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03)
선의로 한 일들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불러오는 건 아니다.
오성전자가 쓸데없는 노력을 하다가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는 걸 안타깝게 여겨, 선택과 역량을 집중시켜 시간을 아끼고 협상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을 쟁취하길 희망해 조심스럽게 조언한 건데.
후계자인 김진용은 아예 감정이 상했음을 드러내며 반발했고, 김건희 회장 또한 정호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건 없지만. 그래도 아쉽네.’
1년 이상의 세월을 쏟아부으며 준비 중인 일을 실패할 거라고 단정 지으면 누구든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한 거다. 이해는 했다.
‘구골의 이득은 주가 상승으로 이어질 테니 크게 아쉬울 건 없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
한국인인 채로 살았던 생애에서 비롯된 감정이 오성이 헛심과 시간을 소모하는 게 안타깝다고 여겼지만, 그 외에도 아쉬운 건 있었다. 주가 상승과 함께 배당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노려볼 수 있는 오성전자와 달리 구골은 배당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다.
‘원하는 걸 모두 충족시킨다는 건 욕심이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호준은 김건희와 김진용의 반응 등을 되새기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 * *
오성가의 저택에 찾아가 식사를 대접받고 투자 기법부터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돌아온 정호준은 자신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언론들에게 그 사실을 직접 흘렸고, 한국의 언론사들은 당연히 정호준이 흘린 정보를 좋다고 주워 먹었다.
[한국계 에릭 버펫 정호준, 오성그룹 회장 김명호와 식사.]
[에릭 버펫과의 식사? No 정호준과의 식사.]
정호준은 JHJ Capital이 설립한 재단에 기부금 150만 달러를 입금하는 것으로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정보를 알리며, 이미 오성의 김건희 회장이 값을 지불하고 식사 자리를 함께했음을 홍보했다.
자기 PR의 시대인 만큼 본인이 직접 나서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린 거였고 항상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것 또한 강조했다.
[JHJ Capital, 정호준 대표 1개월 체류!]
5월 초에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것임을 확실하게 밝혔다.
⌎끼니 한번 같이 먹고 강남 아파트 한 채를 받아 가네. 성공하면 개소리도 명언이 된다는 말의 확장판이구나.
⌎이미 에릭 버펫은 하고 있던 일이군요. 취지는 정말 좋은데, 본인이 소유한 재단이고 운영을 마누라가 하는 게, 사기꾼에게 돈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네요.
⌎함께 밥 먹으면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고 20억을 지불해야 한다니, 김건희 회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이해가 안 되네.
⌎내 말이 그 말임. 정호준도 김건희랑 만나면 분명 얻어 갈 게 있을 텐데, 서로 윈윈하는 만남에 무슨 돈까지 내야 함?
⌎참 쓸데없는 걱정하는 놈들이 많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니까 쓰는 거겠지. 재벌들이 회삿돈을 자기 돈처럼 쓰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한테 쓸 때지, 남한테 쓸 때는 쓸데없는 돈을 쓰진 않거든. 재벌 걱정하지 말고 본인들 인생이나 걱정해.
그저 막연하게 부러워하는 이, 돈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며 비난하는 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며 정호준이나 김건희를 쉴드 쳐 주는 이 등 다양한 반응이 넷상에 돌아다녔다.
그런데 정호준 개인을 다루는 기사 외에도 JHJ Capital에 행보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 주식시장에 풀린 자금의 주인은 JHJ Capital]
[JHJ Capital Korea. 대주주 공시!]
한국이 정한 법에 따라 JHJ Capital은 전체 발행 주식의 5%를 넘게 소유한 종목들에 한해 본인이 대주주임을 공지했고,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고 국민들에게 전했다. 다만 5%를 소유한 뒤에도 주식 매입은 그만두지 않고 꾸준하게 이어 갔다.
주식을 꾸준하게 매입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존재했는데, 첫째는 다 알다시피 더 큰돈을 벌기 위해서다. 미국 모기지론 디폴트 여파로 코스피가 떡락할 대로 떡락한 상황이다. 이 말은 즉 한국 기업들이 저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주식을 사들이는 게 그만큼 더 많은 돈을 가져다줄 거다.
첫 번째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두 번째도 돈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은성과 미래자동차 오너 가문이 그들 마음대로 물적분할을 진행하는 것을 막아 괜히 자산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인들과 재벌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로비가 합법인 미국처럼 대놓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난 왜 그래서 더 질이 나쁜 것처럼 느껴질까?’
물적분할이 범국민적인 이슈로 떠오르지 않는 이상, 정치인들은 결코 물적분할에 제제를 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리라. 적어도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적분할이 오너 일가가 원한다고 무조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법으로 물적분할을 금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너가 원하면 언제든 물적분할을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적분할은 주주들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그것도 주주의 3분의 1 이상이 참석한 주주총회에서 지분 3분의 2 이상이 물적분할에 찬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제약을 활용하기 위해 정호준은 지분을 20%씩을 확보하고자 했다.
‘내가 직접 다 챙길 필요도 없잖아?’
본인이 직접 가진 않더라도 대리인을 주총에 꼬박꼬박 참석하시키면 기습적으로 안건을 발의해 졸속으로 통과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20%로도 부족하면 언론몰이를 하면 되지.’
말이란 누가 뱉었냐에 따라 가져오는 파급력이 달라진다. 평범한(?) 5급 공무원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1회차 때와 달리 정호준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이였다. 지분이 조금 모자라도 소액주주(개미)들을 움직이면 분명 물적분할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JHJ Capital은 오성전자, 미래자동차처럼 수출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고 성장 가능성이 존재해 주가가 좀 더 오를 여력이 충분한 기업들에 투자했고, 1회차 때 장기 투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리 없이 강했던 은성생활건강에도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한국의 철강의 자존심 포스틸과 한국 IT의 선두주자 인터넷 포탈 사이트 미에버의 모회사 MHL 주식에도 돈을 투자했다.
하지만 성공할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당장 은성화학에 돈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성공하려면 시간이 아직 많이 필요하니까.’
은성화학은 지금 사들여 봐야 주가 상승이나 배당으로 재미를 보지 못하는 종목이었다.
[JHJ Capital 대주주 공시와 함께 반등한 코스피!!]
언론을 통해 정호준이 코스피에 돈을 투자했다는 게 알려지자마자 JHJ Capital Korea가 들고 있는 종목들은 모두 급등을 시작했고, 코스피도 반등을 시작했다. 심심하면 사이드카 걸리던 상황이 진정됐을 뿐 확실한 회복세에 올라타지 못했던 현재 한국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놨다. 떠나갔던 외국인들이 하나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
사이드카를 발동시키고 정부가 추가로 금융적인 조치를 취하며 난리 블루스를 쳐도 외국인들이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해 하락했던 코스피가 정호준이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 상한가를 친 걸 보며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포함한 한국 사람들은 깨달았다.
외국인들이 지금 JHJ Capital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우리가 정호준을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한국인들은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자국 출신들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며 떠받들면서도, 본래 그들이 받고 있는 평가보다는 저평가하려는 듯한 모습을 은연중에 보인다.
정호준을 보는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발도상국의 1년 예산보다 더 많은 자산을 가진 것 자체는 분명 대단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내리깔았다. 산업체를 운영 중인 기업들과 달리 고용 쪽으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는 작을 거라고 말이다.
‘사회에 영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세계 금융을 움직이고 있었어.’
정호준이 투자한 것만으로도 자국에 호재가 되는 상황에 기뻐하면서도 정호준이라는 큰 인물의 국적이 한국이 아닌 미국임을 아쉬워했다.
* * *
대한민국 최고 기업인 오성이 스타트를 끊어 준 덕분에 150만 달러를 지불해서라도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는 사람이 하나둘 연락을 취해 왔다.
은성그룹과 은성그룹에서 독립한 SG, KS, 미래자동차, 미래중공업, 대화 같은 대기업들에게는 모두 연락이 왔고 명동 사채바닥에서도 연락이 왔다.
‘은행 쪽에서 사람이 찾아오지 않은 게 조금 의외네.’
정호준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정호준이 이룩한 것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인지 가장 잘 알 법한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정호준에게 연락이 없었다.
돈이 입금된 순서대로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만났다. 정호준이 딱히 관심이 없는 분야인 대화 그룹이나 KS 그룹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그저 투자철학과 중국을 어떻게 엮었고 돈을 어떻게 받아 냈는지 등의 썰을 풀었다.
은성 그룹 고분호 회장을 만났을 때는 오성 그룹에서 했던 말들을 똑같이 해 주었고, 추가로 1995년부터 은성화학에 돈을 쏟아부으며 배터리 기술을 발전시킨 고분호 회장의 안목과 뚝심을 치켜세워 주었다.
“당장 전기차로 트랜드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세계의 관심은 친환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은성화학 또한 커질 겁니다.”
다만 은성그룹의 고분호 회장 역시 자체 운영체제에 대한 욕심을 놓지 못해 정호준의 충고를 흘려들었다.
“정 대표께서 저와 생각이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니, 제 부담이 덜어지는군요. 다만 운영체제는 포기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시대가 올 거라는 정호준의 컨설팅을 받아들여 1회차 EO와 달리 오성과 마찬가지로 곧장 스마트폰 개발에 들어갔지만, 오성과 마찬가지로 운영체계에 대한 욕심은 놓지 않았다.
“김건희 회장님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셨네요.”
“김 회장도 운영체제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나 보군요. 그럼 저도 포기할 수 없죠.”
정호준의 말만 믿고 운영체제 개발에서 발을 뺐는데 오성이 떡하니 운영체제를 성공적으로 도입하면 은성은 오성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익을 넘어 자존심까지 걸리게 되면서 고분호의 얼굴엔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저는 그저 옆에서 조언만 할 뿐, 책임은 없으니까요. 선택에 대한 책임은 모두 회장님들의 몫이라는 것만 마지막으로 고지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정호준은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정말 만에 하나지만, 오성과 은성이 경쟁하는 바람에 운영체제 도입이 성공할 수도 있지.’
경쟁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성전자와 은성전자가 경쟁해서 좋은 운영체제가 만들어질지 또 누가 알겠는가?
구골의 개입 없이 운영체제 도입에 성공하면 그거야말로 나비효과가 만들어 낸 한국의 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