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3)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처럼, 펙트를 가지고 조지는 정호준의 발언은 오리하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참 쉽게 하는군.’
자료에 근거한 이치적으론 옳은 말이라지만 빅3 중 두 곳을 정리하라니? 그 일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부담인지 정치인이 아니라 잘 모르나 보다. 자신의 정치 생명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에 정호준의 생각을 부정하고 분노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이상하게 분노가 피어오르진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2004년 복권 당첨금을 수령한 뒤 5년 만에 10,000배 이상으로 불리며 금융업계의 한 축으로 성장한 남자다. 실패한 적도 없고 작금의 사태를 정확하게 예견한 것을 정호준은 입에서 미리 들었었기에 화를 내기보단 차분해지고 냉정해졌다,
그런 오리하의 반응을 확인하고 오리하가 속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정호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몰아쳤다.
“제 안목을 인정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 확신합니다. 정부가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돈을 쏟아붓지 않는 한 종국에는 파산하고 말 거란 걸.”
진심과 확신을 담은 확언에 오리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릭 오리하는 변호사 활동하며 소송을 맡아 관련 사항을 공부하거나 의원이 된 후로 경제에 대한 공부를 이어 갔지만, 그렇다고 관련 업계 종사자들만큼 빠삭하진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얕은 지식으로는 정호준이 건넨 보고서가 다 맞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전문가들이라면 정호준이 건넨 자료의 틀린 부분을 짚어 주리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자신이 꾸릴 오리하 행정부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반응은 오리하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SM과 벨라스키스가 파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
“당선자님, 이 분석들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정호준이 오리하에게 준 자료에는 미국 자동차노조가 만들어 낸 제도 때문에 깎인 경쟁력 외에도 온갖 펙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정호준이 건넨 자료가 나열한 펙트 중에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경쟁사 미래 자동차와 도키다 자동차의 이야기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리포트의 끝자락에는 정호준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JHJ Capital이 빅3를 인수하면 안 되는 이유!]
‘제조업 기업을 운영해 본 적 없는데, 위기 상황에 놓인 제조업 기업을 어떻게 정상화하겠는가?’와 같은 원론적인 의견을 시작으로 미국인의 정서를 언급하기도 했다.
- 미국인에게 자동차는 민감한 사안이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100년 넘게 명맥을 이어 가며 하나의 중요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역사를 언급하고 가정마다 차를 최소 한 대 이상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차를 중요시하는 미국인의 정서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민자 출신인 JHJ Capital이 끼어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거라고 적었다.
- 평범한 미국 시민조차 동양인 이민자 출신인 JHJ Capital을 탐탁지 않게 여길 텐데, 거칠기로 악명 높은 미국 자동차노조가 과연 JHJ Capital의 경영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정호준으로부터 받아 온 겁니다.”
“정호준이라면, JHJ Capital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무부를 담당할 인사 중 한 명의 물음에, 오리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JHJ가 성공을 거둔 이유가 있군요. 이렇게까지 객관적으로 날카롭게 분석을 하다니!”
본인이 인종 차별자(Racist)라는 것을 알려봐야 득이 될 건 하나도 없기에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이 수두룩한 월가에서는 인종차별 성향을 드러내는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은연중 차별이 존재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양계 이민자 출신이란 걸 언급하는 건 어떻게 스스로 본인의 치부(약점)를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약점까지도 하나의 이유로 삼는 정호준의 냉정함과 객관화에 감탄성을 내뱉는 건 물론이고, 그를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는 감정이 흘러나오자 오리하는 기침을 하며 이목을 주목시켰다.
“큼큼! 사실 저는 정호준 대표로부터 2006년 중순부터 2007년쯤 모기지론 디폴트 사태가 벌어질 거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제조 산업까지 망가지게 될 거라 언급하더군요. 정 대표가 은행을 인수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는 대가로 제조업 쪽에도 힘을 써 주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았습니다.”
“당선인님께서 JHJ Capital을 인수자로 두면 어떨까 언급하셨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군요.”
녹음된 게 아닌 이상 구두로 약속한 건 법적 구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 구두로 약속했느냐에 따라 계약서를 작성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며 구두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 세무 조사를 포함한 온갖 조사에 휘말릴 수 있게 되리라.
“물론 정 대표는 그때도 합리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전제를 붙이긴 했습니다.”
“합리적인 지원이라. 800억 달러를 쏟아부어도 망할 거라고 주장하는 JHJ Capital인데, 대체 얼마를 쏟아부어야 할까요?”
“그래서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은 겁니다. 정 대표는 나보고 SM과 벨라스키스가 파산하게 그냥 두라더군요.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없는 이상 두 기업은 가망이 없답니다.”
오리하는 파산 신청을 받고 법정 보호에 들어가라 조언한 정호준의 제안을 알렸다.
“확실히, 발목을 붙잡는 잡뱅크를 정리하려면 그게 맞긴 합니다.”
회사가 파산해 문을 닫게 되면 잡뱅크를 이어갈 이유가 없게 된다. 정호준은 SM과 벨라스키스가 파산하도록 기다린 뒤 상장을 폐지시키고, 정부의 주도하에 적자인 생산 라인을 모조리 정리해 새로운 법인으로 출범하는 것을 권했다.
정호준은 잡뱅크를 다른 부위에 전이되기도 하며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암세포에 빗대며 정리하지 않으면 결국은 회사를 멸망으로 이끌 거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디트로이트의 표는 우리에게 돌아설 겁니다.”
“예산을 쏟아붓다가 실패해도 표심은 떠날 겁니다. 예산을 쏟아부은 만큼 더 큰 약점으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정 대표도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정부의 지원이 지속돼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공화당에게 좋은 공격 거리가 될 겁니다. 그 말에는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당이 독재하는 중국이나 독재자의 거수기인 러시아 정당이 아닌 이상 예산의 규모와 사용처를 두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파산하나 나중에 망하나 디트로이트의 표는 흔들릴 수밖에 없답니다. 어차피 망할 거라면 쓸데없는 예산을 사용하다 망하는 것보다 단호하게 조치를 취하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어떻게 하는 게 맞겠습니까? 의견 있으면 말해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오리하의 물음에 자리에 참석한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표심을 거스르는 선택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지금껏 실패한 적 없고 지금 이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를 예견한 정호준 대표의 장담이라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정부가 얼마를 지원하든, 지원이 끊기는 순간 파국으로 향할 거라는 말을 어떻게 쉽사리 믿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한 사람이 이제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정호준이 아니었으면 한귀로 흘리는 걸 넘어 화를 냈을 거다.
“게다가 SM과 벨라스키스의 방종도 문제입니다. 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하는 겁니까?”
회사에서 고용하는 근로자들을 무기 삼아 무리한 지원을 입에 담는 빅2의 행태도 오리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경제 분야 전문가들은 정호준의 리포트를 칭찬하기 바빴다. 정호준의 제안이 합리적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오리하의 마음은 SM과 벨라스키스를 파산시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 * *
11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성탄절인 12월이 되었다.
아리아에게 경영을 맡긴 자선 재단 ‘JHJ 헤리아줄’은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뉴욕과 같은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무료 급식 서비스를 진행했다.
JHJ Capital 외에도 여러 자선 재단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주머니를 열었고, 정부 또한 5%의 배당금을 받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당금의 비율을 9%로 증가시키는 조건으로 재무부는 1,050억 달러의 TARP 자금을 투입해 8개 은행의 우선주를 구매했다.
정부의 이 같은 조치로 대형 은행들은 하나둘 위기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말이 정상적인 운영이지, 위기 상황 덕분에 헐값에 중소, 중견급 은행들을 집어삼켜 본래보다 한층 더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경제 위기가 어느덧 끝나가는 조짐을 보였지만 거리에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2008년은 월가가 외친 ‘탐욕은 선하다.’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해였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온 12월 19일 금요일. 정호준은 시카고가 속해 있는 일라노이주의 부주지사와 만남을 가졌다.
“처음 뵙네요. 에릭 퀸 부주지사님.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대표님께서 만남을 요청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연락을 주셨습니까?”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정호준의 말을 들은 퀸은 경청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 JHJ Capital은 시카고 트리븐을 인수하려 합니다. 부주지사님께서 조금만 도움을 주시죠.”
“그건 주지사님과 말씀하셔야 하는 사안 아닙니까?”
“내년 1월 말쯤 상원에서 주지사 탄핵안이 통과될 거 같은데, 그럼 아마 퀸 부주지사님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시겠죠. 제 말이 틀렸나요?”
2003년부터 일라노이주 주지사 블라드제비치는 부정부패로 재판을 받게 되고 2007년에 이르러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 때문에 미국 경제가 흔들리고, 2008년에는 대선까지 겹쳐 주지사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이 연기되었지만, 슬슬 상황이 진정되며 블라드제비치 주지사 탄핵안이 상원까지 올라간 상태다.
2009년 1월 말 상원에서 탄핵안에 가결되어 블라드제비치는 일라노이 주지사 중 최초로 탄핵당한 불명예를 안게 된다.
“제가 시카고 트리븐을 인수해 고용을 유지하면 주지사 자리를 공고히 하기 좋은 명분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윈윈일 겁니다.”
정호준은 2008년 12월 8일 델라웨어에서 파산 보호를 신청한 시카고 트리븐은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 신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이다.
경제 불황으로 소비자의 지갑이 닫히면서 매출이 감소한 탓에 적자가 심해진 데다 파생 상품 투자를 진행했다가 쪽박을 쳤고, 기존에 받았던 대출을 연장할 수도 없어 종국에 파산 절차를 밟게 됐지만.
개중에서도 터줏대감처럼 긴 세월 동안 시카고에서 사업을 벌인 트리븐은 일라노이주에 한정해서는 특히 큰 영향력을 가졌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군요. 시카고 트리븐이 짊어지고 있는 부채 130억 달러를 감당하실 수 있는 겁니까?”
“130억 달러를 다 감당할 거면 제가 여기서 부주지사님을 만나고 있진 않겠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 하는 말에 퀸 부주지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