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80화 (180/335)

180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80)

회사가 어려워 구조조정을 진행한 탓에 정리해고를 단행한 경우, 정년 연차가 다 찰 동안 승진을 못 한 경우, 사내 정치에서 완전히 밀린 경우, 마지막으로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치는 사고를 친 경우가 아니라면 부장, 차장 등 간부라 불릴 법한 직원들은 본인이 사표를 내지 않은 한 잘릴 일이 없다.

그래서 ‘정규직으로 들어갔냐 아니냐’와 설령 시작은 인턴(비정규직)으로 시작하더라도 ‘정규직 전환이 약속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회사의 규모만큼이나 직장을 잡을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꼽혔다.

반면 직장인들의 꿈의 자리라 불리는 임원은 분명 회사에 다니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꼭 한번 앉아 보고 싶은 빛나는 자리였지만, 간부들과 달리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는 계약직이라는 명확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거저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특히 기업이란 이름을 단 집단은 더더욱. 높은 연봉과 권력, 막대한 복지 혜택을 쥐여 주는 만큼, 기업은 임원으로 올린 이로부터 많은 것을 뽑아먹었다. 그리고 임원이 기업에서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칼 같이 잘라냈다.

그렇다 보니 임원들은 매년 비전과 성과를 추구하며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더 바쁘게 일을 해야만 했다. 대기업 임원쯤 되면 임원에서 잘려도 높은 연봉을 받으며 중견기업이나 강소기업에 고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10대 기업, 아니 5대 기업 출신쯤 돼야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미국의 임원 또한 한국처럼 계약직이다. 파리목숨이라는 리스크는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지만 천조국이라 불리는 만큼 페이의 수준이 달랐다. 1년만 버텨도 최소가 수백만 달러, 많게는 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만큼 JHJ 유니버셜 뱅크 이사직 자리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임원들은 재계약을 위해, 그리고 간부들은 비어 있는 임원 자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이번에 상업 대출 프로그램을 통해 100억 달러를 대출받은 사실 알지? 오너가 자네가 다니는 엘리엇과 PTF 뱅크를 동시 인수하겠다고 밝혔네. 만약 그 빅딜이 성사되면 확고하게 4대 은행에 꼽히게 될 걸세.”

유니버셜 뱅크의 임원들은 친분이 있는 엘리엇과 PTF 뱅크 임원들에게 연락해 비전을 제시했고.

“유니버셜 뱅크가 우리 은행을 인수했을 때 임원들은 잘라도 간부나 평사원들은 그대로 뒀어. 다른 은행들이 인수하게 되면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도 있지. 굳이 안전하고 충분한 비전을 가진 선택지를 두고 리스크 있는 선택지를 선택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이유가 있을까?”

간부 및 직원들은 자금 상황, 부채의 정도, 보유 자산 등을 뽑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은행에 다니는 직원들에게 비리를 저지른 게 아닌 이상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을 위험이 없을 거라 꼬드겼다.

임직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정호준 또한 은행 인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의 일환으로 정호준은 장인과 처조부인 찰스들에게 추가로 은행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처가의 도움을 받아 전 의장인 그린스펀과 약속을 잡았다.

* * *

거대 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치가 끼어들지 않을 리 없다. 아이들에게 로슬러라는 성을 물려주면서 사실상 데릴사위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정호준을 위해 찰스들이 힘을 써 주긴 했지만 이전과 달리 설득은 정호준의 몫으로 남겨졌다.

‘메릴리치도 이번 기회에 DT로 흡수시킨다 했었지?’

찰스들은 ‘DT은행’, ‘AOS’와 합병할 곳들을 가려 내느라 바빴다.

전 연준의장이긴 하나 본인의 시대에 싸질러진 똥인 만큼, 그린스펀은 자신이 싸지른 똥을 치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협조와 노력을 쏟았다.

“엘리엇을 노린다고 들었습니다.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아니 조금이라도 미국 경제에 충격이 덜 가도록 하기 위해 숨 가쁘게 움직여 온 그린스펀은 예의를 차리거나 식사를 하지도 않고 곧장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는 거란 걸 깨닫고 있습니다.”

“하, 당당하시네요?”

자신이 욕심부린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는 정호준의 말에 그린스펀은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크레던스 스위스에게 받은 퍼스트 보스턴은 예외로 젖혀 두더라도 정호준은 이번 위기 통에 미국 은행을 세 곳이나 합병했다. 그것도 부채를 연방정부가 대신 끌어안는다는, 누가 들으면 들고 일어날 법한 조건에 말이다. 정호준이 CDS 신용부도스와프라는 무기를 쥐고 있었다 해도 찰스들과 오리하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다.

은행의 숫자도 숫자지만, 더 큰 문제는 정호준이 기회를 틈타 인수한 은행들이 결코 가벼운 규모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모기지 디폴트 사태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와코르비아 은행’은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은행사였고, ‘워싱턴 레시프로 은행’은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은행이었다. 그리고 인데믹 은행은 앞선 두 은행과 분야는 다르지만, 미국에 존재하는 저축 은행 중 7번째로 큰 자산과 규모를 가진 은행이다.

송사리들을 집어삼킨 게 아니라 하나하나 덩치가 있는 것들을 집어삼켰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연준이나 차기 대권 주자들과 약속했던 사안들은 어기지 않고 전부 지켰습니다.”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여도 철면피처럼 뻔뻔하게 구는 정호준의 대응에 그린스펀은 비아냥대는 것을 그만두었다.

“크레던스 스위스가 미리 정리해 둔 퍼스트 보스턴까지 합병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갑이 두둑해졌는데, 할인받을 수 있을 때 구매해야죠.”

본래 동시에 두 곳을 인수하려 했던 정호준은 그린스펀과 만나 PTF 뱅크 건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찰스들을 만나 은행 두 곳을 인수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찰스들로부터 PTF는 포기했으면 좋겠다는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전처럼 정부에서 빚을 대신 짊어져 줄 생각은 없습니다.”

“선순위 무담보채권과 후순위채권, 우선주만 인수 대상에서 제외해 주시면 됩니다.”

“정 대표는 무거운 사안을 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군요.”

자금경색 때문에 생겨난 부채들은 끌어안되, 모기지론 파생 상품으로 발생할 적자는 감당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그린스펀은 다시 한번 정호준이 뻔뻔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조금만 협조해 주시죠.”

“이 이상 얼마나 더 협조하란 말입니까?”

“JHJ 유니버셜 뱅크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정부나 연준도 이득을 보지 않겠습니까? 당장에는 규모가 워낙 막대해서 손해처럼 느껴지시겠지만 경기가 회복되고 나면 종국에는 득이 될 겁니다.”

정호준이 사용하기에 따라 수십 배로 뛸 CDS를 쥐고 있고 찰스들이 움직여 줬다지만 워싱턴 레시프로, 와코르비아, 인데믹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는 건 여러모로 정부에게 부담이 컸다.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했다.

연준이 챙겨간 명분이 바로 유니버셜 뱅크의 지분이었다. 정호준은 유니버셜 뱅크를 창립한 뒤 연준에 20%에 달하는 지분을 넘겨줘야만 했다. 연준이 제 몫을 챙겨가는 와중에 찰스들도 자신들이 움직인 수고비로 유니버셜 뱅크 지분 10%를 챙겨갔다. 우호지분이란 명목으로 말이다.

‘그나마 100억 달러를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나?’

은행이란 업종이 업무 성과에 따라 배당을 이행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100억 달러는 거저였다.

“35억 달러에 매입하겠습니다. 이 정도 가격이면 연준의 면을 세워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정호준이 나름 양심적인(?) 값을 부르자, 그린스펀을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구조조정은 어느 정도나 단행할 생각입니까?”

“다른 은행들을 인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웬만하면 직원들의 고용은 그대로 승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쳐 내는 건 비리를 저지른 이들과 성과를 내지 못한 임원 정도겠죠?”

실업률을 높이지 않게 JHJ에서도 한발 양보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린스펀은 처음으로 음식에 손을 댔다.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협상 타결까지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을 갖고 정호준은 음식을 먹으며 그린스펀과 대화를 이어 갔고, 밀고 당기는 협상 자리는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실 때까지 이어졌다.

텍사스 휴스턴에 본사를 둔, 37억 달러의 예금과 46개의 지점을 보유한 엘리엇 뱅크는 40억 달러에 JHJ Capital의 품에 안기는 걸로 협상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에나처럼 뜯어가 놓고 양보라니, 정 대표도 가만 보면 참 웃깁니다.”

* * *

연준 관계자와 만나 큰 틀의 합의를 끝마친 정호준은 실무자들을 보내 합병 건을 맡겼다. 정호준이 건네준 일거리 때문에 유니버셜 뱅크와 Capital의 능력 있는 직원들은 밤잠을 설쳐 가며 정호준의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11월이 되었다.

11월에도 위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 중이었다. 다만 사막에도 꽃은 핀다는 말처럼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벤처 창업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미래 이름 있는 IT 기업 중엔 2008년에 정호준의 주 활동 지역인 시카고에서 창업한 이도 존재했다.

직원들이 합병 작업을 진행하느라 바쁘기에 정호준은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조던 메이슨입니다. 살아 있는 월가의 전설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번 CDS 투자로 정호준은 에릭 버펫과 얼추 비슷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라뇨. 버펫쯤 되야 그런 말을 듣는 거지, 제겐 너무 과분한 말입니다.”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훈훈한 외모를 지닌 메이슨을 보며 정호준은 손사래를 쳤다. 조던 메이슨은 정호준의 말이 믿기지 않았는지 잔뜩 흥분한 채로 외쳤다.

“3년 만에 거대 금융 그룹으로 회사를 키운 정 대표님께서 전설이 아니면 누가 전설이겠습니까?”

자신을 띄워 주는 걸 낯간지럽게 여겨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호준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메이슨 씨가 만든 어플리케이션 ‘클럽폰’이 비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JHJ에서 우리 ‘클럽폰’에 투자해 주신다는 겁니까?”

‘Clubpon’은 ‘Club’과 ‘Coupon’의 합성어로 ‘그룹 할인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같은 제품을 구매하면 어떨까?’란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든 어플리케이션이었다.

“예, 방금 이야기했잖습니까? 비전이 있는 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400만 달러 투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호준은 400만 달러를 투자하고 ‘클럽폰’ 지분 20%를 받아 냈다. 사실 더 많은 돈을 투자해 더 많은 지분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정호준은 400만 달러를 투자한 선에서 투자를 마쳤다.

‘상장되면 곧바로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너무 많은 지분은 부담된다.’

20년에도 망하지 않고 경영을 유지하긴 하지만 상장 후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정호준은 큰돈을 투자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했다.

“투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JHJ Capital이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꼭 증명하겠습니다!”

우상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볼 때마다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또 하나의 스타트업 투자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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