이익, 한국은 세 번째 정도 되겠네요.”

리온 에드워드 페트는 정호준의 말이 의례상 하는 소리인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를 파헤치기 위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러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정호준은 기죽지 않고 입을 계속 놀렸다.

“저는 미국이 손에 쥔 패권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정호준의 대답에 페트의 눈에 의문이 서렸고, 정호준은 페트 국장이 묻지 않았음에도 입을 열어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중국과 서유럽, 러시아, 일본의 금융회사들과 체결한 스와프 계약을 청산하고 무사히 돈을 받아 낼 수 있었던 게, 제 뒤에 있는 미국의 덕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정호준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면 중국과 일본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정호준의 몫을 줄였을 거고, 정호준이 조 단위 손해를 입어도 한국은 별다른 힘을 써 주지 못했으리라.

‘중국이란 거대한 시장 때문에 눈치를 보다가 그저 나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해 주길 바란다며 끝냈을 거야.’

패권국인 미국을 등에 업고 베팅을 하니 별다른 협박을 받지 않고 순조로이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미국이 국력이 굳건하게 유지되면 될수록 저의 안전과 제가 가지게 될 것이 보장될 테니까요.”

정호준이 진심이고 정호준의 말은 논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기에 리온 에드워드 페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를 것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미국을 위해서였잖습니까? 한 사람의 미국 국민으로서 이해해야죠.”

페트 국정의 깜짝 방문은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한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닌, 미국이란 국가를 위한 행동이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국가를 우선시하는 게 조금 안 어울리긴 했으나.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국가를 강조하는 한국이었기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불법과 비리를 포함한 모든 일을 벌일 준비가 된 한국의 정치인들을 떠올리면 페트 국장 같은 사람이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면, 전임 국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제 안위에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만나는 자리에서 선물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만남을 마치고 나오면서 비서실에 페트 국장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 * *

CIA 신임 국장과의 미팅이라는 깜짝 이벤트를 마치고 시카고 저택으로 복귀한 정호준은 집에서 줄리우와 헤리나를 돌보며 휴식을 취했다. 반면 한국에서 느긋하게 지냈던 아리아는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잘 다녀와요. 엄마 조심히 다녀오세요 해야지!”

재단 운영이 본격화됨에 따라 지원할 아이들을 선별하고 만나러 다니느라 바빴다. 바쁘디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으나 아리아는 힘들다는 소리, 아쉬운 소리를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다.

정호준이 시카고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찰스 주니어가 저택으로 놀러 왔다.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라더니 애정이 뜨겁기 그지없었다.

“아리아를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까지 함께 놀아 준 뒤 티타임을 가질 무렵, 찰스 주니어가 정호준을 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신경 써 주다뇨? 재단 운영 경험이 없고 손이 부족한 저를 아리아가 도와주고 있는 거죠.”

“발뺌하지 말게. 그 아이가 도박장에 가서 돈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재단이 계속 운영될 수 있게 만들어 줬잖은가?”

정호준은 20억 달러를 자본금 삼아 설립한 JHJ 재단으로 배당금의 일부가 흘러 들어가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전부가 아닌 일부만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재단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하나둘 경제 활동을 시작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면,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남들에게 베풀고자 하는 선한 이들의 도움으로 재단이 운영될 수 있지만, 초기에는 돈 나갈 곳투성이인 사업이었다.

아리아가 돈을 굴리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 모르겠으나 그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렇기에 정호준은 재단에 또 하나의 고정수입원을 만들어 주었다. 맨해튼, LA,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마이애미, 시카고에서 경매로 낙찰받은 건물 중 S급으로 분류된 것과 A급으로 분류된 것을 도시별로 하나씩 재단 명의로 돌렸다.

“재단을 운영할 마음을 먹고 시작한 건데, 당연히 뼈대를 갖춰야죠. 그리고 부부가 서로의 일을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정략결혼을 한 당사자들이 간혹 서로 잘 맞아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는 경우도 종종 존재하긴 하지만, 태반 이상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게 현실이었다. 가문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아 정략결혼을 시켰지만, 정략결혼 후에도 행복하게 잘 살아 주고, 아리아를 보살펴 주는 게, 주니어는 아비 된 입장에서 정말 고마웠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잖나. 아시아권에서는 고개를 숙여서 감사 인사를 표한다지? 정말 고맙네. 지금처럼 우리 딸을 행복하게 해 주게.”

고개까지 숙여 가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주니어의 행동에 정호준은 자기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부담 갖지 말고 이야기하게. 내 힘이 닿는 선에서는 흔쾌히 도와줄 테니까. 빚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먼저 말했잖나, 부부끼리 돕는 게 당연한 거라고. 내 딸, 내 사위, 내 손주들을 돕는 것도 장인 된 입장에서, 그리고 할애비 된 도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몫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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