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75)
중국에서 리만 브라더스 파산을 발표한 다음 날, 다우지수가 318포인트 하락했다.
정호준이 회귀하기 전 경험했던 세계에서 다우지수가 504포인트나 하락한 걸 떠올리면 미국의 입장에서 불행 중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318포인트 하락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폭락임은 분명했다.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은 모기지론을 담보로 하는 파생 상품이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왔다는 걸 알리는 증거였다.
리만 브라더스를 파산시킨 중국 중앙은행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리만 브라더스에 지고 있는 빚 8,644억 달러를 미국 국채로 갚았다.
외환을 현금으로 쥐고 있는 나라는 없기에 국채로 갚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장을 개방하고 경제 발전을 시작한 뒤로 항상 3조 달러 이상의 외화를 보유 중이던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2조 달러 대로 떨어졌다.
‘중국이 이렇게 빨리 돈을 갚은 게 변수가 될 것 같은데? 폭락장이 시작돼야 지분을 매입한 대주주들로부터 원망 살 일은 없을 텐데.’
정호준은 리만 브라더스가 곧 파산하게 될 것임을 알려 리만의 파산 때문에 주식 매각을 망설인 대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었다. 실제로 1회차 때 엔플의 주가가 12월 무렵 80불 선까지 하락했던 것을 참작하면 정호준이 협상 중에 언급한 사실들은 거짓이라곤 없었다.
엔플이 출시한 애플폰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만큼 시간이 지나면 엔플의 주가가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지만,
월가에서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은 대주주들이 그러한 미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돈 있는 사람들은 회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마저 손해로 여겼다.
‘준비된 자에게 위기는 곧 사세를 불릴 기회의 장이지.’
너나 할 것 없이 파산하는 판국에 돈을 쥐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자산가들은 인지하고 있었다.
‘주가가 떡락하기 전에 주식을 매각하고 그 돈을 굴리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
‘엔플의 가치가 뛰어나다 판단되면, 나중에 가서 다시 매수해도 돼. 지금은 지갑을 두둑이 할 때다.’
본전을 찾을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는 것과 위기 상황 속에 돈을 굴리며 사세(운용자금)를 확장하는 것.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조차 선택하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지였다.
고를 수만 있다면 누구든 후자를 선택하리라. JHJ Capital이 주식 매입 의지를 드러냈을 때 흔쾌히 주식을 넘기겠다는 결정을 내린 대주주들이나 설득 끝에 주식을 매각한 이들이나 종국에는 위와 같은 계산을 마친 뒤 주식을 매각한 거다.
다만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호준은 분명한 차별점을 두었다.
‘순순히 협조해 준 이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 주는 건 당연한 거잖아?’
순순히 협조한 이들과 계산이란 계산은 전부 거친 뒤에 매각 의사를 표명한 이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정호준의 사고는 주식 매입가에 영향을 주었다.
2008년 8월 엔플의 주가는 176불을 상회했지만 JHJ Capital 직원들은 앞으로 있을 상황이 얼마나 최악인지를 알리며 가격을 내렸다.
처음부터 순순히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협조해 준 대주주들에게는 주당 166불을 쳐줬다.
평균 매수가 166불에 66,326,871주(11.38%)를 매수했다. 주식을 매수하는 데 사용한 돈은 110억 달러를 상회했다.
반면 순순히 협조하지 않고 정호준이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 정보를 흘리며 설득한 뒤에야 주식을 매각하기로 결정한 이들에게는 몇 차례 밀당을 이어 가며 주당 152불에 합의를 마쳤다.
“괜히 길게 힘 빼지 마시죠. 우리 JHJ Capital이 주식을 던지기 시작하면 제가 제시한 금액보다도 더 낮은 금액에 주식을 팔게 될 거란 걸 모르지 않잖습니까?”
지금 분위기에 공매도를 시작하면 주가가 지하실까지 내려갈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줄다리기는 줄곧 JHJ Capital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16.42%에 해당하는 엔플 주식 95,701,865주를 145억 4,668만 달러를 주고 주식을 사들였다.
명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 대주주들이나 스티븐 잡스를 지지하느라 절대 주식을 팔지 않을 주주들을 제외한 대주주들로부터 엔플 주식을 사들이는데, JHJ Capital은 256억 달러 조금 못 되는 돈을 소모했다.
결론적으로 JHJ Capital은 본래 보유하고 있었던 엔플 지분 9.2%를 더해 발행주식 중 37%에 달하는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푹락장이 시작되면 세미크로소프트, 아마조네, 구골의 대주주와 협상 시작해 주시죠.”
상부상조하면 크게 신경 쓸 게 없는 일이나, 엔플 쪽에서 언제 변덕을 부릴지 알 수 없기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잡스가 죽은 뒤에 CEO가 된 짐 쿡이 뿌릴 배당금을 크게 받아먹기 위해 손해를 감수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IT 기업들은 당장 서둘러서 매입할 이유가 없었다. 약점을 잡힐 것도 없었고 말이다.
‘다른 주식들은 폭락장이 끝물에 다다랐을 때 매입해도 충분해.’
정호준을 포함한 JHJ Capital의 임직원들은 폭락장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하는 데 집중했다.
* * *
매일같이 직원들과 함께 주식시장을 주시하고 있던 정호준에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강병원입니다.”
정호준의 이룩한 결과물을 파악하고 있어서일까? 아직 앳된 기색이 얼굴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병원은 정호준에게 극존칭을 사용했다. 말투뿐 아니라 태도 또한 호준을 어려워한다는 기색이 읽힐 정도로 일관되게 정호준을 윗사람을 대했다.
“반갑습니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경제수석비서관이면 무게감이 있는 위치인데다 당장 태도와 오는 말이 고왔기에 정호준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해서 강병원을 막 대하진 않았다.
정호준은 다과를 내주며 숨 돌릴 시간을 준 뒤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수석비서관님도 그렇겠지만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미사여구 다 빼고, 빠르게 용건만 이야기하도록 하죠. 미국에는 아니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이번 서브프라임 디폴트 사태를 예견하시면서 이득을 크게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돈을 번 게 수석비서관님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습니까?”
정호준은 돈 이야기가 나오자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표님께서 하이넥스를 인수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이넥스요?”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큰 적자를 기록한 기업이지만. 정부 관리하에 체질 개선을 이룩한 후, 작년까지 4년 연속 흑자를 기록 중에 있습니다.”
공기가 바뀌었다는 걸 인지한 강병원은 조심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으나, 찾아온 용건만큼은 확실히 이야기했다.
* * *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터진 후 정부는 방만하게 운영된 기업들을 정리하는 소위 ‘빅딜’이라 불리는 조정을 시작했다.
빅딜 과정에서 미래전자는 은성 반도체를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렸다.
그렇지 않아도 부채가 11조 원이나 됐던 미래전자는 은성 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은성그룹에게 현금 2조 5,600억 원을 지급했고, 추가로 4조 원에 이르는 부채를 떠안았다.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면서 다 같이 힘들 때인데 미래그룹에게 자금적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당연히 빅딜을 진행하는 당시 미래건설을 보증으로 내세우며 어음을 발행해 은성 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때 미래전자가 발행한 어음은 미래전자가 6개월마다 4,000억 원의 부채를 갚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어디 제 맘대로 되던가?
그렇지 않아도 산더미 같은 빚을 짊어지고 있는 미래전자에게 또 한 번 악재가 터졌다.
반도체 경기 악화로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경영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
빚을 갚기는커녕 적자로 빚을 추가로 짊어지게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미래전자는 왕자의 난과 함께 미래 그룹을 흔들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제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욕심만 챙긴 행보가 가져온 비극이었다.
미래전자는 오성이나 은성그룹처럼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종합 가전 기업이었으나,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잘라 낼 것을 잘라 내고 반도체 부문만 남긴 뒤 2001년 3월 ‘하이넥스 반도체’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며 경영에서 손을 놨다.
이후 하이넥스는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 관리 체제에 편입되었다.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쉽게 말하면 미래의 손에서 벗어나 정부가 관리하는 기업이 되어 인수자를 찾게 됐다는 말이었다.
2000년, 적자 2조 4,868억 원.
2001년, 적자 5조 736억 원.
2002년, 적자 1조 7,772억 원.
2003년, 적자 2조 3,131억 원.
하이넥스는 미래의 품에 있을 때부터 정부의 품에 들어선 후에도 조 단위 적자를 이어 갔다.
중간중간 인수 협상이 이어졌지만 끝내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기업 관리는 정부의 몫이 되었고, 관리를 맡게 된 정부는 하이넥스에 혈세를 투입함으로 어떻게든 하이넥스를 살리고자 노력했다.
2004년, 당기 순이익: 1조 6,925억 원.
2005년, 당기 순이익: 1조 8,174억 원.
2006년, 당기 순이익: 2조 124억 원.
2007년, 당기 순이익: 3,463억 원.
하이넥스는 경영진은 정부가 몇 차례에 걸쳐 투입한 혈세를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기술 개발에 매진했고, 덕분에 2004년부터 적자가 흑자로 전환되었다.
2004년 ‘조’단위 당기 순이익을 기록하더니 이후에도 3년 동안 계속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4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부터 난 적자를 메꾸지는 못했다.
장부상에는 여전히 5조 원 이상의 적자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2007년부터 서브 프라임 디폴트 사태로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2008년에 들어서서는 다시금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세 차례 받은 분기 보고를 통해 큰 적자를 기록한 것을 확인한 김명호는 하이넥스를 치워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최소 내년, 길면 2010년까지 경기 불황이 이어질 거다. 2008년에 난 적자까지는 정부가 끌어안는다는 조건을 걸어서라도 얼른 치워야 해’
심력을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데 집중해서 그렇지 김명호는 능력은 있는 남자였다. 하이넥스를 계속 정부 품 안에 둬 봐야 좋을 게 없겠다는 결론쯤은 머릿속에서 금방 도출했다.
‘대한민국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펀드를 만든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야. 수석비서관이 잘 처리해 줘야 하는데.’
* * *
하이넥스를 인수하는 게 정호준에게도 이득이 될 거라는 투로 설명을 마친 강병원을 보며 정호준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렇게 좋은 거면 국내 기업들에게 넘기시지, 굳이 제게 넘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국내 기업 중에는 하이넥스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이 없습니다. 하이넥스의 몸집이 제법 크잖습니까? 좋은 약이라도 과하거나 체질에 맞지 않으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앞으로 몇 년은 불경기가 이어질 텐데, 좋은 약이라고 국내 기업에게 덥석 쥐여 줄 순 없었습니다.”
강병원은 언뜻 듣기에는 조리 있어 보였으나 정호준은 강병원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치부를 숨기고 포장지만 화려하게 치장한 물건을 넘기려는 정부의 행태에 정호준의 안색이 굳었다.
“제가 미국에서 활동한다고 한국에 소식통이 없을 거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3분기 동안 하이넥스가 적자를 기록했다는 걸 모를 것 같습니까? 경기가 나쁘니 당연히 내년에도 적자가 이어지겠죠.”
정곡을 찌른 정호준의 말에 강병원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불쾌하군요. 그만 나가 주시죠. 김명호 대통령님께 오늘 일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호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강병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이넥스 분명 탐나는 물건이긴 한데, 아직은 아니야.’
정부 돈으로 적자를 감당할 기회가 있는데, 굳이 지금 인수해서 적자를 감당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