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96화 (196/335)

196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96)

마약도 마약이지만 연예인의 성 상납, 좀 고급진 용어로 말하면 스폰이라 부르는 일이 종종 들려오곤 했는데, 스폰을 해 주는 사람을 ‘스폰서’라 불렀다.

남자 연예인도 여자 스폰서를 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주로 여성 연예인들이 돈 많은 스폰서에게 안기는 조건으로 무대, 앨범, 드라마, 영화, 명품 같은 본인이 화려한 삶과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에 관한 지원을 받았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할리우드에서도 이런 일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빈도만 놓고 보면 오히려 미국이 한국보다 더 심했다. 그도 그럴 게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한국보다 성에 대한 사고가 관대한데다 한국 연예계와 비교할 수도 없는 큰돈이 모였기 때문이다.

화려함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의 깊이와 그 추악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한테도 몇 번 제의가 왔었지.’

주로 브로커를 통하거나 소속사를 통해 스폰 제의를 보내기도 했지만 아예 당사자가 직접 스폰 제안을 보내기도 했다. 로슬러 가문에서 압박을 넣었는지 로슬러 가문의 사위가 된 후부터는 스폰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아리아와 만나는 도중까지도 스폰 제안은 종종 있었다.

‘20번은 더 왔던 거 같은데.’

동양인이라고 밑으로 내리깔아보는 사회에서 왜 그렇게 많은 스폰 제의가 왔냐고? 성 상납까지 결심했는데, 동양인에게 안기든, 흑인에게 안기든, 그도 아니면 노인에게 안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정호준에게 스폰 제안이 쏟아지는 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만큼 당연한 순리였다.

돈이 많은 것도 배우들이 정호준에게 스폰을 받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보다는 승승장구를 이어 가는 SSL Capital의 영향이 더 컸다.

정호준이 월가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것처럼 SSL Capital 또한 할리우드에서도 그러한 포지션에 위치한 상태였다.

‘SSL이 투자한 영화는 성공한다.’

‘시놉시스랑 짤막한 대본만 봐도 성공할 게 보이나?’

SSL Capital이 투자한 영화는 유명 감독이나 유명 배우가 캐스팅되어 영화가 성공한 거라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무명 감독이 연출하고 무명 배우들로만 캐스팅된 B급 영화라 생각했는데 성공을 거둔 경우도 존재했다.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갈망하는 여배우들에게는 SSL Capital의 CEO 정호준은 그들을 성공으로 끌어올려 줄 황금 동아줄이었다.

정호준에게 스폰을 받고 싶어 하는 배우들만큼이나 감독들에게도 SSL은 투자받고 싶은 기업이었다. 영상 예술의 끝판왕이라 평가받는 영화는 돈 잡아먹는 괴물이다. 상업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적어도 한화 백억 원 이상의 돈이 오간다는 말이다. 큰 성공을 거둬 자신의 제작사를 차린 감독이라 할지라도 제작비 전부를 본인의 돈으로 충당하는 일은 없었다.

영화에 정말 자신이 있는 경우,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발을 담그는 지분 투자 정도가 전부였다.

돈이 전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투자했으니 입김을 넣는 건 투자자의 권리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투자자의 과도한 참견으로 감독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영화가 나오는 사례는 한국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SSL Capital은 감독과 제작사의 작업에 그 어떤 터치를 하지 않는 투자사로 유명했고 그 사실을 카메론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금을 흔쾌히 투척하면서 그 어떤 참견도 안 하고 감독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투자사. 그래서 한 회사가 투자금 전부를 감당하겠다는 데다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거다.

믿고 사인했는데, 이렇게 신뢰를 깨트리니다니 사실 쌍욕을 박아도 카메론은 문제 될 게 없었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일단 이런 무례한 요청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정호준은 존 카메론이 직원의 안내를 받고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청했다.

“사실 처음 요청을 받았을 때만 해도 화가 많이 났습니다. JHJ Capital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가 싶어서 말이죠.”

“그럴 리가요. 저희 SSL의 돈을 받지 않았어도 감독님의 명성이라면 4억 달러의 제작비쯤은 쉽게 충당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 JHJ Capital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나왔습니다. 이런 부탁을 하게 만든 배경이 뭔가 궁금해서 말이죠.”

SSL Capital은 감독이나 제작사를 곤란하게 만들 만한 요구를 하지 않는 투자사로 유명하다. 무명 감독들에게조차 별다른 요구를 안 하는 SSL이 자신에게 이런 무리한 요청을 했다? 잠깐 끓어올랐던 분노가 사그라진 후에는 호기심이 동했다.

“완성된 대본을 받아 보고 확신했습니다. 이번 영화가 감독님의 대표적 중 하나인 ‘타이타닉호의 비극’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 거라고 말이죠. 감독님께서 세운 기록들을 감독님이 다시 깨는 전무후무한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허,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대표님이 본 건 시놉시스와 대본이 전부 아닙니까? 대본이 좋아도 영화를 뽑아내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영상미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 앞에 계신 분이 누군데, 제가 영상미를 걱정하겠습니까?”

곤란한 질문에도 은근슬쩍 카메론 감독을 띄워 줌으로써 빠져나갔는데, 정호준의 아부에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 2009년 12월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이 영화는 10년이 지나도 최고의 영화로 꼽힌다. 스토리, 영상미 모두 완벽한 차기작이 기대되면서도 기대가 되지 않는 그런 영화였다.

“그래서 감독님의 촬영팀에 사람 하나를 넣고자 한 겁니다. 이 대작을 찍는 촬영팀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 감독으로서 좋은 필모가 되어 줄 테니까요.”

“나도 내 영화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긴 하는데, 나보다도 더 확신에 찬 모습을 보니 참 기분이 묘하네요. 대체 누굴 꽂아 넣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10대가 놀고 먹어도 계속 부자일 정도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한 정호준이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아쉬운 소리를 하니 관계가 궁금해졌다.

“제 절친의 아버님이십니다.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제게 사촌보다 더 가족으로 느껴지는 분이죠. 한국에서 상업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두 작품을 출품했는데, 둘 다 수익을 내며 끝났습니다. 아예 능력이 없으면 감독님께 들이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요, 일단 그 감독이 찍었다는 영화를 한번 볼까요?”

카메론의 긍정적인 반응에 정호준은 미리 구해 둔 영문 자막이 달린 DVD를 틀었다.

DVD로 박남정이 연출한 두 영화를 감상한 카메론은 박남정과 이야기를 나눠 본 뒤 결정하겠다는 답을 주었다. 정호준은 옆방에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박남정에게 문자를 보내 방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30분 정도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박남정은 다시 옆방으로 이동했다.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꼭 데려다 써야 할 정도의 인재도 아니죠.”

부정적인 반응에 정호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 카메론의 말이 이어졌다.

“정 대표, 나한테 빚진 겁니다.”

포보스지가 왕가나 독재자를 제외하고 매긴 세계 부자 순위 1위인 정호준에게 빚을 지워 둬서 나쁠 건 없겠다는 판단으로, 카메론은 정호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최선책이라 생각한 테슬러가 안 된다면 차선책을 사용하는 게 맞았다.

정호준이 차선책으로 분류한 선택지는 총 셋. 한국의 ‘미래 자동차’, 일본의 ‘키요타 자동차’, 그리고 파산 후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SM’을 인수하는 선택지였다.

가장 먼저 ‘정부가 이런저런 악성종자를 잘라낸 SM을 인수할까?’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정호준은 이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직접 하는 건 패스하고 싶은데.’

1회차 삶에서 공무원으로 살면서 미래 자동차 노조가 틈만 나면 파업하는 것을 지켜본 입장으로서 제조업 그것도 자동차 기업을 직접 운영하는 건 여러모로 피곤함이 가득한 선택지였다.

물론 자동차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기에 당연히 전문경영인을 고용하겠지만 문제가 터지면 결국 정호준에게까지 보고가 올라올 거다.

‘문제는 반드시 터진다.’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단행하는 미래 자동차 노조 못지않게 강성노조로 악명 높은 게 미국의 자동차 노조였다. 본사를 달래면 하청이 들고일어나고, 하청을 달래면 다시 본사에서 들고일어날지도 몰랐다.

굳이 사서 수렁에 발을 디디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돈을 더 벌고 싶어서 투자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골칫거리를 사서 안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미래 자동차와 키요타 자동차인데.”

두 기업 모두 뛰어난 역량을 보유한 기업이지만 비전을 제시했을 때 그 비전을 확실하게 이행하고 성공으로 이끌 가능성은 아무래도 미래보단 키요타 쪽이 더 높았다. 북미 시장과 동남아 시장 점유율조차 키요타가 미래 자동차를 앞서고 있었다.

냉정하게 가능성만 놓고 선택을 하면 키요타를 선택해야 맞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냉정한 선택을 방해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왔지만 정호준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일본 회사를 키워 주는 게 맞는 걸까?’

자신이 제시한 방향을 제대로 밟아 나가면 그렇지 않아도 점유율에서 우위를 보이며 미래 자동차를 앞선 키요타 자동차가 더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나가 승승장구하면 다른 것들도 따라서 관심을 받는 상황은 종종 산업 현장에서 보이곤 하니, 전기자동차 시장의 점유율 덕에 하이브리드차나 본래의 업종에서 판매량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컸다.

그게 문제였다.

미래 자동차는 오성전자와 함께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회사였다.

미래 자동차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곧 미래 자동차의 하청과 벤더회사들까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거다.

‘그렇다고 미래 자동차를 밀자니 걸리는 게 너무 많아.’

2000년대 후반, 2010년대 한국은 대기업이 물적 분할을 하는데 그 어떤 장애도 없는 그런 세상이다. 2020년대조차 물적 분할이 어렵지 않게 이뤄지는데 2000년대 후반, 2010년대는 오죽하겠는가?

‘은성화학처럼 전기자동차 분야를 따로 떼서 새롭게 상장할지 누가 알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물적 분할을 진행하리라. 기껏 지분을 사들이고 투자금을 지원하고 컨설팅을 통해 방향을 잘 잡아 줘도 성공한 과실을 주주와 나누는 게 아닌 오너가가 가져가는 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그렇다고 분할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기엔 미래가나 국민연금, 미래가의 우호 지분이 보유한 주식이 너무 많았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였다.

하지만 결론은 나왔다.

“그래도 키요타보단 미래 자동차를 밀어줘야지.”

이성과 한국인의 피 사이에서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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