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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93화 (193/335)

19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93)

‘스티븐 잡스 = 엔플’이라 여기는 투자자들로 인해 천장을 모르는 것처럼 고공행진을 하던 엔플의 주가는 주춤하다가 이내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투자자라고 뭉뚱그려 묶었지만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주식을 매각한 건 기관, 펀드, 그리고 월가의 트레이더들이었다.

개미라고 아예 시장 흐름에 둔감한 건 아니다.

기관과 펀드가 시장에 주식을 매각하기 시작할 시점에는 무리더라도, 기관이나 펀드 쪽에서 물량이 풀린다는 정보는 그냥 맨땅에 해당하는 투자자가 아닌 이상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비전 있는 기업의 주식을 산 뒤 수년 동안 묵혀 두는 게 돈을 버는 장기 투자의 비법이라며, TV와 같은 매체에 나온 전문가들은 말한다. 말은 쉽지만, 정답인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걸 그대로 따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었다.

돈을 벌면 얼마나 벌었고, 돈을 잃었으면 얼마나 잃었는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게 개인 투자자들의 심정이잖은가?

큰돈을 투자하지 않는 재미로 주식 투자를 한다는 이들조차 당장 5만 원만 잃어도 속이 쓰려서 핸드폰을 살피게 된다.

경기가 안 좋다. 악재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인간의 심리였다.

잡스의 건강 이상설이 분명한 펙트임이 드러났고, 기관과 펀드에서 주식을 시장에 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Apes들도 주식을 시장에 내놨다.

‘욕심내지 말고 더 늦기 전에 나가자.’

주식을 매입한 시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할하자마자 주식을 사들인 이들은 어느 정도 이익을 본 상태였다.

개미들까지 매도에 한 손 보태니 엔플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잡스의 건강 상태를 문제 삼으며 진흙탕 구덩이로 끌어내린 정호준의 행보를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던 미라클의 창업자 로랜스 닉슨은 정호준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로랜스 닉슨은 스티븐 잡스와 달리 절차와 예의를 모두 갖췄고,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 한 방을 위해 닉슨과 회동을 갖고자 했던 정호준은 흔쾌히 닉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닉슨 씨. 주주총회 때 뵙고 처음 뵙네요. 이렇게 찾아오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바쁘잖습니까?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이사회에 직함만 올리고 있는 내가 찾아오는 게 맞습니다.”

“이사회의 의장직을 역임하고 계시면서 이사회에 이름만 올리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습니다.”

로랜스 닉슨은 자신이 창업한 미라클의 CEO 자리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한 걸 인정하고 회사를 위해 자신보다 더 경영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은 건지, 아니면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 위해 CEO 자리에서 물러난 건지, 정답은 본인만 알겠지만 말이다.

‘닉슨이 보여 온 행보를 떠올리면 개인적으로는 후자 같지만.’

자리와 감투에 연연하는 한국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사례임은 분명했다.

“원래 아쉬운 게 있는 쪽이 찾아오는 거잖습니까?”

“닉슨 씨께서 제게 아쉬운 소리를 할 건 하나밖에 없는데, 오늘 찾아오신 이유는 잡스 씨와 관련된 이야기겠군요.”

“맞습니다. 정 대표님, 이제 그만 이쯤에서 멈춰 주셨으면 합니다.”

로랜스 닉슨은 이번 사태 이후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잡스의 건강이 더 나빠졌다는 걸 개인적인 연락통을 통해 전해 들었다.

“아직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 대표는 본인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를 망가트려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잡스가 물러나면 엔플이 다시 망가질 거라 생각하죠. 그런데 저는 아닙니다.”

운과 시기가 따라 줬다지만, 뛰어난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 창업자들이 일선에서 물러나면 주가가 빠지기곤 한다. 그런데 엔플은 그러한 현상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물러나겠다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냥 건강이 나쁘다는 찌라시만으로 주가가 떨어졌고, 그러다 찌라시가 펙트인 게 확인되면 주가는 또 한 번 떨어진다.

물론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투자자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들의 생각이 아주 잘못됐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들의 염려가 무엇인지 잘 아니까요. 엔플은 이미 선례가 존재하죠.”

엔플 이사회는 스티븐 잡스와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스티븐 잡스를 쫓아냈다. 문제는 그 뒤로 엔플이 악화일로를 거듭해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거다. 그것을 잡스가 살려낸 것도 대단하고, 스마트폰으로 엔플을 다시금 초일류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도 대단하다.

하지만 잡스가 물러나는 순간 엔플이 이전과 똑같은 시나리오를 반복할 것 같다고 여기는 투자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상 그 어느 집단보다 냉철하고 냉혹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미신이나 행운 같은 의외의 것들을 믿는 이가 많은 곳도 월가였다.

그래서 잡스가 건강이 안 좋다고 할 때마다 주가가 내려간 거다. 이전의 역사를 반복할까 봐.

“저는 잡스가 CEO에서 물러났다고 예전처럼 바닥까지 갈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고, 당시와 현재의 엔플이 처한 상황도 많이 다릅니다. 잡스가 일선에서 물러나면 잠깐 흔들리기야 하겠지만, 종국에는 자리를 잡을 겁니다.”

정호준은 1회차 때 잡스 사후에도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3천조’를 넘기며 승승장구하는 엔플의 역사를 체험했다.

“기어코 잡스를 엔플에서 쫓아내겠다는 거군요.”

“예, 그리고 전 닉슨 씨가 그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엔플이 밑바닥을 찍을 때 회사를 매입해서까지 잡스를 도와주려 했던 게 바로 로랜스 닉슨이란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친구를 내쫓는데 앞장서란 정호준의 말은 닉슨을 분노하게 하기 충분한 말이었다.

“뭐? 자네 미쳤나? 나보고 잡스를 쫓아내는 일에 앞장서라고?”

분노하긴 했는지, 지금껏 존대하던 어조까지 변했고 분노가 서린 추궁이 이어졌다.

“입에서 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알아?”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 닉슨의 입에서 동양적인 표현이 나왔다. 닉슨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정호준은 잠깐이나마 놀랐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무엇이 잡스를 위하는 일인지 안다면, 나를 돕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기만 하는 닉슨의 시선을 마주한 채 정호준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CEO라는 자리가 신경 쓸 게 많고,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는 자리란 걸 닉슨 씨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CEO로 활동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결코 적지 않죠. 닉슨 씨의 요청으로 제가 스티븐 잡스를 봐준다고 해도, 잡스가 아프다는 펙트가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친우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데, 그냥 두고만 볼 생각인지 묻는 겁니다. 자신의 건강을 재물 삼아 CEO 활동을 이어 가는 스티븐 잡스를 그냥 두실 겁니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란 말이 있다. CEO로 활동하며 받는 스트레스, 피로 등이 스티븐 잡스의 건강 악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정호준은 생각했다.

정호준이 어떤 의미로 죽음을 언급했는지 이해한 닉슨은 정호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CEO 자리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닉슨 씨가 이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닉슨 씨는 CEO 자리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직을 역임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지금의 삶이 불행하십니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금 전부터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닉슨을 보며 정호준은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잡스에게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제 행위는 잡스가 시작한 공격에 대한 보복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건강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게 해 주는 거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미크로소프트의 윌리엄 게이츠에게 사과했던 것처럼 건강을 회복한 뒤 제게 찾아와 사과하면 전 언제든 다시 그에게 CEO직을 일임할 생각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체면은 분명히 세운 셈이다.

로랜스 닉슨은 생각이 많아졌는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감정에 휩쓸려 무례를 저지른 걸 사과하며 밖으로 나갔다.

로랜스 닉슨이 JHJ Capital을 방문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스티븐 잡스의 항복 선언이 나왔다.

“……건강 회복을 위해 2010년 1월 발표를 목표하고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를 끝으로 이 자리에서 물러나려 합니다. 제가 애플폰을 개발할 수 있도록 뒤에서 힘을 써 준 짐 쿡을 제 후임으로 지명하고자 합니다. 엔플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회복에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인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은퇴 날을 정해 둔 스티븐 잡스의 발표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멈칫했던 주가 또한 다시금 하락장을 맞이했다.

‘선반영됐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구나?’

잡스와 함께 진흙탕을 굴러 주가가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시점, 본래 주가에서 12불 정도 하락했을 때 정호준은 JHJ Capital 직원들에게 엔플 주식 매입을 지시했다.

“우리 JHJ Capital이 보유한 엔플 지분은 모두 합쳐서 얼마죠?”

“오늘 사들인 지분까지 합쳐 43.98%입니다.”

정호준의 지분율을 낮추고자 했던 스티븐 잡스의 바람이 무색하게 사태가 모두 마무리되고 상황이 진정세로 돌아섰을 무렵, JHJ Capital은 본래보다 더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중도파 주주들이 주식을 팔아 재낀 만큼 엔플의 지분율도 늘어났지만 말이다.

* * *

잡스의 입에서 물러나는 날짜를 받아 낸 정호준은 닉슨과의 미팅 자리에서 비서로서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던 아리아와 사담을 나누었다.

“그나저나 정말 잡스의 건강을 생각해서 쫓아낸 거예요?”

“그럴 리가요? 이야기했잖아요. 보복이라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요.”

일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아리아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 번 나빠진 사람의 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의 몸이 나빠진 이유는 단편적이지 않고 복합적이고요. 잡스는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현상 유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겁니다. 채식주의자인 그가 고기를 입에 댈지도 의문이고요.”

“그래도 어쨌건 호준이 잡스의 생명은 구한 거잖아요?”

“글쎄요? 스티븐 잡스가 닉슨 같은 유형의 인간이었다면 아리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겠지만, 잡스는 닉슨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인간이라서요.”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야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삶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잡스 같은 워커홀릭에게는 일이 없는 것 또한 지옥이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이 없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게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닉슨에게는 CEO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잡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일이 없는 상황 때문에 의욕이 저하되어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다.

“잡스의 건강이 좋아질지, 나빠질지, 현상 유지만 할지는 신만이 알겠죠.”

잡스의 건강을 잡스와 신의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정호준을 보며 아리아는 지독하다는 생각과 다행이란 생각을 함께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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