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55화 (155/335)

15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55)

그린스펀은 자신이 무리한 제안을 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정호준이 단호하게 거절을 했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신용으로 먹고사는(?) 금융인에게 누가 봐도 망할 게 분명한 것을 안전하다고 말하며 신용을 저버릴 짓을 하라니. 반대급부가 막대하지 않은 이상 웬만해서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역사가 길지 않아 여러모로 리스크가 막대한 JHJ Capital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사항이었다. 반대로 역사가 길다면 거짓을 입에 담은 곳이 망할 위기가 아닌 이상 거짓을 말하다 걸려 신용을 잃어도 버틸 수 있다. 미우나 고우나 긴 세월을 함께 한 만큼 자산을 옮기는 게 귀찮아서라도 그대로 두는 대중들이 많을 테니까.

JHJ Capital이 고객의 돈을 굴리는 회사였다면 이는 분명 커다란 리스크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린스펀이 이와 같은 무리한 부탁을 입에 올린 건 아무래도 정호준의 회사가 고객의 돈을 투자받지 않고 본인의 자산만 굴리는 개인 투자사처럼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고객의 돈을 굴리는 회사들보다 리스크가 작으니 그냥 한번 던져 본 것이리라. 조금이라도 숙고해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본론은 그 뒤에 나왔다.

“찰스 로슬러는 언제 움직일 생각인 겁니까?”

“장인어른은 왜 찾으시죠?”

“부동산 거품이 터지는 것을 기다렸잖습니까? 찰스 로슬러나 정호준 당신도요.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시죠. 지난 2년 동안의 행적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니까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거쳐 7명의 이사를 뽑는다. 그리고, 7명의 이사 중에서 대통령이 FRB 의장을 임명했고 의장의 임기는 4년으로 정해졌다. FRB 의장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금리 결정 등 통화정책과 같은 권한을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행사한다.

‘그래서 거물이라는 거지.’

FRB(연준)의 의장은 금융정책에 한해서는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달러는 지구촌에서 기축통화로써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FRB는 그 달러는 찍어 내는 곳이기 때문.

오죽하면 FRB 의장을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부를까?

모르긴 몰라도 개발도상국의 독재자보다도 더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졌으리라. FRB의 지분을 지닌 민간 은행과도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하기에 부패한 이가 임명될 수는 있어도 능력 없는 이가 자리에 앉는 경우는 없었다. 그 검증된 능력으로도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발뺌할 생각은 없지만, 행보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잘 아시면서. 아니, 뭐. 이 이야기는 쓸데없으니 그만하죠. 그린스펀 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인어른과 저는 지금 이 상황을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 될 일은 아니잖습니까?”

당한 놈을 무능한 인간으로 모는 게 바로 월가의 잣대 아니던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연준은 찰스 로슬러가 언제쯤 움직일지 알고 싶은 겁니다. 찰스 로슬러와 정 대표의 자금이 움직여야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질 테니까요. 게다가 연준이 움직이는 것조차 물밑에서 방해하고 있잖습니까?!”

찰스 로슬러는 연준이 빠르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입김이 닿는 이들에게 사태를 방관하게끔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 사실을 빠르게 눈치챈 것만 해도 그린스펀이 아주 무능한 인사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움직이는 거야 당연히 거품이 다 드러난 뒤에 움직이겠죠. 장인께서 거품이 남았는데 들어갔다가 손해 볼 분으로 보이십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3분기 막바지나 4분기부터 쇼핑을 시작할 생각이지만 그러한 생각을 굳이 그린스펀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모기지론의 붕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좀 더 이어 가기는 했으나 딱히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었습니다. 방문하신 노고에 대한 소득을 만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하네요.”

전 연준의장인 앨든 그린스펀과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마이클 스팬서라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모기지론의 부실을 일찌감치 눈치챘고, 돈을 벌기 위해 없는 상품까지 만들어 CDS를 사들였다. 마이클 스팬서의 그러한 행보는 부동산 부실로 인해 터진 폭탄의 크기를 더 크게 키운 셈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트레이더로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한 것에 불과하잖은가?

법으로 정한 선을 넘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뭔들 못하겠나. 자폐증을 앓고 있어 사교성도 좋지 않고, 남의 잘못을 캐치하고 아프게 후벼 파는 월가에서 트레이더로 일하고 있지만 그래도 시스템을 신뢰하고, 사회 전반을 생각할 줄도 아는 남자였다.

미국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 개인주의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 깊게 박힌 국가였고, 월가는 그런 미국에서도 가장 극심한 개인주의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월가에서 활동하면서 당국에서 요청하기도 전에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발견한 문제 해결법을 국가에 공유하려 한 마이클 스팬서의 행보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이클 스팬서의 선한 성향은 2년간 프리미엄을 내며 기다린 수확을 거둘 때도 확실하게 드러났다. 1회차 때의 일이기는 하나 마이클 스팬서는 충분히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음에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1회차 때의 일이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문제가 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CDS(Credit Default Swap:신용부도스와프)의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을 무렵 마이클 스팬서는 적당한 이익만 보고 빠졌다.

은행과의 원만한 합의(?)를 통해 적당한 선에서 CDS를 매각한 것.

‘5억 달러 이상을 스와프에 쏟아부었고, 연간 8천만 달러의 프리미엄을 내며 2007년까지 버텨서 수익을 냈지. 4배 정도 벌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나 모르겠네.’

정호준은 마이클 스팬서가 벌어들인 수익은 약 27억 달러 안팎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기억이 정확지는 않지만, 맞다고 가정한다면 프리미엄으로 낸 돈까지 합쳐 7억 달러를 원금 포함 32억 달러로 바꿨다. 수익률을 계산할 때 프리미엄을 낸 돈을 제하진 않으니 대략 원금의 4배 이상을 번 셈이다.

미래의 정보를 토대로 구글의 광풍이나 애플의 증자 전에 타이밍 좋게 올라타거나, 유가 선물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유발될 위기를 이용한 지수 선물 등으로 투자를 할 때마다 매번 10배 이상의 수익을 창출해 냈잖은가?

4배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투자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대단한 일이었다.

돈이 돈을 부른다는 법칙이 기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일푼에서 1억을 모으는 것보다 1억을 모은 시점에서 1억을 모으는 게 더 빠른 건 맞지만, 그 말이 5천억을 3조로 부풀리는 게 쉽다는 말은 아니었다.

똑같은 수익률이어도 큰돈을 소유한 사람들은 더 큰 수익을 가져가지만, 반대로 손해를 입을 때 겪는 피해의 정도 또한 컸다. 똑같이 4%의 손실을 봤어도 1조를 투자한 사람과 1억을 투자한 사람이 입게 된 손해의 크기는 다르잖은가?

‘14일이나 주말 지난 20일에도 풋옵션을 사 뒀다면 수익이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겠지.’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코스피도 닛케이도 20일에 회복세로 접어든 것을 확인하곤 정호준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27조를 버는 게 아니라 자칫 잘못했으면 27조를 물어 줘야 했을 수도 있다.’

서킷브레이커와 사이드카가 발동한 기억 때문에 그 전후로 지수 풋옵션을 사들였는데, 욕심을 부렸거나 날짜를 잘못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월요일 이후까지도 질질 끌고 갔거나 15일 이전에 지수 선물을 매입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니. 분명 적당한 선에서 합의한 이유는 더 있을 거야.’

선하다는 것만으로 그 큰돈을 벌 기회비용을 포기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모기지론의 거품이 꺼지고 망해 갈 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게 바로 마이클 스팬서가 사들인 CDS였다.

만약 스팬서가 CDS를 쥔 채 버텼으면 은행들은 더 큰 손실을 보게 됐을 거고, 마이클 스팬서가 운영하는 펀드는 본래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을 거다.

‘설마 돈을 더 벌어 주고 싶지 않아서 빨리 매각한 건가?’

문뜩 든 의심이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선한 것도 이유에 속하겠지만, 선하다는 것만으로 그 큰돈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누군가 정호준에게 묻는다면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리라.

‘선한 사람이라고 욕심이 없는 게 아니니까.’

정호준이 그런 생각을 품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첫째로 마이클 스팬서는 미국 부동산에 낀 거품이 얼마나 큰지, 모기지론의 채무불이행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거품 아래 숨겨진 부실이 얼마나 거대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큰 수익을 올릴 거란 걸 마이클 스팬서가 몰랐을 리 없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차단한 거지. 선을 넘지 않고 법을 지키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네.’

이 생각이 정호준의 머릿속에서 힘을 얻고 있는 이유는 마이클 스팬서가 앓고 있는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인간관계를 만드는 게 고역일 마이클 스팬서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크게 가해졌다.

공감력이나 사회성의 결여로 좋은 인간관계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이한테 고소, 소송, 협박과 같은 행위들이 반복되었으니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겠나. 때로는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강한 고통과 고난을 동반한다.

‘더 큰 돈을 벌 기회를 잡으며 더 큰 스트레스를 받기보단 적당한 선에서 끝낸 셈이지.’

돈은 많아서 나쁠 건 없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트레이더의 직업윤리를 어긴 셈이지만 돈을 까먹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본인의 판단을 믿지 않고 매일같이 독촉하고 소송까지 건 이들을 뭐가 이쁘다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추가로 받아 가며 더 큰돈을 벌게 해 주겠는가.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도 한몫했을 거고.’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이 든 순간부터 마이클 스팬서에게 월가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을 거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마이클 스팬서가 사들인 CDS의 발행처들이 연락해 온 사실을 정호준에게 알리며 선택을 토스했기 때문이다.

“저는 좀 더 기다렸으면 합니다. 스팬서 씨도 잘 아시잖습니까? 붕괴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걸. CDS의 가치는 점점 오를 겁니다.”

“그럼 좀 더 기다린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압박이 견디기 심할 정도로 강해지면, 저희 JHJ Capital 쪽으로 책임을 돌리십시오. 우리가 감당하겠습니다.”

CDS 계약을 체결할 때야 마이클 스팬서를 앞세우며 그 뒤에서 돈만 대 줬지만, 수확을 거두는 상황이 된 지금은 어차피 결국에는 들킬 수밖에 없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진 버티고 못 버틸 것 같으면 그때 책임을 넘기도록 하죠.”

어차피 들킬 거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정호준의 결정에 마이클 스팬서 또한 본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CDS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은행이 ‘갑’이었고 마이클 스팬서와 JHJ Capital이 ‘을’이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디폴트로 갑을 관계는 역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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