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81화 (181/335)

181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1)

‘클립폰’이 이제 막 창업을 시작하는 단계였다면 400만 달러라는 투자금은 30% 어쩌면 그 이상의 지분으로 변모했을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호준의 ‘클립폰’ 투자 시점은 조금 늦은 타이밍이었다. 초창기 투자금은 조던 메이슨이 근무하던 회사 사장이자 ‘클립폰’의 공동 창업자인 빅토르 레프코프스키가 조달했다.

창업한 뒤로 초창기 투자금을 다 사용해 새롭게 자금을 조달해야 할 시점. 정호준이 조던 메이슨을 만난 2008년 11월은 딱 그 시기였다.

‘25%까지는 받아 내고 싶었는데, 아쉽네.’

만나는 내내 정호준을 우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선망 어린 시선과 감정이 사업에 개입되진 않았다. 협상을 주도하는 건 메이슨보다 사회생활을 더 오래한 게 분명해 보이는 공동 창업자 레프고프스키였기 때문이다.

레프고프스키가 협상을 주도하는 바람에 정호준은 메이슨의 감정을 이용할 틈을 만들지 못했다.

너무 욕심낼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정호준은 집으로 돌아왔다.

* * *

시계태엽을 조금 거꾸로 돌려 2008년 11월 4일. 미국발 경제 위기에 힘겹게 대응하면서도 세계는 미국에 시선을 집중했다.

2008년 11월 4일은 패권국인 미국이란 배의 선장이 결정 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양당 후보들은 마지막까지 비행기를 타고 주를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에 집중했다. 굳이 벌이지 않아도 되는 이라크 전쟁까지 벌이고,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했을 때 대처를 미흡하게 해 표심을 크게 깎아 먹어 이미 2006년 있었던 중간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디폴트 사태로 경제가 휘청이기까지 했지만 이런 큰 실태가 이어졌음에도 공화당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을 기했다.

‘흑인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의미가 또 다르다고 믿었다. 자신들이 분명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공화당 골수 지지자들 외에도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이 다수 존재할 거라 믿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공화당 측 부통령 후보의 계속된 실언과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가 만들어 낸 경제침체는 격전지에서 공화당의 표를 깎아 먹는 요인이 되어 버렸다.

정호준은 재단 설립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검토하는 아리아와 함께 대선 투표를 지켜봤다.

“와! 정말 오리하가 이겼네요.”

오리하가 선거인단 270명 확보라는 매직 넘버를 달성한 것을 TV로 함께 본 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리아는 우월의식에 사로 잡힌 여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백인 특유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의 틀을 벗어날 정도로 깨어 있지도 않았다.

정호준이 오리하가 압승을 거둘 거라는 말에도 ‘아무리 그래도?’와 같은 생각을 품었고 오리하가 이기기 시작할 때도 ‘설마 정말 이기는 거야?’와 같은 생각을 품었었다.

“내가 오리하가 이길 거라고 이야기했었잖아요. 잠깐 축하 전화 좀 해 줘야겠네요.”

감탄성을 내뱉는 아리아를 뒤로 하고 정호준은 애플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오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안 받으면 문자를 남김으로써 성의를 보이려고 했는데, 매직 넘버를 달성해 시장 바닥일 게 분명한 상황에서도 오리하는 전화를 받았다.

“매직 넘버 달성을 보고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후보님, 대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정 대표가 이래저래 도와준 덕분입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아니었어도 오리하 후, 당선자님은 대통령이 되셨을 겁니다.”

후보자에서 당선인으로 호칭의 격을 업그레이드시키며 정호준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만 비행기 태우게나. 자네까지 비행기를 태워 줄 필요는 없네.”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정호준이 도와준 현재에서 사는 오리하로썬 정호준이 이야기한 사실이 자신을 비행기 태우는 아부로 느껴졌다.

“아부가 아닌 100% 진심입니다.”

“알았으니까, 그만하게나. 그나저나 유니버셜 뱅크가 텍사스의 엘리엇 뱅크까지 합병한다지? 나야 말로 축하해 줘야겠군. 엘리엇까지 합병하면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은행의 주인이 된 셈이잖나?”

‘뭐지?’

언뜻 들으면 그냥 축하해주는 것 같았지만 정호준은 오리하의 말속에 숨은 경계심을 느꼈다. 정호준은 오리하의 감정을 눈치챘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오리하는 앞으로 8년 동안 미국이란 거대한 배를 운영할 선장이었기에 흠 잡혀서 좋을 게 없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축하해 줄 게 있으니 참 좋네요.”

정호준이 너스래를 떨었지만 오리하가 언짢아하는 이유는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제조업 쪽에도 힘을 실어 주겠다는 나와의 약속 잊지 않았겠지?”

‘내가 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돈을 쏟아붓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오리하가 곧 대통령이 될 인물이라지만 할 말은 제대로 해야 호구로 여기지 않는다. 정호준은 전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대통령님과 한 약속인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구두로 한 약속이어도 당연히 지켜야죠. 다만 합리적인 정부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전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수준이라. 그것만큼 어렵고 모호한 말이 없는데 말이지.”

화장실조차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거늘 권좌에 앉게 된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앞으로 미국의 모든 상황이 자신의 성적표로 작용하게 될 테니 마음가짐과 상황이 달라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말이 스스로 호구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그 간단한 것조차 못할 정도로 정호준이 힘이 없진 않았다.

“저는 사업가입니다. 그것도 세간으로부터 가장 잔혹하고 냉정하다 평가받는 금융 쪽에서 종사하는 사업가죠. 비전이 보이지 않고 손해만 보는 거래에 발을 들일 만큼 따듯한 사람은 아닙니다.”

“…….”

대꾸 없이 침묵하는 오리하를 두고 정호준은 자신의 할 말을 이어 갔다.

“‘합리적인 수준의 지원’이란 말이 모호하고 달성하기 어려운 말이란 걸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선인께서 분노하시더라도 저는 합리적인 수준의 지원 없이는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지 않을 겁니다. 모랄 해저드(도덕적 해이)란 말을 기억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 *

미국 대선 결과가 세계에 알려졌을 때 서구권 신문사들은 ‘WOW!’란 글자만 적힌 칼럼을 내보내며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알렸다.

12월 이후, 해가 바뀌며 슬슬 미국 주식시장이 안정을 되찾는다고 할 때 11월 중순은 슬슬 주식을 쓸어 담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은행 인수팀이나 현물자산, 부동산을 구매하는 팀에 여러분을 참여시키지 않은 게 이해가 되지 않으셨죠?”

정호준은 은행 인수를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식 매수를 위해 팀원들을 따로 분류했다. 조나단이나 인사팀을 통해 기술적 매입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만 따로 모아 놓았다.

“처음에는 그런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일선에서 제외하신 친구들을 확인한 뒤로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에게 지시하실 것은 아마 주식 매수겠죠?”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돈을 잃어야 하는 제로섬 구조로 만들어진 게 금융이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는 금융업계에서 종사하는 만큼 직원들은 모두 눈치가 빨랐다. 처음에는 자신을 필요 없는 인력으로 여긴 것 같아 불안했었지만 추후 하나둘 회사의 일정에 제외되는 인력들의 이름을 듣게 된 뒤로는 마음 편하게 기다렸다.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요. 맞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짚어 준 주식을 기술적 매입해 주세요.”

“종목은요?”

“구골, 엔플, 세미크로소프트, 아마조네, 칼컴, Net Flex, 킴벌리-클레아, 코카콜X, 펩X, 스타박스, 나이크. 이 11개 주식을 매입해 주십시오.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 주식시장의 하락장은 이르면 내년 1월, 늦으면 내년 2월까지는 유지될 겁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최대한 저렴한 값에 매입해 주세요.”

지금부터 주식을 5년 이상 가지고 있는다는 가정하에 재미를 볼 법한 주식은 아무래도 IT 쪽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나이크랑 킴벌리, 펩X는 1월 말부터 매입을 시작하는 걸로 진행해 주십시오.”

정호준의 지시에 자리에 모인 트레이더 중 정호준의 오른팔 격인 조나단을 제외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정호준의 지시 사항을 적은 뒤 회의실에서 나섰다.

“조나단은 미리 명단을 확보했던 대주주들을 만나 주식 매입 의사를 밝혀 주세요.”

3~4년은 재미를 못 볼 수도 있지만 10년 진득하게 가지고 간다고 쳤을 때 정호준이 언급한 주식들은 정호준의 자산을 최소한 10배 이상 불려 줄 것이다.

* * *

아이들을 금방금방 큰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 보다. 솜털만 가지고 있던 아이들의 머리숱은 짙은 검은 빛을 띠고 있는 게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숱이 많아졌다. 새빨갛던 아이들은 어느새 제 엄마와 같은 백옥 같은 피부색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엄마를 닮아서 다행이야.’

줄리우와 헤리나는 정호준으로부터 흑발 흑안을 물려받았고, 피부색은 다행히 아리아의 것을 물려받았다. 아이들의 피부색은 제 엄마보다도 새하얬다.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만큼 정호준은 아이들이 자신의 피부색이 아닌 아리아의 백인 피부를 이어받은 게 참 다행이라 여겼다.

다행스러운 점 외에도 아이들은 정호준과 아리아로부터 좋은 것만 뽑아 간 느낌이 강했다.

11월 19일, 정호준과 아리아는 품에 아이를 하나씩 안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내일 난리 나겠네요.”

“난리요?”

“돈 받으러 와 놓고, 너무 당당하지 않아요? 내가 꼬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꼴 보기 싫은데 말이죠.”

구제금융을 요청한 자동차 업계 빅3로 분류되는 ‘그라함 모터스’ ‘SM모터스’, ‘벨라스키스’의 CEO들은 모두 회사가 운영하는 초호화 제트기를 타고 DC 공항에 당도했고 그들이 초호화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혀 방송으로 송출되었다.

저들이 워싱턴으로 불려 온 이유는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다. 미의회는 정부 지원의 타당성을 묻기 위해 각사의 최고 경영자들을 부른 거다. 일종의 청문회를 개최한 것.

“버스 타고 오는 건 무리가 있으니 한발 양보해서 그냥 항공편을 통해 왔어야죠. 250억 달러나 되는 구제금융을 요청해서 열린 청문회 자리인데,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지 않아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이곳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여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과시하는 행동들은 좋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CEO들이 회사 비행기를 타고 올 정도면 자금 여유가 있다는 것이므로 구제금융을 시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정호준이 이야기한 지적은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들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빅3 CEO들은 의원들의 추궁에 호되게 혼났다.

여론 또한 의원들의 발언에 동의를 했으며, 다음날 빅3이라 불리는 회사들의 주가는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저로 폭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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