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65화 (165/335)

16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65)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도로 위로 똑같은 브랜드, 똑같은 색상의 차량 5대가 일렬로 나란히 도로를 달렸다. 중심을 이루는 차를 기준으로 4대의 차량이 양옆에서 달렸다.

다양한 브랜드가 격한 경쟁을 이어 가는 미국 자동차 시장을 생각하면 조금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량 이전에 대통령급 의전을 받는 듯한 모습 자체가 살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엄마 저거 봐.”

신기한 광경에 운전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하나같이 일련의 무리를 손가락질했다.

차량의 주인은 월가에서 개최되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정호준과 아리아였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컨퍼런스가 개최되는 건 나흘 후인 14일인데 나흘 전인 3월 10일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과 이동 수단으로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를 선택했다는 것.

미국이 아무리 넓은 국토를 지닌 국가라 한들, 비행기를 타면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데 반나절 이상 걸리는 곳은 없다. 특히 시카고에서 뉴욕까지는 전용기를 타면 중간에 기류를 만나더라도 네 시간 안에는 무조건 도착할 짧은 거리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요란하게 경호를 받으며 나흘이나 일찍 나온 이유는 당연히 자신의 아이를 배에 잉태한 아리아 때문이었다.

임산부에게 비행이 좋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의학 사실 몇 가지를 주치의로부터 전해 들은 정호준은 비행기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고속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이 이상한 광경의 주범 중 하나인 아리아는 차 안에서 정호준을 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유난 떨 거 없다니까요! 여러 사람 불편하게.”

임신 13주 차를 지난 아리아는 유산 위험이 큰 임신 초기(12주 차 이전), 혹은 조기 분만할 가능성이 있어 비행기 탑승을 자제시키는 시기가 아니었다.

트리오플의 경호팀, 주니어가 붙여 준 경호팀과 임신 후 24시간 대기하는 주치의들까지, 정호준이 아리아와 함께 움직일 때마다 서른 가까운 인원이 움직인다. 비행기 타고 가면 3시간이면 갈 걸, 운전 시간도 길면 피곤하다고 중간에 잘라서 하루 쉬어 줄 거라는 정호준의 계획에 아리아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아의 시선이 팔불출을 보는 한심한 눈초리란 걸 인식했음에도 정호준은 굴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 아내와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는 일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죠. 그리고 나도 경호팀이랑 주치의들을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저들의 일이잖아요?”

장인인 찰스가 보낸 경호팀의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정호준을 경호하는 트리오플의 경호팀은 한 명 한 명이 초일류다. 초일류인 만큼 당연히 그만한 연봉을 받는다. 정확한 수치는 인사팀이나 회계사들이 더 잘 알겠으나 보너스, 수당 합치면 대략 이십만 달러는 받아갈 거다.

비싼 월급을 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나?

“참나.”

능청스러운 정호준의 대꾸에 아리아는 의도적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결혼하기 전, 더 정확히는 아이를 갖기 전과 후가 너무 달라졌지만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챙겨 주는 지금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진 않았기 때문.

“그리고 고집을 부린 건 내가 아니라 아리아예요.”

집에 있으라는 정호준의 권고를 무시한 건 아리아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네.’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다는 혼잣말을 듣고 정호준을 추궁한 아리아는 3월 14일 있을 컨퍼런스 이후 또 한 번 정국이 변하게 될 거라는 정호준의 대답을 들었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자 정호준은 본격적으로 벌여 놓은 일들을 수확하기 위해 뉴욕에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아리아는 자신도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싶다고 졸랐다.

처음에는 아리아를 설득해 보고자 했지만 아리아는 완강했고 결국 백기를 든 건 정호준의 몫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의 별조차 따다 주고 싶은 게 내 아이를 가진 여자에 대한 남자의 심정이었기에 정호준은 아리아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차를 9대나 동원한 채 뉴욕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 * *

시카고에서 뉴욕까지는 차로 이동하면 평균 13시간 정도 걸린다. 차가 막힌다고 가정해도 14~17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하루만 고생해서 뉴욕에 도착한 뒤 쉬어도 될 것을 정호준은 굳이 이틀로 나누었다.

어쨌든 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정호준들은 장인인 주니어의 저택에서 머물렀다.

정호준과 결혼을 하며 동양인도 상관없다는 듯 정략결혼을 시키긴 했지만, 아리아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미국의 전통 부호 가문의 영애였다. 로슬러가는 비슷한 시기 금융 쪽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로건가와 한 세기 더 전부터 유럽에서 세를 떨친 차일로드가와 함께 수면 밑에서 세계 경제를 제 입맛대로 움직이는 흑막(?)이었다.

그런 가문의 상속녀답게 뉴욕에서 땅값 비싸기론 제일가는 맨해튼에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리아와 정호준은 아리아의 명의로 된 집에서 머무르기보단 장인인 주니어의 저택을 택했다.

“어서 오게. 아리아는 좀 어떤가?”

“입덧이 많이 심했는데, 3월 들어서면서는 좀 나아졌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먼.”

이유는 간단했다. 정호준이 아리아에게 팔불출같이 구는 것처럼 장인인 주니어도 팔불출 끼를 드러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10일에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도착한 건가?”

“비행기가 산모나 아이한테 좋지 않다고 해서요. 장시간 차에 있는 것도 부담될 것 같아서 이틀로 나눠서 이동했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잖습니까?”

“잘했네!! 무리해서 좋을 게 어딨겠나?”

왜 이렇게 늦었냐고 혼내는 듯한 기색은 금방 사라졌다. 육십이 넘은, 근엄한 모습을 보여 왔던 주니어가 빠른 태세 변환을 보였다. 우드르급 태세전환이랄까?

‘손자, 손녀 사랑은 할아버지잖아. 이해해야지.’

정호준은 자신이 눈앞의 장인처럼 구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닐 거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걸 정호준이 다시 한번 증명했다.

* * *

뉴욕에 당도한 다음 날 아리아와 데이트를 즐기며 휴식을 취했고, 13일 마이클 스팬서를 만났다.

“뉴욕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이 참석한다는 컨퍼런스에 가 볼 생각이라서요. 함께 가 볼래요? 2005년 당신이 부실을 발견하고 신용부도스와프 상품을 만든 지 얼마 안 된 시점부터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마크 베리가 베어스프링스의 반대 측에서 연설한다던데.”

“마크 베리라.”

월가에는 마이클 스팬서처럼 부동산 부실을 알아채고 신용부도스와프를 미리 사들인 투자자들이 몇 존재한다. 남들이 ‘YES’라고 외칠 때 ‘No’를 외칠 수 있는 이들이었고. 마크 베리는 그중에서도 정호준과 마찬가지로 스와프를 매각하지 않고 쥐고 있는 유이한 남자였다.

“한 번쯤 그 사람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긴 했습니다.”

마이클 스팬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호준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인원은 총 넷이 되었다. 정호준, 아리아, 마이클 스팬서, 그리고 조나단.

베어스프링스 측에서는 월가의 낙관론자로 명성 높은 이를 대리인으로 삼아 참석시켰고 마크 베리와 설전이 오갔다.

“은행이 거대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한 은행이 망한 적은 없습니다. 베어스프링스가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갈 거라 믿습니다.”

베어스프링스에서 세운 전문가는 낙관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정호준은 마이클 스팬서나 아리아, 조나단이 옆에 있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게 문제죠. 법을 우회했으면서 법을 지켰다고 이 사태를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오만함. 마크 베리도 이미 머릿속으로는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마따나 미국의 은행과 증권사, 투자사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망하게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도 연준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움직였잖은가?

“베어스프링스나 다른 대형은행들이 모르는 게 있다면 규모란 건 언제나 상대적인 거란 거죠.”

베어스프링스보다 더 큰 자산을 운용하는 은행들도 이번 디폴트 사태에 허덕이고 있다. IMF 금융위기를 겪은 한국이 그러했듯 대마불사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규모나 정도 빚의 크기에 따라 예외 대상으로 뽑힐 수는 있었다.

비슷한 규모거나 베어스프링스가 규모가 더 크더라도 빚의 규모가 크다면 언제든 제외될 수 있었다.

베어스프링스가 망하지 않을 거란 구체적인 증거로 JB Rorgan이 대출(구제금융)에 합의해줌에 따라 자금의 유동성을 갖추었다고 말했으나 컨퍼런스가 시작하고 난 뒤에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주가의 하락세를 막지 못했다.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유동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거였다.

“맙소사, 30달러 선이 깨졌어.”

컨퍼런스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47달러 선에 머물렀던 베어스프링스의 주가는 30불 밑까지 떨어졌고, 그린스펀이 연설을 위해 연설대 위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29불까지 떨어졌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3월 14일 장을 마감했을 때 베어스프링스는 –47%를 찍었다.

신용이라는 얻기는 어려워도 잃어버리긴 쉽다. 그리고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는 건 신용을 얻을 때보다 더 힘들다. 컨퍼런스 개최된 다음 날인 15일에도 베어스프링스는 주가 하락을 면치 못했다.

[JB Rorgan, 베어스프링스 인수!]

3월 16일, JB 로건체이스가 부실 채권을 헐값으로 인수하며 베어스프링스는 집어삼켰다는 기사가 떴다. 인수 방법은 ‘주식 교환’으로, 주식 교환 비율은 ‘0.05473:1’에 그쳤다. JB Rorgan 주식 0.05473주가 베어스프링스 주식 1주와 교환된 셈이다.

“정말 지독하다, 지독해.”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베어스프링스 주식을 2달러의 가치로 환산된 거였고, 이로써 추산되는 베어스프링스의 인수가는 약 2억 3,000만 달러였다. 베어스프링스가 가지고 있는 맨해튼 본사 건물 가치만 해도 최소 12억 달러는 받아 낼 수 있을 걸 고려하면 10억 달러 이상을 그냥 꿀꺽한 셈이다.

1년 전인 2007년 3월 16일 베어스프링스 주식이 주당 145.48달러였던 것을 생각하면 완벽한 몰락이었다.

* * *

마이클 스팬서가 체결한 상품 계약은 계약서대로만 적용하면 자산을 수십 배도 불릴 수 있는 계약이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계약대로 돈을 다 지급할 수는 없다. CDS를 사들인 마이클 스팬서 이하 다른 투자자들도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고 나간 거다.

은행이 망하면 어차피 돈을 받지 못하니까.

다른 금융인들이나 은행이 미워 CDS를 쥐고 있던 마크 베리와 달리, 정호준은 계속해서 버팅기며 줄다리기를 이어 갔다.

다른 투자자들과 달리 정호준이 줄다리기를 이어 갈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마이클 스팬서 덕분이었다. 마이클 스팬서가 참 대단한 게 상품을 만들고 CDS를 구입할 때 ‘BA’, ‘골드만식스’, ‘HSB’, ‘BNP파리’, ‘도이치’와 같이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버텨내는 견실하고 거대한 은행들을 상대로만 거래를 했다.

CDS를 매입해 공매도를 때렸거나 적당히 합의를 본 다른 월가 투자자들과 달리 저들이 망하지 않을 걸 정호준은 잘 알고 있었기에, 냉정하게 줄다리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베어스프링스의 몰락해 JB에 잡아 먹히는 상황은 정호준과 줄다리기를 이어온 서구권 은행들이 백기를 들게 해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4일에 미팅을 요청하셨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서요. 당시에는 휴식이 필요했었습니다.”

14일에 개최되었던 컨퍼런스는 금융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당연히 다른 대형은행 관계자들도 컨퍼런스에 참석했었고 컨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정호준에게 미팅을 요청했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그들은 이미 자존심을 다 내려놨다는 듯 알랑방귀를 뀌며 괜찮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차를 대접하며 잠깐 사담을 나눈 뒤 정호준이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건 우리의 입장 차가 좀 더 좁혀질 여지가 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정호준만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