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2)
빅3 CEO들은 한 번 이륙하는 데 2만 달러는 족히 소요되는 초호화 제트기를 타고 온 탓에,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들에게 한 번, 그리고 언론과 대중에게 다시 한번 조리돌림을 당했다.
욕을 먹은 것만으로 배가 찬다면 아마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을 3사지만, 빅3의 경영 위기는 계속해서 사회의 관심사가 되었다. 정확히는 빅3의 선이 닿는 언론사들을 움직여 자신들의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를 어필했다.
구제금융을 받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망할 수 있는 상황임이 언론을 통해 계속해서 알려졌다. 과장이 조금 섞이긴 했지만 빅3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는 건 분명한 펙트였다.
그도 그럴 게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로 시작된 위기 때문에 경기가 위축되면서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했다. 판매량 급감으로 재무상태가 나빠져 대출을 받아서라도 자금 경색을 회복해야 하는데, 대출을 해줘야 할 금융회사들도 디폴트 사태 때문에 하나둘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다.
제 살기도 바쁜 판국에 그 어떤 은행이 제 안위를 뒤로하고 남의 회사에 대출을 해 주겠나? 때문에 빅3는 자금 경색을 완화할 만한 자금을 끌어오지 못했다.
그냥 실적만 나빠진 정도라면 버텨도 몇 년은 버텼겠지만, 미국 국민들이 감당하지도 못할 모기지론을 통해 주택을 둘, 셋 매입하고 금융회사들이 파생 상품을 마구잡이 찍어 냈던 것처럼, 빅3도 회사에 금융투자 부서를 만들어 모기지론을 기초자산으로 삼는 파생 상품들에 투자했다가 크나큰 실패를 맛봤다.
게다가 미국에서 시행된 자동차 할부 판매의 24% 상당이 주택채권과 연계되어 있었다.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상태이니, 다른 업계보다 재무 구조가 더 빠르게 악화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빠르게 나빠지는 재무 구조 탓에 바닥을 찍은 주가는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빅3는 구제금융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빅3에게 구제금융을 해 주느냐 마느냐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뉴먼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주류 의원들은 빅3가 파산하더라도 구제금융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들도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표를 생각해서 구제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이미 선거는 민주당 릭 오리하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금융 지원을 해도 욕먹고 하지 않아도 욕을 먹을 상황이라면, 돈을 안 쓰고 욕을 먹는 게 낫다는 쪽이 공화당 주류의 판단이었다.
반면, 대통령 당선인인 릭 오리하 포함 민주당 지도부는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들의 표를 얻어 당선된 만큼 릭 오리하와 민주당은 자신들에게 쏠린 표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빅3를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을 하자니 끝이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지원을 하지 않자니 다음 선거가 두렵다.’
똑같이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해도 믿는 도끼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올 거란 걸 정치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민주당과 릭 오리하 당선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성공적으로 기업을 회생시킨다’뿐이었다.
대선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합리적인 수준의 지원’이란 단어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릭 오리하가 당선인이란 신분으로 격을 높이자마자 ‘합리적인 수준의 지원’이란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국의 보수 계열 정당과 진보 계열 정당만큼 사이가 나쁜 게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권인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보단 협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협조를 했다.
임기 끝자락, 뉴먼 대통령과 공화당의 중진들은 릭 오리하 당선인과 민주당 수뇌들과 대화를 나눴다.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뉴먼 정부는 몇 개월 후 출범할 오리하 정부의 뜻을 존중해, 오리하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구제금융을 실시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빅3가 청문회에 참석해서 요구했던 2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뉴먼 정부는 오리하와 민주당의 생각을 존중하되 오리하가 집권하기까지의 과도기에 빅3가 파산하지 않을 정도의 돈만 대출해 주기로 결정했다.
‘리스크를 굳이 우리가 짊어질 필요는 없지.’
오리하 행정부가 정식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명줄은 붙들어 놓을 테니, 죽일지 말지는 오리하 행정부가 알아서 하란 생각이 담긴 행보를 보였다.
‘결국 구제금융을 시행하기로 결정했군. 하긴 정부가 우리를 버릴 리 없지. 우리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당장은 도움받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보루가 생긴 느낌이라 좋군.’
‘우리와 그라함은 그대로 두더라도 벨라스키스 정도는 본보기로 버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우였나?’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표를 지키기 위해서 민주당이 힘을 써 줄 거라 했는데, 다행이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과 로비스트를 활용해 정치권을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운 빅3는 뉴먼 정부와 오리하 정부가 구제금융을 놓고 협상을 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모두 전해 들었다.
민주당 측 중진 중 한 사람인 제시 펠로스 하원의원은 오리하 정부를 대신해서 빅3에게 구체적인 자구책을 만들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얼마를 청구하면 될까?’
연방정부와 의회가 구제금융을 주기로 한 것을 인지했기에 빅3의 수뇌부들은 서로 의견을 공유하며 거창한 자구책을 짰다. 본래 그들이 청문회에 참석했을 때 요구한 250억 달러보다 90억 달러가 더 많은 340억 달러 규모 자구책이었다.
빅3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만 약 55만을 넘겼고 빅3에 부품을 판매하거나 차를 파는 딜러들까지 계산하면, 최소로 잡아도 100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발생할 거란 분석을 언론에 내보내며 배짱을 부렸다.
100만의 실업자가 발생하든 말든 이제 임기 끝물인 아쉬울 것도 책임지고 싶지도 않은 뉴먼 행정부야 당연히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과 협의해 빅3에 150억 달러 정도를 대출해 주는 선에서 구제금융을 안을 의회에 넘겼다.
미상원은 당연히 뉴먼의 구제안을 부결시켰고, 뉴먼은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에서 174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135억 달러는 당장 지급하되 40억 달러는 2009년 2월에 지급하기로 계획되었고, 135억 달러 중 94억 달러는 ‘SM’에, 남은 41억 달러는 ‘벨라스키스’에 투입되었다. 그라함 모터스는 두 회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구제금융을 받지 않고 어려운 동업자들에게 순번을 양보했다.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은 부은 것처럼 움직이는 빅3의 배짱에 릭 오리하는 분노했다.
슬슬 조금씩 사태가 진정되는 듯한 기미가 사회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는 2008년 12월, 정부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느라 바쁠 릭 오리하는 정호준에게 비밀회동을 요청했다.
* * *
릭 오리하의 만남 요청에, 아리아는 자신도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가 함께 가면 호준에게 가해질 강요나 압력이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을까요?”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정호준에게 가하는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 싶다는 깊은 생각이 담긴 그녀의 의지에 정호준은 아리아를 대동하고 오리하를 만났다.
“다시 한번 대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정호준이 웃으면서 보낸 축하 인사에도 불구하고 오리하의 표정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맙네. 표정이 이래서 미안하네. 지금은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라 말이지.”
빅3, 더 정확히는 SM과 벨라스키스의 배 째라는 식의 구제책과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이해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아직 인수인계를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한다. 릭 오리하 본인이 표심을 생각해야 하는 선출직은 맞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끌려다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자존심도 상했고 말이다.
“필터링 거치지 않은 솔직한 답변을 원하십니까?”
“내가 알아서 걸러 듣도록 하지. 이 사태를 모두 예견했던 자네가 그리는 상황은 뭔가?”
“포드는 살리고 SM과 벨라스키스는 파산하게 두십시오.”
“빅3 중 둘을 포기하라고? 그 말은 나보고 다음 대선을 포기하란 말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나?”
걸러 듣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거침없는 발언에, 오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오리하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정호준은 오리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쓴소리를 이어 갔다.
“제 안목을 믿는다고 하셨죠? 살을 잘라내고 뼈를 깎아내는 엄청난 규모의 구조조정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800억 달러를 넘게 쏟아부어도 SM과 벨라스키스가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제 조국이었던 대한민국이 IMF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했듯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국정 운영 초기인 만큼 대통령님께는 그럴 힘이 있으십니다.”
“800억 달러를 쏟아부어도 결국엔 망할 거라고?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릭 오리하의 반응에도 정호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빅3의 진짜 문제는 일시적인 자금경색이 아닙니다. 빅3가 지금의 위기를 맞이한 건 모기지론의 파생 상품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탓보다는, 일본의 경쟁사보다 노동 비용이 높고, 방만한 생산라인을 운영한 탓입니다.”
정호준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한 문서를 오리하에게 건네주었다. 오리하는 정호준이 건넨 문서를 빠르게 훑은 뒤 입을 열었다.
“나보고 노조를 치라는 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조는 파업을 시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미국 자동차노조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대한민국 미래 자동차의 노동자들처럼 미국 자동차노조는 파업을 무기로 회사로부터 수많은 복지혜택을 뜯어 냈다. 노조가 회사로부터 받아 낸 복지 혜택은 여럿 존재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잡뱅크(Jobs bank)’다.
‘잡뱅크’는 1984년 회사와 노조의 타협 산물로 만들어졌는데,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회사가 구조조정과 라인 교체 등으로 인력을 줄일 때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임금 전액과 복지 혜택을 주도록 했다. 1984년 이후 운영을 이어 간 잡뱅크 때문에 2005년에 들어서면서 일도 하지 않고 급여와 복지 혜택을 받는 인력은 빅3 모두 합쳐 12,000명이나 되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년 동안 ‘SM’은 잡뱅크 비용으로 21억 달러, 벨라스키스는 4억 5,100만 달러, 그라함 모터스는 9억 4,400달러를 지불했다.
잡뱅크가 만들어 낸 부작용은 달리 비용에서 그치지 않았다.
강성 노동자들과 잡뱅크 때문에 빅3는 기업의 당연한 권리인 비용이 덜 드는 곳으로 이전할 시도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인건비가 싼 남부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려 해도 디트로이트의 고임금 근로자들은 이사를 하려 않았기 때문이다. 잡뱅크 노사협약에 따라 회사가 먼저 공장을 이전하기로 한 만큼 근로자들은 놀면서도 예전에 받던 것의 80~95%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고용은 새롭게 하면서 따라오지 않아 퇴직한 이의 임금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 추가 생산라인을 해외에 준공하는 건 가능해도 임금이 비싸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저도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약자라고 꼭 선한 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미국 자동차노조를 보며 깨우치게 됐네요.”
파업이라는 행동은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파업은 본인들의 생존권을 주장하기 위한 처절한 외침으로 인식됐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업에 대한 생각은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
‘파업을 한 건 좋다. 하지만 본인에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노동자들은 기업에 비하면 힘없고 약한 약자로만 인식됐던 과거와 달리 고학력자가 늘어난 2010년대에는 파업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생존권이 달려 간절하게 외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됐달까? 생계를 위해 시도한 파업에는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욕심으로 시작된 파업에는 탄식과 함께 분노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업의 성장력을 좀 먹고 경쟁력을 떨어트리는 잡뱅크가 없어지기 위해서라도 SM과 벨라스키스는 한 번 무너질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800억 달러를 쏟아부어도 결국은 연준과 연방정부가 그 부담을 떠안게 될 겁니다.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으시더라도 미국을 위해서는 지금 정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