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49)
정호준은 몇 번이나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 것으로 이야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고본후의 무례를 용서했다. 유교적 사고 관념이 머릿속 깊숙이 박힌 60대 노인에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눈앞의 거인(巨人) 고본후를 1회차 때 좋게 봤기 때문이다.
‘참 뚝심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지.’
은성그룹은 대중들에게 이래저래 배려를 받지 못한 기업으로 유명했다.
은성 텔레콤의 경우 경쟁사들이 대통령의 사위고 공기업이라는 이유로 가장 나쁜 주파수를 배정받았고, 1997년 발생한 IMF 외환 위기 때도 정부는 은성그룹의 의사를 무시한 채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빅딜을 감행했다.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반도체 기업을 미래그룹에 넘기고 원치 않았던 화학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고본후 회장은 뚝심 있게 길러내 2010년대 중후반에는 배터리 산업의 강자로 부상시켰다. LS전자, 한국에서는 은성전자로 불리는 곳을 백색 가전의 강자로, 은성화학을 미래 산업인 배터리 업계의 강자로, 은성생활건강을 화장품과 생활용품의 강자로 탈바꿈시켰다.
대한민국 재벌의 역사를 훑어 보면 1세대, 2세대는 뛰어난 성과를 보인 경우가 많지만 3세대가 두각을 나타내는 건 은성그룹의 고본후 회장이 유일했다.
‘정태원 회장은 3세대 경영자로 보기 좀 어려우니.’
KS의 정태원 회장도 고본후 회장처럼 3대 회장이긴 하나, 그의 부친이 형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은 걸 고려하면 2세대 경영자로 보는 게 옳았다.
정호준은 당당히 실력으로 1등 하지 못한다면 비겁한 1등보다는 착한 2등이 되겠다며 ‘정도경영’을 외친 고본후의 경영철학이나 그 행보를 1회차 때는 인상 깊게 봤었다. 물론 오너가 정도경영을 외쳤다고 해서 은성그룹이 악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쭉 정도만 걸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기업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착해진다는 건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Don't Be Evil(악해지지 말자)’이란 문구를 기업의 모토로 세웠던 구골도 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뒤에는 슬그머니 그 문구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은성그룹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그저 오성이나 미래, KS와 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치고 다른 비교 대상들보다 덜 나빴을 뿐이다.
은성가는 한국 국민으로서 해야 할 것을 재벌이라는 이유로 미루지 않았고, 경영권과 관련해 다툼을 보이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분할하고 분할한 뒤에도 서로 돕고 도우며 냄새(?)를 풍겨 한국 국민들은 은성그룹을 호감 가득한 시선으로 보았다.
‘미래와 마찬가지로 재벌가 중 유일하게 자식과 손주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지, 아마?’
4세 경영자인 고광모의 경우 공과대학을 나온 뒤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재계에는 그조차 안 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부자나 정치인의 자제가 아니라도 명문대 이과생(공대)들은 종종 산업기능요원으로 군역을 대체하곤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산업기능요원은 꼼수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은성그룹을 호감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이유는 군역도 군역이지만 상속세를 지불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은성가 또한 기업이란 탈을 쓰고 있었기에 악할 때는 다른 기업처럼 악했으나, 군역과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것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물론 절세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활용하고 정부와 따로 쇼부도 봤을 거다.
하지만 그걸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합법적인 선에서 챙길 수 있는 혜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중요한 건 상속세를 납부했다는 사실이었다.
1회차 때는 돈도 많으면서 대체 ‘왜 저렇게 기를 쓰고 내야 할 것을 안 내려 할까?’라고 혀를 찬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상속세를 제대로 납부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인지 가진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뼈저리게 느꼈다.
단위가 커짐에 따라 돈을 돈이 아닌 숫자로 보게 됐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에 한했다. 세금이란 명목으로 주머니에서 빠지는 돈은 숫자로 인식되지 않고 더욱 뼈 아팠다.
타인에게는 수천만 원, 수억에 불과할 세금이 정호준에게는 수천억 아니 조 단위에 육박하니 저들이 왜 탈세를 했는지도 깨달았다.
세금이 아까워 죽겠음에도 정호준은 탈세를 범하는 우를 벌이지 않았다.
‘IRS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다지?’
미국은 탈세를 중범죄로 여기는 나라다. 이민자 출신인 그의 경우 괜히 수 쓰다가 동양인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얻어맞을 수도 있다. 매를 굳이 사서 맞을 필요는 없었기에 아까워도 낼 건 냈다. 세무사,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합법적인 절세를 하는 선에서 그쳤다.
은성그룹도 눈앞의 고본후도 정호준이 호감을 품은 대상이었기에 기왕 컨설팅을 하는 거 다른 쪽도 관여를 시작했다.
“기왕 컨설팅을 드리니 하는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들은 중국이나 해외로 이전하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한국의 인건비가 결코 싼 편이 아니란 사실 알고 하는 말이죠?”
기업이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인건비다. 이 말은 곧 인건비를 적게 들이면 드릴수록 매출에서 차지하는 순수익이 증가한다는 말이었다. 고본후는 금융 쪽에서 일하다 보니 인건비가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르는 게 아닌가 싶어 그 점을 지적했다.
“과거 일본과 한국 기업의 사례를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빼 왔던 것처럼, 중국 기업도 얼마든지 한국 기업의 기술을 빼 올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전자, 통신, 조선 등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을 열심히 뒤쫓아 가고 있을 무렵 한국 기업들은 산업스파이를 일본 기업에 심어 기술을 훔쳤다. 한국이 성공적으로 기술을 탈취할 수 있었던 건 산업스파이가 은밀해서라기보다는 일본인들의 자만심 탓이 컸다.
‘주제에 전자 사업을 하겠다고?’
‘조센징이 배운다고 알기나 하겠어?’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이나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일제의 치하 때보다 더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한국에 대한 편견으로 경계를 늦췄고, 덕분에 한국 기업들은 하나둘 노하우와 기술들을 축적할 수 있었다.
“한국도 아니고 중국이나 다른 외국 땅, 남의 나라에서 기술 유출에 대비하면 얼마나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이 할 수 있는데, 중국이 못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2020년대에도 ‘Made in China’의 신뢰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중국이 바짝 따라오고 몇몇 분야에서는 오히려 한국을 앞지르기도 했다는 걸 정호준은 인지하고 있었다.
기술 탈취는 중국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의 인건비가 급부상해 더는 수지에 안 맞아 동남아 국가로 공장을 옮긴 뒤, 베트남의 경우는 기술 탈취가 더 노골적으로 벌어졌다.
사상과 안전을 이유로 당에서 설계도를 검토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란 말인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베트남은 했다.
“공산당입니다. 저들이 언제 어떻게 비상식적인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겁니다.”
공산주의는 언제나 상상 이상을 보여준다.
“으으음.”
실제로 훗날 해외로 나갔던 대기업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했다. 정부의 요구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게 과연 정부의 요청 하나 때문에 벌어질 일이었을까? 정호준은 아니라는 것에 베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주 공장을 이전하며 공장을 새로 짓고 설비를 뜯어내 새롭게 설치하는 비용과 기술적 우위가 좁혀지는 것을 모두 고려하면, 인건비로 얻게 될 순이익의 감소는 그리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적자를 보게 되면 그때는 이전해야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대한민국 기업들이 산처럼 쌓아둔 사내보유금의 규모가 줄어드는 일은 발생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쌓아 두고 쓰지도 않을 돈. 조금 덜 쌓이면 어때?’
공장을 한국에 그대로 유치함으로써 한국이란 나라가 얻게 될 경제 체력이나 기술적 우위를 지켜 시장에서 좀 더 점유율을 지킬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정호준과 아리아는 하와이 호놀룰루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엔 중간고사를 부랴부랴 준비하다 보니 이미 4월의 반이 지나간 뒤였다.
정호준과 1시간가량 상담을 이어 갔던 고본후 회장은 정호준에게 컨설팅 비용으로 300억을 보내왔다.
‘1,000억 들여 헛소리를 들을 걸 잘 말해 줬으니 이만하면 됐나?’
돈을 바라고 상담을 해 준 게 아니라고, 다시 되돌려 줄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받았다. 사실 300억 원이 아니라 수천억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조언이었으니까.
다만 굳이 주지 않아도 될 컨설팅 요금을 지불한 덕에 정호준의 마음속에서 은성그룹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더 상승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야.’
2007년 4월 중순.
정호준은 인간의 추악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월가의 꼬라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다.
채무불이행률이 꾸준하게 치솟으며 매일 같이 불채자의 수가 갱신되는 데 반해 신용평가사는 서브프라임채권 등급을 하향 조정하지 않았고 서브프라임에 대한 모기지론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가격은 값이 상승했다.
이 말은 비전도 없고 3년 내내 적자만 보던 기업의 주가가 계속 상승세를 탄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이야기지.’
일단 가장 바닥에 해당하는 브로커들부터 문제였다. 소문을 들어 슬슬 서브프라임 CDO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도 브로커들은 고객들에게 CDO를 추천한다. 왜? 호구들이 돈을 잃는 건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에게 중요한 건 고객들을 구렁텅이에 빠트림으로써 벌게 될 돈이었다.
‘윤리적으로도 문제고.’
2007년 현재 미국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였다. 감독 기관(증권거래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이가 일정 기간의 텀 없이 자신이 감독하는 금융 기관에 취직한다. 듣기만 해도 문제가 될 법한 일인데, 그에 대한 어떠한 법적 제지도 없다.
미국 월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그저 윤리와 상식에만 맞지 않을 뿐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신용평가사가 등급을 조정하지 않는 건 처음에는 그저 돈을 받고 등급 장사를 하느라 그랬다면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그들이 하향 조정을 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갈 거란 걸 인지하고 밝히지 않은 거다.
‘제 손으로 폭탄을 점화하고 싶지 않은 거지.’
대형은행, 신용평가사, 보험사, 브로커. 모기지론과 연관된 모든 회사가 손을 잡고 조작에 가담한 거다. 그럼에도 정호준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있어도 주변에 밝기까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으니까.”
매달 빠져나가는 8천만 달러 이상의 프리미엄이 아깝긴 했지만, 곧 있을 그만의 잔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