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66)
입가에 미소를 띠며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나눠 보자는 정호준의 말에, 미팅룸에 앉아 있던 은행 관계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나빠졌다.
“JB의 노먼 헤이즈입니다. 본격적인 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썩은 표정을 짓는 이들 중 이제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 보이는 노년 남성 한 명이 정호준의 말을 끊었다.
“다 대답해 드릴 수 있다고는 확답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 뭘 그렇게 궁금해하시는지 들어 볼까요?”
“저는 대표님께서는 컨트리 와이즈와 베어스프링스가 망할 거란 걸 예측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자신을 노먼 헤이즈라 소개한 노년 남성의 물음에 정호준은 마이클 스팬서와의 두 번째 미팅을 떠올렸다.
* * *
정호준이 마이클 스팬서의 능력과 안목을 칭찬했지만, 마이클 스팬서가 망하는 곳에 아예 투자를 안 한 건 아니다. 마이클 스팬서는 2008년으로 해가 바뀌기도 전에 이미 파산했던 ‘컨트리 와이즈’와 3월 16일 가지고 있는 자산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며 헐값에 인수된 ‘베어스프링스’에도 CDS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사들였었다.
두 번째 미팅에서 직접 투자금을 입금하고 스팬서의 펀드가 구매했던 스와프를 모두 사들이곤, 자금을 투입해 서구권 은행에도 추가로 CDS를 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한가지 요구를 추가로 했는데 그 요구가 바로 ‘베어스프링스’와 ‘컨트리 와이즈’의 정리였다.
“제 생각에 동의한다면서 왜 스와프를 매각하라는 겁니까?!”
정호준의 요구에 마이클 스팬서는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었죠? 저도 스팬서 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지, 무뚝뚝한 이가 정호준의 말을 끊어 먹으며 질문을 던졌다.
“적당한 선에서 은행과 합의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값을 부를 때까지 줄다리기를 이어 갈 생각입니다. 은행들과의 신경전은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될 겁니다. 모기지론 디폴트가 본격화되는 시기는 아마도 2007년 2분기부터이니, 신경전을 벌이다 보면 해가 넘어가게 되겠죠.”
“지금도 위태위태한데, 앞으로 1년 이상 더 시간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베어스프링스나 컨트리 와이즈는 2008년을 보지 못하고 파산할 가능성이 큽니다.”
정호준의 말을 듣고 난 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마이클 스팬서의 얼굴이 점점 제 색을 찾았다. 잠깐 흥분해 본의 아니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의 이성은 정호준이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왔다.
스와프의 값을 치러 줄 은행이 파산하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프리미엄을 계속 내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스와프 가치가 사라지면 CDS 계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한 돈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금값으로 변모했던 스와프가 그냥 하나의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는 셈.
“베어스프링스와 컨트리 와이즈가 파산하기 전에 그들에게 사들인 스와프만 정리하면 되잖습니까?”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처음이라는 건 언제나 일종의 기준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손해 보지 않겠다고 베어스프링스와 컨트리 와이즈가 원하는 값을 치르고 스와프를 파는 건, 다른 은행들에도 버틸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주겠죠.”
정호준은 잠깐 심호흡을 한 뒤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CDS 계약을 한 번이라도 청산하는 순간 그 가격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쟤는 적당한 선에서 끝내 줬으면서 왜 나한테 이래?’
시장바닥이나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같은 논리지만 어쨌든 이러한 논리로 우길 수 있게 된다. 특히 정호준이 돈을 받아야 할 대상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우기기를 가장 잘하는 나라 ‘중국’이지 않은가?
다만 이러한 우기기는 정호준도 사용할 수 있었다.
‘쟤한테 이렇게 받았으니까 너한테도 이 정도는 받는 게 맞잖아. 네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처음 협상이 가장 중요했다. 최소한 자본의 주인인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을 만드는 것을 꺼리는 정호준이 2008년까지 줄다리기를 이어가며 신경전을 계속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 베어스프링스와 컨트리 와이즈의 CDS를 정리하고 잠깐 손해를 보는 게, 이후 있을 협상에서 양보할 명분이 되어 주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 줬고 정호준의 설명이 이해가 아예 안 갈 정도로 아주 논리에서 벗어난 말은 아니었기에, 마이클 스팬서는 납득을 하고 두 회사와의 CDS 계약을 정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마이클 스팬서가 조롱거리로 내몰리긴 했으나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스팬서에게는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손실을 기록하며 또 한 번 월가의 조롱거리가 된 덕분에 다른 은행들과 CDS 계약을 맺고 CDS 계약을 체결한 은행에 추가로 CDS를 사들이기 쉬워졌다.
그때야 마이클 스팬서를 한껏 비웃으며 조롱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정호준과 마이클 스팬서의 행보가 옳았다. 본래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거다.
* * *
회상을 마친 정호준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판별해 내겠다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노먼 헤이즈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과 같은 동양권 문화에서는 보통 겸손을 강조하지만 유럽이나 북미권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 어필하는 게 겸손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예, 지금의 상황을 얼추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되는 건데, 베어스프링스는 너무 무리를 하더라고요. 베어스프링스나 컨트리 와이즈가 2008년까지 버틸 체력이 부족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정호준의 대답을 들은 관계자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역시!’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협상을 하고 치워야 해. JB가 그랬던 것처럼 스와프를 통해 잡아 먹힐 수도 있다.’
‘명분과 자산을 손에 쥐고 움직이는데, 과연 차일로드가 막아 줄 수 있을까?’
‘비서 일을 즐겁게 하는 아리아 로슬러를 보면 로슬러가의 영애와 사이가 나쁜 것 같지도 않은데?’
‘찰튼 로슬러 주니어님을 위해서라도 지금 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찰튼 님의 기반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가 위험해.’
관계자들은 저마다의 입장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을 해 댔다.
연준이 구제를 시작하기 전에 베어스프링스가 망한 건 베어스프링스의 체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로건가가 그렇게 진행되길 원한 탓도 있었다.
눈앞의 남자 정호준은 로건가와 함께 미국 재계를 주름잡는 로슬러가의 사위다. 로건가가 장막 뒤에서 움직여 연준을 설득하고 베어스프링스와 베어스프링스가 가진 자산들을 헐값에 인수했듯, 정호준도 로슬러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얼마든지 똑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이제 줄다리기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스와프를 매각해 주십시오. 7배 쳐 드리겠습니다.”
3배, 4배, 5배까지 올라왔던 스와프의 값은 7배까지 상승했지만 정호준은 아리아가 타 준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10배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정호준은 스와프 매수를 위해 처음 미팅을 잡았을 때부터 앵무새처럼 일관되게 10배만을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도 기계처럼 되풀이만 할 뿐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협상이 지금껏 이어진 것.
“조금만 양보해 주십시오.”
“결국 연준은 구제금융을 할 거고, 유럽에서도 정부와 EU가 나설 겁니다. 부동산이 안정되면 스와프의 가치가 폭락합니다.”
관계자들은 일방적으로 자비를 구하기도 했고 협박을 하며 한발 물러서 줄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정부가 나서면 금방 안정될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너무 낙관적인 거 아닐까요? 저는 미국에서 시작된 이 위기가 세계로 뻗어나갈 테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예측합니다만?”
미국과 자본적으로 엮인 게 많은 만큼 유럽 곳곳에서 암울한 상황이 속속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 후에도 설전이 계속 오갔고,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섰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양보하신 건 사실이니 저도 조금 양보해 드리죠. 68억 달러에 스와프를 청산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나온 6개 은행 중 크레던스 스위스를 제외한 ‘BA’, ‘골드만식스’, ‘HSB’, ‘BNP파리’, ‘도이치’에 각각 8억 달러 상당의 스와프를 사들였다. 줄곧 10배만을 외치던 정호준이 처음으로 한발 물러났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여기서 더 물러나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아, 그리고 크레던스 스위스는 153억 달러를 주셔야 하는데, 납부 가능하십니까?”
“안 된다 그러면 따로 더 깎아 주실 의향 있으십니까?”
다른 5개의 은행과 달리 15억 달러에 달하는 스와프를 판매한 크레던스 스위스는 127억 5천만 달러, 한화로 16조에 달하는 돈을 JHJ에게 지불해야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그럴 순 없죠. 그러면 다른 은행들이 억울하잖아요? 크레던스 스위스의 미국법인인 퍼스트 보스턴을 저희 JHJ Capital에 넘기시죠. 저희가 인수하겠습니다. 물론 모기지 관련 채권은 모두 크레던스 스위스가 부담해야 합니다.”
크레던스 스위스는 2004년 ‘크레던스 스위스’, ‘크레던스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 ‘빈터투어’로 분리되었다가 2006년에 다시 법인을 합쳤었다. 정호준 크레던스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를 법인 분리해서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153억 달러에 퍼스트 보스턴을 집어삼키겠단 말입니까?”
“실무자 협상을 통해 값이 부족하다면 값을 더 치르긴 해야겠죠. 그냥 알아 두시라는 겁니다.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귀사에서 어떤 방법을 선택하시던 우리 JHJ는 상관없으니까요.”
정호준은 되도록 퍼스트 보스턴을 넘겨주는 쪽으로 진행되길 바랐으나 굳이 이 자리에서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기 위해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시간을 주십시오. 제게 주어진 권한을 넘어선 제안입니다.”
돈을 넘어 법인을 넘겨줘야 하는 상황에 크레던스 스위스 관계자는 답을 미루었고, 10배만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정호준 때문에 이미 8배까지 올린 상태였기에 다른 은행 관계자는 한숨을 내쉬며 정호준이 제시한 가격으로 CDS를 사들이겠다는 항복 선언을 내뱉었다.
합의를 마친 뒤 하나둘 입금이 시작되었다.
- $34,000,000,000
JHJ Capital이 첫 수확은 340억 달러. 한화 42조 5천억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
[JHJ Capital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CDS 채권 공매도로 340억 달러의 수익 창출!]
JHJ Capital의 천문학적인 수익은 가장 먼저 월가에 퍼져 나갔다. 이윽고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 신문 일면에 정호준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