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68)
스비르 은행 관계자와 함께 협상팀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러시아 정부 관계자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러시아 은행을 공격한 것이 유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관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했어서 더 유감이라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중 하나를 내뱉는 백인 중년 남성의 말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국영은행이라 그런가?’
러시아 정부는 정호준이 부패한 러시아 정치 상황을 이용해 정부가 받아야 할 지분을 줄인 건 달갑지 않게 여겼으나 그 이상의 악감정은 없었다. 연임 후 한 번 쉬었다가 다시 2008년에 재집권한 푸틴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이룩한 부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재산을 빠르게 일구어낸 정호준의 능력에 감탄하고 흥미를 품을지언정, 정호준이라는 인간에게 원한을 갖진 않았다.
광산이나 유전이라는 것이 찾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거지, 발견하고 난 다음부터는 쏠쏠한 캐시카우가 되어 주는 현실을 생각하면 광산을 세 개나 터트린 정호준의 행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야 되는 게 맞았으나.
‘광산 채굴로 나오는 소득을 모두 해외로 빼돌리는 건 아니니.’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는 수호이로그 금광 개발 및 채굴 작업에 러시아인 광부들을 고용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해 주고, 광부들이 고된 일을 마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광산 인근 인프라 설계에 돈을 투자한 정호준의 행보에 플러스 점수를 준 것.
게다가 사기업인 폴류스와 공기업인 일로샤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기업과 러시아 정부, 3번째 임기를 시작한 독재자, 푸틴의 편의를 봐주며 이득을 적당히 돌려 주기까지 했다.
나름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한 입장에서 보면 뒤에서 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크렘린에서 너무 노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돈이 돼서 찔러 본 거지, 러시아에 악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러시아가 감당할 국력을 갖고 있는 나라라 생각해서 선물을 구입한 겁니다.”
그 이름이 워낙 공포에 대명사인지라 강대강으로 반응하기보단 살짝 저자세로 나가며 체면을 치켜세워 주었다.
“글쎄요, 장담하기 어렵군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크렘린의 의중에 달린 일이니까요.”
“크렘린이라면 제가 악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려 줄 거라 믿습니다. 나는 내 조국이었던 나라도 돈이 될 것 같아 털어먹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정호준은 미리 마련해 두었던 면죄부를 꺼내 들며 자신을 변호했다. 이후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이 시작되었다.
“우리 스비르가 발행한 스위프 90억 달러에 매입하겠습니다.”
“그 가격에는 곤란합니다. 37억 달러는 더 챙겨주시죠. 영미권 은행들과 BNP, 도이치가 스와프를 얼마에 사 갔는지, FSB나 SVR에게 전해 듣지 못하신 겁니까?”
정호준은 6배를 부른 스비르 은행의 제안을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듯 단칼에 거절했다.
“크렘린이 나를 좋게 봐 주었었고, 이번 사태로 배신감을 느껴 화가 나셨다고 해도. 내 몫을 줄일 생각은 없습니다.”
“…….”
서구권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는 크렘린을 언급했음에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정호준의 대답에 스베르 은행 관계자 알리바 스미르노프는 침묵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대의 배려는 지급 수단이 반드시 달러가 아니어도 된다는 정도입니다.”
“달러가 아니어도 된다니, 그럼 루블화로 받아 가겠다는 말이오?”
외환보유고를 지켜 주겠다는 말에 알리바 스미르노프는 눈에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반색했으나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표명했다.
고개를 젓는 것을 보자마자 밝아졌던 표정은이 다시 어두워졌다.
“루블화로 받아 가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받아 가겠다는 말이오?”
“자원으로 받아 가겠습니다. 금괴나 은괴, 동괴, 철괴로 값을 치르시죠. 귀국에 넘치는 게 자원이니, 부담이 좀 덜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배려입니다.”
광물로 대납해도 괜찮다는 말에 스미르노프의 표정이 다시 한번 풀렸다. 넘쳐나는 자원으로 대신 값을 치러도 된다는 말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정호준이 러시아를 배려해 준다고 생각해서일까? 알리바 스미르노프와의 협상은 이후부터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스미르노프가 스와프의 가격을 낮춰 보고자 몇 차례 더 찔러 봤지만, 정호준은 그때마다 철벽을 치면 안 된다고 응수했다.
그렇게 러시아 국영은행인 스비르 은행에서 매입한 스와프 정리를 마쳤다.
‘고정 가격으로 사들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
물납하기로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금, 은, 동, 철의 현재가보다 5불 정도 더 높은 값을 쳐 주고 고정으로 공급받아 보고자 했지만, 스비르 은행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물자산의 값이 배 이상 뛸 거라고 추측하진 않더라도, 정호준의 수요로 인해 값이 뛸 것을 예측한 듯 보였다.
좀 더 큰 이득을 챙기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내 털어 버렸다.
* * *
스비르 은행 관계자와 협상을 마친 후 1주일 뒤쯤 크레던스 스위스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스비르 은행 합의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호준이 직접 협상에 나선 스비르 은행과 달리 크레던스와의 협상은 정호준이 대동한 실무자들과 크레던스 스위스 측 실무자들이 부딪쳤다는 것 정도였다.
“이미 한번 구조조정을 해서 자산 규모나 은행의 몸집이 많이 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디폴트 때문에 경기도 좋지 않고요”
“구조조정을 이미 한번 끝냈으니 견실한 자산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금융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금융기관들은 모두 냉정하다. 법인을 나눴다가 합치는 과정에서 크레던스 스위스는 퍼스트 보스턴의 부실 자산 포함 규모를 어느 정도 줄였다.
처음 협상 자리에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크레던스 스위스는 스와프를 탕감하는 것 외에도 추가로 매각금을 받겠다고 주장했었으나, 정호준이 대동한 실무자들 또한 만만치 않은 인재들이었다.
“어차피 크레던스 측에서는 슬슬 퍼스트 보스턴에서 발을 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융기관들은 적자를 보거나 둔화를 보이는 것들은 일찌감치 정리하곤 했고 JHJ Capital 측 실무자들은 그 사실을 언급했다.
“우리 JHJ Capital은 퍼스트 보스턴을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입니다. 아쉬울 게 없다고요.”
JHJ Capital 측 실무자들은 자신들이 ‘갑’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협상을 파투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정호준이 데려온 실무자들은 유리한 입장으로 서 있는 만큼 입장까지 활용해 고지를 점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퍼스트 보스턴을 가져가면서 돈까지 더 내라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처음 돈을 더 받겠다고 주장하며 줄다리기를 했던 상황이 언제부터인가 크레던스 스위스 측에 ‘돈을 더 받아 내냐’, ‘못 받아 내냐’로 바뀌었다.
정호준은 직원들의 활약상을 조용히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협상은 하루에서 끝나지 않고 몇 날 며칠 계속됐는데, 결국 이득을 본 건 계속해서 우위를 점했던 JHJ Capital이었다.
[‘JHJ Capital’ 크레던스 스위스 인수!]
10억 달러를 추가로 받아 내며 많지는 않지만(?) 돈을 받고 은행을 인수하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면 의아할 수밖에 없을 인수 사실이 기사로 나갔다.
* * *
2008년 5월, 연준은 기간 경매 시설을 통해 1,500억 달러를 추가로 경매했고, 6월에 들어서며 추가로 경매했고, 기간 경매는 어느새 1조 달러를 돌파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정호준은 4월부터 유독한 부채를 대신 짊어지던 연준의 행보를 이용하기 위해 장인인 찰스 주니어와 처조부인 찰스 로슬러를 찾아갔다.
“스와프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걸로 은행 3개를 인수하려 합니다. 인수금이 필요하다면 돈을 추가로 낼 의지는 있지만 큰 금액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연준이 ‘와코르비아’, ‘인데믹’, ‘워싱턴 레시프로’의 모기지론을 부담하고 이번 인수를 승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정호준은 결혼하고 아니 로슬러 가문과 관계를 맺은 후 처음으로 부탁을 했다.
그것도 조금 무리한 부탁을.
정호준의 주도하에 JHJ Capital은 와코르비아 은행에 25억 달러, 인데믹 은행과 워싱턴 레시프로 은행 20억 달러의 스와프를 사들였다. 권리를 행사하게 되면 552억 5천만 달러, 한화로 약 70조에 달하는 수익을 얻게 되었을 거다.
정호준이 언급한 은행은 모두 전통과 중견급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은행들이다. 552억 달러는 분명 천문학적인 돈이었지만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도 부채탕감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는데, 20~30조 원에 인수가 될 리는 없었다.
모기지론과 파생상품 때문에 흔들려서 그렇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552억 달러를 모두 사용해도 은행 하나를 인수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정호준은 ‘JB 로건체스트’가 베어스프링스를 헐값에 인수한 것처럼 은행 세 개를 헐값에 집어삼키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찰스 로슬러를 찾아와 그 뜻을 밝힌 거다.
정호준이 도와달라고만 했을 뿐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정호준의 부탁은 지금껏 그들을 대가를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알겠네, 내 힘써 보지. 하지만 아마 인수금은 내야 할 걸세.”
“100억 달러까지는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
본래라면 그의 텃밭인 ‘DT그룹’이 흔들리고 ‘AOG’, ‘메릴리치’가 망해 이사장 경쟁에서 탈락하게 됐을 찰스 로슬러는 모기지 디폴트가 시작된 뒤로 로슬러 이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네. 그 정도면 로건보다는 훨씬 낫구먼.”
BA와 골드만에게 구제금융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찰스는 정호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수백에 달하는 수의 재단으로 분산시켜 눈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로슬러 가문이 갖는 영향력 실로 거대했고, 그 거대한 입김은 고스란히 연준으로 흘러 들어갔다.
6월 초, 연준에서 사람이 나왔다.
[JHJ Capital, 25억 달러에 와코르비아 은행 인수!]
[JHJ Capital, 22억 달러에 인데믹 은행 인수!]
[JHJ Capital, 22억 달러에 워싱턴 레시프로 은행 인수!]
JHJ Capital이 69억 달러에 부실은행(?) 세 곳을 인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인수인계를 완벽하게 마친 뒤에 또 한 번 기사가 나갔다.
[JHJ Capital, JHJ 유니버셜 뱅크 창립!!]
정호준의 JHJ Capital은 와코르비아, 인데믹, 워싱턴 레시프로, 퍼스트 보스턴. 4개 은행을 묶어 하나의 법인, 거대 은행을 출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