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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02화 (202/335)

202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02)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들어 주는 기준이 소비의 유무이기에 가치를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것들은 첫 스텝, 최초 소비자의 역할은 중요했다. 아무런 가치도 없던 비트코인이 피자 한 판을 2만 개 주고 사 먹은 시점부터 최소한의 가치가 생기게 된 것처럼 말이다.

여지를 주지 않는 정호준의 행동 때문에 에릭 버펫과 만남을 갖는 것처럼 돈을 주고서라도 미팅을 원했던 김건희 회장의 니즈와 아리아에게 맡긴 재단에 또 다른 화수분을 마련해 주고 싶은 정호준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생긴 최초의 소비지만, 어쨌든 김건희 회장의 소비는 정호준과의 미팅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어 주었다.

다만 에릭 버펫이 본인이 돈을 투자한 햄버거 프랜차이즈와 음료를 식사로 제공하는 행동은 따라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모두 합쳐 셋이었다.

‘본래 후발주자는 벤치마킹하며 비슷하게 가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똑같이 하는 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투자한 버펫과 달리 정호준은 양다리를 걸쳤다. 입장 상 하나만 선택해서 밀 수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지휘나 지닌 격이 다르니 번갈아 가며 하는 홍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일정하게 홍보가 되지도 않았다.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홍보는 안 하느니만 못한 행동이었다.

‘큰돈 냈는데, 최소한 좋은 걸 먹는 자리는 가져야지.’

햄버거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먹는 것에 진심인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는 이로서 150만 달러를 받고 가진 만남에서 햄버거로 식사하는 건 너무 성의가 없다 생각했다.

첫 미팅이 고객인 김건희 회장의 저택에서 만나 돈도 받고 대접까지 받는 형태로 이뤄지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대접만 받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거지 않나. 대접하는 주체가 자신이 됐을 때 좋은 걸 먹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핏속에 남아 있는 한국인의 정이였다.

김건희와의 미팅은 김명호 정부가 주최하는 불편한 만찬 대접을 받은 날로부터 나흘 뒤인 주말로 정해졌다.

쉬는 동안 기자들이 일행 뒤로 따라붙어 불편함을 야기시켰지만 어쨌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성전자 미국법인으로부터 150만 달러 입금됐습니다.”

재단으로부터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다. 김건희 회장 명의가 아닌 오성전자 법인 명의로 돈이 입금됐다. 돈을 주는 주체가 달랐지만 정호준은 그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고 받아들였다.

‘재벌들이 회삿돈을 제 돈처럼 사용하는 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니.’

CEO 업무상 필요한 비용으로 처리될 테니, 횡령 같은 종목으로 걸릴 것도 없었다.

정호준은 아리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경호팀을 대동한 채로 김건희가 알려 준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김건희는 약속 시각에 딱 맞춰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정호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약속 시각에 딱 맞춰 도착하셨네요. 길이 많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평일에는 출퇴근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말에는 놀러 오고 놀러 가는 사람들 때문에 정체가 생기는 게 서울의 교통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길이 좀 막히긴 하더군요. 일찍 출발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서민 출신이라 전철과 버스를 타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정호준에겐 사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는 게 자가를 끌고 이동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빠르게 당도하는 방법이었다. 경호팀까지 동원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이래저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라 꾹 참았다.

예상했던 대로 차는 당연히 막혔고, 집에서 여유를 두고 나선 덕분에 겨우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정호준은 곧장 차에서 내려 벨을 누르기보단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낸 뒤에 정시 정각에 맞춰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 초대받은 건데 일찍 들어가 봐야 뻘쭘하기만 하지.’

지인에게 초대를 받았을 때 어떻게 도착하는지도 문화에 따라 양식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 늦는 건 무례였고, 5분에서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거나, 그도 아니면 시간 딱 맞춰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김건희 회장과 인사를 나눈 정호준은 1회차 때 TV를 통해 종종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정호준의 시선이 눈치챈 김건희는 황급히 부연 설명을 입에 올렸다.

“자식들의 식견을 넓혀 주었으면 해서 불렀는데, 함께 자리를 가져도 되겠습니까?”

연령에 따라 위아래를 나누는 유교 문화권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국의 기득권 세력이면서도 김건희 회장은 정호준에게 존대를 예의를 지켰다.

“예. 150만 달러나 지불하셨는데, 동석자가 문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여기는 제 아들 김진용입니다. 올해 초부터 오성전자 부사장으로 근무 중이죠.”

“김진용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인터넷에서 종종 이름 대신 진드래곤 또는 리얼 드래곤이라 불리는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보다 한 세대는 족히 위인 남자가 고개를 숙이니 정호준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영광까지야. 저야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JHJ의 정호준입니다.”

“식사는 한식으로 준비했습니다. 혹 한식이 껄끄러우시면 지금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한식이 싫을 이유가 있나요? 당연히 좋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건희의 자택에서 먹게 된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정호준이 처음 셰프를 고용할 때부터 한식도 할 줄 아는 능력자를 고용했지만 재료의 원산지나 양념에서 비롯되는 차이 때문에 셰프가 내오는 한식들은 정호준이 원했던 맛과는 조금 차이가 존재했다.

김건희의 지시로 준비된 한식을 맛있게 즐긴 정호준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김건희, 김진용과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다시 한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됐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공치사를 오간 뒤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JHJ Capital 한국법인에서 우리 오성전자의 주식을 매입하더군요. 아마 발행 주식의 5% 좀 못 미치겠죠? 아니, 5%를 이미 소지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의도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이제 곧 공지하려 했습니다.”

한국 주식시장은 발행 주식의 5%를 소유한 이에게 이를 공지하도록 법으로 정해 두었다.

“순수한 투자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김건희는 정호준이 질문을 던졌음에도 그저 경청하겠다는 듯 아무 대답 없이 정호준을 바라봤다. 대답할 기색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정호준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이번 디폴트 사태로 큰돈을 벌었고, 이번에 미국 주식시장에 꽤 큰돈을 풀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비전이 있는 기업에 한해 주식을 사들이려고 합니다. 덤으로 돈이 남으면 일본까지 생각 중이죠.”

“우리 오성전자가 비전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오성전자가 비전이 없다면 대체 한국의 어떤 기업이 비전을 보여 주겠습니까?”

재계 서열 1위 기업에 비전이 없다면 다른 기업들에는 정말 투자할 가치가 없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장님께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참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회장님께서 예측하셨던 것처럼, 반도체는 미래산업의 쌀이 될 거라 믿거든요. 메모리 반도체의 패권을 잡은 오성전자가 승승장구를 이어 갈 게 눈에 보이니, 지금 빨리 사 둬야죠.”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초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오성전자는 손해를 감수하고 치킨 게임을 벌였다. 분기마다 천억 이상의 손실을 보면서도 대만,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 가격 경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했다.

2000년대, 특히 2010년대 오성전자의 눈부신 성장은 스마트폰도 그렇지만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치킨게임을 벌여 승리한 덕분이었다. 오성전자가 한국에 적을 둔 상장사가 아닌 미국의 상장 기업이었으면 오성전자의 현재 시총의 최소 두 배, 혹은 그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았을 거다.

‘오성이 그 자리에 올라간 게 오성만의 힘은 아니지만, 어쨌건 대단한 거지.’

똑같은 돈을 쓰고 똑같은 수의 국민을 데려다 갈아도 어떤 방향을 잡았는지에 따라 발전 방향, 성장의 정도가 바뀐다. 오성의 김건희 회장은 방향을 잘 잡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위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한국의 다른 기업과 정치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융을 그저 산업이 성장하게 보필하는 도구로 봤다는 거다. 김건희가 산업에 투자할 자금을 뽑아내는 화수분 취급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쪽에도 관심을 두고 세계화를 추진했다면 ‘오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금융기업만큼은 세계 금융 쪽에서도 조금이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니 말이다.

‘물론 금융이 만만한 분야는 아니지만.’

미국이 국제 통화인 달러를 찍어 내는 패권국이기에 더 그런 감이 있긴 하지만, 결국 큰돈을 만지는 건 금융이었다. 그 사실을 금융 쪽에 종사하면서 더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라 아무래도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호준이 김건희 회장은 해낼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알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김건희가 따로 컨설팅을 요청했음에도 말이다.

“여쭤보시니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있습니다. 경쟁자에게 기술을 탈취당하는 걸 항상 경계하셔야 합니다. 오성을 포함한 한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로 산업스파이를 보내 기술을 빼 왔던 것처럼 중국 또한 한국 기업들의 기술을 빼갈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기술은 인건비를 줄여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로 국외에 공장을 짓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한국 기업들은 일본 내부에서 활동하는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탈취하기까지 했다. 중국 땅에 공장을 짓고 노동자로 부려 먹는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탈취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도둑놈에게 헛간을 맡긴 거랑 뭐가 다르겠어?’

“중국 시장에서 물건을 팔려면 중국 공산당의 요구대로 중국에도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걸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정말 중요한 기술이라 판단되는 것들은 한국에 두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정호준은 뒤이어 한 가지 충고를 더 남겼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오성 그룹이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를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날 겁니다.”

실패할 거라고 적나라하게 내뱉은 정호준의 충고는 김진용에겐 실패하라고 악담을 퍼붓는 것으로 들렸다. 그 때문에 처음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실패할 거란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90년대부터 회장님께서는 천재경영을 외치셨죠. 그런데, 운영체제는 회장님께서 필요하다고 외치신 그 천재가 어느 곳보다 더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으로 IT 인력을 키우는 미국에서조차 천재들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는 분야가 바로 운영체제입니다. 과연 오성이 해낼 수 있겠습니까?”

정호준은 현실을 알려 줄 뿐 한국의 천재를 비하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독보적인 역량을 가진 천재가 아닌 이상 천재의 역량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또 갈리게 된다. 아직 한국은 뛰어난 IT 개발자들을 배출해 낼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

독자적인 운영체제에 도전했다가 손잡기보단 처음부터 손을 잡는 게 조건 면에서 큰 양보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충고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운영체계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네요.”

운영체제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뒤에 가져다줄 과실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파악하고 있기에 김건희는 정호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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