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59)
정호준의 제안에, 릭 오리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
인간은 무엇을 이루었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이 갖게 될 무게감이 달라지는 생물이다. 흑인 최초로 백악관의 주인이 될 남자의 사색은 서재에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호준은 릭 오리하가 만들어 낸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도 제 호흡을 유지했다.
‘어우. 부담스러워.’
만약 정호준이 자산의 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이런저런 거물들을 겪으며 성장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본연의 흐름을 잃어버렸을 거다.
“정 대표는 제조업이 무너질 거라고 확신합니까?”
“예, 확신합니다. 제조업에 종사 중인 기업들 또한 월가에서 비롯된 모기지론에 한 손 보탰을 테니까요. 돈 앞에서 초연한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겠습니까?”
독재자들은 물론이고, 공동 소유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본가들까지. 돈이나 힘을 가진 이들은 모두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라 밖으로 본인의 사유 재산을 빼돌린다. 이는 무슨 일이 생겨 현재의 지휘를 잃게 되더라도 결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담긴 행위였다.
개인 자산을 존중하고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경향이 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되는 일을 그냥 두고보기만 할 기업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남들이 돈 벌 때 그걸 지켜보기만 하며 배 아파하는 걸로 끝낼 집단은 기업을 경영할 자격이 없다. 아니, 그 이전에 기업이라 불릴 정도로 사세를 키워 낼 리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확신을 담아 대답하는 정호준의 말에, 릭 오리하는 다시 한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로 나온 즉답이었음에도 릭 오리하는 정호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호준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을 담아 한 말이다.’
눈앞의 남자, 정호준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를 이어 왔고, 지금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진행 중인 부동산 위기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이 중 하나다. 그런 남자가 잠깐의 고민도 없이 확답하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제조 기업의 파산을 그냥 두고만 보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켜야 할 겁니다.”
릭 오리하의 입에서 경고성 발언이었지만 사실상의 승낙 선언이 나왔다.
정호준은 탁자 밑에 놓인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됐다’를 외쳤지만, 그런 허리 밑의 행위와 다르게 허리 위로는 표정 관리를 이어 가며 입을 열었다.
“어떤 간 큰 인간이 백악관의 주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겠습니까? 저는 그 정도로 배포가 크진 않습니다. 단,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 제조 기업 인수는 배꼽이 배보다 커지는 일이 없는 선에서만 이뤄질 겁니다. 그리고 적절한 부채 탕감이 약속된다는 전제는 당연히 필요하고요.”
정호준은 오리하가 백악관에 들어간 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억지를 부리지 못하도록 전제조건을 분명히 했다.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정 대표는 참 쉽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정호준은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청하긴 했으나 자신의 뜻을 물리진 않았다. 그렇게 정호준과 릭 오리하의 밀실(?)에서의 만남은 끝이 났다.
* * *
2007년 6월 이전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연체율 증가로 모기지 대출회사들의 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면, 6월 이후부터는 모기지론을 기초자산으로 파생된 금융상품들에 투자한 헤지펀드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헤지펀드들이 투자했던 파생상품이 바로 MBS(Mortgage Backed Security: 모기지 저당 증권)와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부채 담보부 증권)였다.
MBS는 자산유동화증권의 한 종류로, 모기지 대출을 해 준 은행이 자금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저당권을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이었다. 탐욕 가득한 은행들이 거액의 대출금을 내주고 20, 30년에 걸쳐 소액의 이자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 없잖은가? 그래서 이 모기지를 담보로 하여 채권을 발행한 것이다.
채권을 발행하고 투자자가 그 채권을 사들이게 되면, 채무자의 이자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 투자자에게로 직접 지급되니 은행은 책임 소재에서도 빠질 수 있었다.
은행의 입장에서 MBS 채권은 본래의 대출을 해 주고 받게 될 수익보다는 수익률이 조금 떨어지지만, 수십 년 걸려서 받을 원금과 이자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데다 자금의 유동성이 창출되어 또 다른 고객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에 은행들은 MBS 채권을 발행해 댔다.
MBS는 다시 말해 은행에 돈이 없는데 더 큰돈을 벌고 싶어 전주들의 돈을 노리고 만들어진 제도란 뜻이다. 은행이 책임질 일이 없으니 MBS 채권을 발행하며 서브프라임 등급에까지 대출해 주기 시작한 거고,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발행된 MBS는 CDO와 함께 서브프라임 사태를 만든 주원인이었다.
정호준의 집무실에서 함께 수십 개의 뉴스 채널을 동시에 듣고 있던 아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하네요.”
8월까지 MBS와 CDO에 투자한 은행이나 투자사들을 운영하던 헤지펀드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다 9월에 들어서며 좀 진정세로 가나 싶었는데, 10월이 되자 또다시 위기가 시작되었다.
‘DT가 매각한 SIV들이 수면 위로 부상했네. 찰스들은 정말 나를 업고 살아도 모자라.’와 같은 속마음을 숨기며, 아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제가 말했었잖아요. 이 위기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거라고. 장인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셨다면 오늘 뉴스 일 면을 장식하는 건 아마도 ‘DT그룹’이었을 겁니다.”
1회차 때는 이 시기 다운타운그룹에서 운영 중인 SIV의 유동성 문제로 다시 한번 위기설이 돌았으나, 이번에는 DT(다운타운)그룹이 아닌 다른 은행들이 흔들렸다.
‘SIV(Structured Investment Vehicle: 구조화 투자 수단)’는 포트폴리오에 보유된 장기 자산과 발행한 단기 부채 간의 ‘신용 스프레드’를 얻기 위해 설립된 비은행 금융 기관으로 1988년 ‘DownTown Group’에 의해 발명되었다. SIV는 주로 ‘증권화’에 투자하며 대출에도 한발 걸쳤다. DT그룹의 SIV는 금융위기가 시작될 때까지 일반적으로 AAA 등급을 받은 상업 어음과 중기 어음 발행을 통해 회사채 및 자금 조달에 투자했었다.
SIV는 일반적으로 ‘역외 회사’로 설립되어 세금 납부를 피함과 동시에 은행 및 금융 회사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제 역시 피했다. 2008년 규제가 변경될 때까지 후원 은행이 일반적으로 일정 수준의 보증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로 인해 발생할 간접적인 제한마저 회피하고자 자산 관리 활동과 같은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제외했다.
2000년 이전에는 7개만 존재했던 DT그룹의 SIV는 힐링턴의 헌법 개정 이후 그 숫자가 무려 3배나 증가했다. 자산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4년에서 2007년 중반 금융 위기 직전까지 36개의 SIV가 운영 중이었고, 36개의 SIV가 관리하는 자산의 규모는 무려 4,000억 달러에 달했다.
찰스 로슬러는 정호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이 운영하는 SIV 중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다른 은행에 팔아넘김으로써 이번 사태를 피해 갔다. 찰스 로슬러의 이러한 조치는 로슬러 재단의 이사회가 그의 능력을 다시 한번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워낙 규모가 막대했던 만큼 DT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채권을 넘겨받을 수밖에 없었던 메릴리치는 조금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드만식스나 다른 금융 기관보다 훨씬 안정적인 재무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BA나 골드만에서도 DT의 SIV 부서를 일부 매입했다고 했었지?’
본래라면 구제금융을 받는 데 성공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골드만식스나 BA(뱅크 아메리카)가 먹어치웠을 것들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라 여긴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전혀 웃기지 않은 상황에서 미소를 짓자 아리아는 이상한 시선으로 정호준을 바라봤고, 아리아의 시선을 인지한 정호준은 황급히 둘러댔다.
“장인과 할아버님께서 제 뜻을 받아들여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제야 정호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아리아는 그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상황을 모두 꿰뚫고 있는 정호준의 안목에 정호준 새삼 더 멋져 보였달까?
갑작스럽게 추가된 콩깍지에 성욕이 올라온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부터 배란 주기니까 우리 힘내 봐요.”
노골적인 말에 다시 한번 당황스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곤 아리아와 입을 맞추었다. 짧은 버드키스를 나눈 뒤 말했다.
“우리의 주니어를 위해 힘내 보죠, 그럼.”
파릇파릇한 20대였기에 아직 밤이 무섭지 않은 정호준은 패기로 되받아쳤다.
* * *
10월 SIV에서 비롯된 손실 때문에 다시금 월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11월에도 그 혼란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월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심각한 사건이 11월 언론을 강타했다.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의 메이도프, 폰지사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다!]
본래였다면 2008년 12월 11일에 체포되었을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는 2007년 11월 23일 경찰에 의해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메이도프가 주장하는 수익률은 현실적으로 나오기 어렵다는 냉정한 계산을 마친 BA, 골드만식스, 윌스&피고와 같은 월가를 대표하는 기업들은 로렌스 메이도프가 운영하는 펀드에 월스트리트의 주요 기업들은 투자하지 않았지만, 욕망이 눈이 먼 자산가들이나 펀드들은 로렌스 메이도프가 창업한 투자회사에 자산을 투자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의심했지만 이윽고 주변에서 연마다 10%의 수익이 전달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BA 같은 곳은 자신들이 이미 그러한 뜻을 월가에 대놓고 이야기했기에 자존심 때문에라도 메이도프의 펀드에 투자할 수 없었지만, 이름값이 크지 않은 투자사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름값에서 비롯되는 자존심이 메이도프가 일으킨 폰지사기에 휩쓸리지 않게 도운 것.
“정호준은 대체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 거지?”
1회차 때 다른 메이저 은행들과 달리 찰스 로슬러의 입김이 닿는 곳들은 메이도프에게 돈을 투자했었다. 월가의 대형은행들과 달리 이사장 경쟁에서 밀리고 있던 찰스 로슬러는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킬 실적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로렌스 메이도프가 운영하는 펀드에도 자산을 투자했다가 서브프라임 사태 때 완전히 독박을 쓰게 되었다.
이사장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했던 1회차 때와 달리 정호준의 권고에 찰스 로슬러는 메이도프의 투자회사에서 원금을 돌려받았고, 찰스 로슬러의 막대한 투자금을 돌려주느라 자금이 떨어지는 시점이 훨씬 앞당겨진 것이다.
본래라면 찰스 로슬러의 원금을 돌려준 뒤에도 계속 버틸 수 있었겠으나, 서브프라임 위기로 자금의 유입은 멈추고 자금 경색을 해결하고자 자산가 및 투자사들이 하나둘 원금을 회수해 달라고 요청하니 자금이 금세 동이 난 것.
“이제는 녀석이 브루클린 브릿지를 판다고 해도 믿어야겠어.”
찰스는 손녀사위 덕분에 완전히 나락으로 빠질 뻔한 위기에서 벗어난 거라 생각했고, 정호준을 향한 믿음과 애정이 더욱 굳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