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70)
정치와 경제는 분야가 다르기에 정치가 경제에 끼어드는 건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정치는 따로 갈 수가 없었다.
정치가 혼란스러운데 경제가 안정되고 발전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독재를 하든 민주적으로 정치를 이어 가던 정치가 안정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을 논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게 바로 인도와 중국이었다.
인도와 중국은 10억을 훌쩍 상회하는 인구를 가지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다. 경제 발전이 가져오는 부작용으로 저조해진 중국의 출산율 때문에 2022년 기준 인도가 중국의 인구를 추월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어쨌건 두 나라의 인구는 대동소이했다.
영토가 넓기로 세계에서 손에 꼽혔고 넓은 영토에 풍부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점도 비슷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막대한 규모의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어, 발전 정도와 비교해 GDP 총액이 높다는 점도 비슷했다.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두 나라지만 발전 과정이나 발전 속도는 천지 차이라 불려도 무방할 만큼 큰 차이가 존재했다.
2017년 기준 중국과 인도의 GDP 총액 차는 5배 이상 벌어졌고, 2021년에는 7배나 벌어졌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G2라 불리며 패권 경쟁을 벌이는 수준까지 성장했는데, 인도는 지역 강국 이상의 위치를 확립하지 못했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두 나라가 이렇게 분명하게 격차를 보이게 된 이유는 바로 ‘정치’였다.
중국은 공산당 내부에 파벌이 존재할지언정 겉으로는 일당 독재를 이어 갔다. 지방이 감히 중앙을 향해 반항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중국에선 공산당과 중앙의 힘이 강력했다.
반면, 인도는 중앙의 힘이 강력한 중국과 달리 지방의 힘이 강했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할 초창기만 하더라도 인도 정부도 중앙의 힘이 꽤 강력했지만, 종교 때문에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벌였다가 파키스탄이 떨어져 나가고, 이후 벌어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카슈미르 지역 일부를 넘겨주게 되면서 정부의 힘이 많이 죽게 되었다.
‘분열해서 지배하라.’라는 말을 슬로건으로 걸고 ‘언어’, ‘종교’, ‘인종’, ‘민족’, ‘지역갈등’ 등 온갖 명분을 활용해 자신들의 슬로건을 이행하던 그 나라에 무려 100년 가까운 세월을 식민 지배당한 나라가 인도라는 나라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독립을 했다고 10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지역갈등을 일으키고 하나로 힘을 모으지 못하게끔 지방에 힘을 실어 준 영국의 공작이 무(無)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뜩이나 한 지역만 넘어가도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게 인도라는 나라였다.
처음 독립할 때야 초창기 정부가 가진 힘에 눌려 불만이 있어도 조용히 삭힐 수밖에 없었지만 정부가 연이은 헛발질로 힘과 무게감, 정치 동력을 잃은 후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지방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주 정부’에게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헌법에 명시된 ‘주 정부’의 권한은 강력했고, 인도는 수십 개의 정당이 존재하는 이합집산 상태가 되었다.
하나의 정당만이 군림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강력한 통제가 가능한 국가와 수십 개의 지방이 인도라는 나라의 이권을 다투며 한 지역 안에서도 십수 개의 정당이 싸우고 있으니, 중국처럼 빠르게 발전하지 못한 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비슷한 체급을 지닌 이웃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나아갔고 앞으로도 더 멀리 나아갈 거라 믿었던 중국이란 나라에 암운이 들이닥쳤다.
중화의 영광이 다시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고자 개최한 세계의 잔치를 앞두고 중국 공산당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 * *
미츠바시와 미츠이나의 곁에 일본 정부 관계자가 붙었던 것처럼 중국 또한 협상에서 정부 관계자를 동반했다. CDS를 계약을 체결한 은행만 6곳에 달하고 스와프의 규모는 108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이 그들이 맨날 하는 레퍼토리처럼 대국(大國)이라 할지라도 일본 정부보다 더 급하면 급했지 똥줄이 타지 않을 리 없었다.
당연히 정호준을 찾아온 면면들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부부장급이 찾아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찾아오는 정부 관계자의 직급이 높아졌다. 어느 순간 재무부 부장, 상무부 부장 직책을 맡은 이들이 찾아왔고, 오늘에 이르러선 중국의 부주석이 은행 관계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것도 공산당 원로 셋을 대동하고서 말이다.
정호준을 방문한 부주석의 이름은 사진원. 2008년 3월 중국의 부주석으로 취임 후 후민타오 주석에 이어 중국의 일인자가 되고 3연임을 밀어붙이며 사황제라 불리게 될 남자였다.
뭐, 찾아와서 하는 말은 지금껏 그래 왔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호준의 답변도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서구권 은행이나 일본 금융권, 자국인 미국 은행들에도 8.5배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조차 8.5배를 받아들였는데 중국에만 특별대우를 해 드릴 이유가 있습니까?”
“정 대표님이 말하는 국가들은 기껏해야 하나둘에 불과합니다. 중국은 6개지요. 스와프 규모는 무려 108억 달러에 달합니다.”
정호준의 질문에 지금껏 정호준을 찾아왔던 중국 관계자들과 똑같은 대답을 한 사진원은 서류를 한 장 꺼내 정호준에게 건넸다.
‘이건!’
정호준의 눈이 잠깐이지만 커진 것을 놓치지 않은 사진원은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미국에 카트리나가 들이닥쳤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 서브프라임 디폴트 때 한 번. 중국에 원한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두 번이나 공격하셨더군요.”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며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시도한 두 번째 원유 선물은 걸리지 않은 걸 확인한 정호준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원한이라뇨? 복권에 당첨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일개 소시민일 뿐인 제가 중국에 원한을 가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정 대표님의 행보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우리 중국에 원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전문 투자자입니다. 투자에 감정을 싣진 않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긴 했지만 포커페이스를 잃진 않았다. 2003년 회귀한 뒤로 5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정호준도 이런저런 경험을 하며 많이 성장했다. 자신의 감정을, 특히 적의라는 감정을 들킬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정호준은 저들이 알아낸 진실을 거짓이라 치장하지도 않고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제가 중국 선물시장을 공격하고, 중국계 은행으로부터 CDS를 구입한 건 중국이 대국이기 때문입니다.”
정호준은 그들이 항상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사용해 줬다.
“큰 나라인 만큼 국가의 체력이 압도적이죠. 먹을 것도 많고요.”
“이 왕비단이!!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진정하게!! 협상은 해야 할 거 아냐!!”
니들이 큰 나라라서 더 중국을 노렸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는 정호준의 태도에 화가 난 원로 하나가 정호준을 삿대질하며 욕했다. 함께 온 원로들이 그를 진정시켰다.
잠깐 진정되나 싶었지만.
“제 뒤에는 미국이 있고, 제가 중국에 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무사할 것 같은데요?”
정호준의 뻔뻔함에 삿대질을 하며 욕했던 원로는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제 걱정을 하시기보단 공산당 걱정을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제 스와프야 기껏해야(?) 1,000억 달러 안에 해결될 일이지만, 리만 브라더스는 다르잖습니까?”
부채가 6,700억 달러에 그쳤던 1회 차 때와 달리 정호준 때문에 모기지론 파생 상품과 리만 브라더스 자산을 바꾼 탓에 8,000억 달러가 넘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한화로 환산하면 1경에 가까운, 큰돈을 번 정호준조차 쉽사리 상상이 안 되는 돈이었다.
1경이라는 돈은 중국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중국 공산당이라도 감히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리만 브라더스 사태 인수도 정호준 대표께서 벌인 짓입니까?”
“어디에 팔라는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다만 모기지론에 위기가 있을 것을 예측한 만큼 장인께 리만을 매각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은 드렸습니다.”
정호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금껏 욕하고 얼굴을 붉히던 다혈질 노인은 자신을 만류하던 다른 원로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정호준에게 달려들었다.
“대표님의 안전을 위해 더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놔 이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중화의 영광을 망친 저 개자식을 내가 오늘 죽여 버리겠어!!”
정호준의 경호팀 팀장 브리안은 살기를 띠며 달려드는 원로를 제지했다.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온갖 고성을 내질렀지만, 대기하고 있던 다른 경호팀까지 나서서 원로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아 말씀드리기 좀 민망하지만, 책임을 피할 방법이 있긴 합니다.”
“이야기해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역사를 따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역사요?”
“동서고금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희생양을 내세우죠.”
희생양을 내세우라는 말과 함께 정호준은 준비해 둔 서류를 건넸다. 지금처럼 여럿이 올 줄 알고 몇 부 인쇄해 뒀기에 서류뭉치는 원로들에게도 주어졌다.
서류 안에는 사진원의 경쟁자인 보시위안이 저지른 비리가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거주했고, 2000년대 들어서며 한국이 중국의 중요 무역 국가가 된 만큼 한국은 학생들에게 중국에 대해 알라고 공부를 시킵니다. 저도 중국이란 나라에 관심이 많았기에 공부를 좀 했죠. 중국 공산당은 크게 3개로 파벌이 갈라져 있고, 다음 주석은 태자당의 차례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주석님과 보시위안이 대권을 놓고 다투는 중이라죠?”
2008년은 사진원과 보시위안이 차기 대권주자로서 한창 뜨거운 경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공산당 원로들이 보시위안을 안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대체 어디서?”
부주석이 되어도 보시위안이 탈락한 뒤 사실상 차기 주석 자리를 확고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에도 권력에 대한 탐욕을 숨기며 권좌에 앉기 전까지 겸손하게 처신한 사진원과 달리, 태자당 내 경쟁자인 보시위안은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행보로 유명했다.
보시위안은 2007년 충칭시 공산당 서기가 된 이후, 지방 정부의 중앙 정부 정책 간여와 반(反)덩샤오핑 군중 노선, 정통 공산주의적 이미지가 강조되는 ‘충칭 모델’을 기획하였으며 충칭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창홍타흑(唱紅打黑) 등을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라를 후퇴시켰던 문화대혁명이 일종의 역린으로 자리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이런 보시위안의 행보는 거슬리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공산당 당내에서도 인심이 좋지 않은 이인데,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시고 축출하시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상무부 부장직을 맡았으니, 원로들과 주석께서 그럴 의지만 있으시다면 엮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