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48)
정호준과 아리아의 결혼식에는 미국의 유서 깊은 재벌 가문이나 유명 정치인들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는 IT 신흥 재벌들 또한 자리를 빛냈다.
정호준과 인연이 있는 스티븐 잡스와 짐 쿡 또한 정호준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 중 하나였다.
“정 대표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결혼 축하하네.”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도 사업을 위해 가면을 쓸 줄 아는 짐 쿡과 달리 스티븐 잡스는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은 모르겠지만 짐 쿡에게 억지로 끌려 나온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본래 저런 인간이라는 것을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정호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발표 잘 봤습니다. 직접 가서 봤는데, 참 인상 깊었습니다.”
세상을 스마트폰의 등장 전후로 나뉘게 만드는 기준점이 된 발표로 스티븐 잡스의 발표는 창업자 및 월가의 발표 양식 자체를 뒤바꿔 놓았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을 직접 그 자리에서 경험하고 싶었던 터라 정호준은 스티븐 잡스의 발표회에 아리아와 함께 참석했다.
정호준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순간을 함께 했다는 충족감을 얻었다.
다만 정호준 때문에 회사를 뒤집으며 없는 스파이를 찾기 위해 난리 블루스를 해 댄 터라 애플폰 발표는 본래의 역사처럼 1월 7일에 개최되진 않았다. 2회차에서 애플폰 1세대 출시 관련 발표는 본래 발표보다 6주 후인 2월 18일 일요일에 개최되었다.
본래 발표보다 1달 이상 늦게 발표됐지만 그렇다고 대중의 반응이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회차인 현재도 대중들은 애플폰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로 여기며 애플폰이 출시되기를 고대했다.
“위즈와 너도 기간 내에 프로그램을 완벽히 만들어 냈더군. 덕분에 발표할 게 하나 늘었다. 고맙다.”
문자를 보내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문자와 달리 채팅방이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 등 차별화할 만한 것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게 정말 고맙다는 사람의 태도인가?’
엎드려서 절받아도 이거보단 나을 것 같다.
눈앞의 남자가 거인이긴 하지만 이런 무례를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스티븐 잡스의 감사 인사(?)에 짐 쿡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며 중재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면 괜히 얼굴을 붉혔을 거다.
‘좋은 날 괜히 화낼 필요 없지.’
쿡의 눈물겨운 노력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상부상조한 거죠.”
유니버셜 히치는 잡스를 통해 광고해서 좋고, 잡스는 애플폰이 본래의 모바일폰과 다른 차별점을 알림으로써 애플폰이 특별하다는 것을 어필한다. 정말 상부상조라는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 * *
기분 나쁜 일과 좋은 일은 함께 온다는 말마따나 잡스 때문에 나빠졌던 기분을 풀어 줄 사람이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역한 박기태와 박기태의 부친 박남정이 정호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와 주었다.
“호준아, 결혼 축하한다. 네가 정말 남자가 되는구나.”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림으로써 진정한 남자가 된다는 게 한국의 중년 및 노년층들의 사고다. 박남정이 아들인 박기태에게 친구 같은 아빠로 지낸다지만 사고방식은 기성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혼 축하해, 건방지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네가 이 형님보다 빠르네.”
“형님은, 누가 봐도 내가 형이라 분명히 말하지 않았었나?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볼 수도 있는데, 기죽지 말고. 그나저나 누구셔?”
박남정과 박기태가 그에게 반가운 얼굴들이긴 했는데, 초대하지 않은 꼬리를 하나 달고 왔다. 인자한 외모, 조선 시대의 성품 좋은 만석꾼이 이런 외모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노년의 남성과 함께 왔다.
노인의 이름은 고분호. 은성그룹 2대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이였다.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이렇게 동행을 청하게 됐습니다. 미리 연락도 없이 동행해 죄송합니다.”
“이야기도 못 해 미안하다. 기업의 앞날이 걸린 문제라 말씀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다.”
고분호는 한참 어린 정호준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고 고분호 회장이 사죄를 청하자마자 박남정까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직원들을 인질 삼았나 보네.’
대한민국에서 재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돈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원들의 일자리를 가지고도 정부와 협상해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낸다.
박남정이 협박에 굴할 타입은 아니니, 은성기업을 통해 밥 먹고 사는 이들을 언급한 게 눈에 훤했다. 박남정이 고개를 숙이고 절친인 박기태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정호준이 거기다 대놓고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대화는 식을 다 치르고 난 뒤 피로연 때 나누는 걸로 하시죠. 잠깐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제 친구와 박남정 감독님이 기죽지 않게 옆에서 도와주십시오.”
대기업 회장의 체면을 챙겨주는 게 대한민국을 위해서, 그리고 친우인 박기태와 은인인 박남정을 위한 일이었다.
“고맙네, 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겠네.”
* * *
손님맞이를 마친 후 정호준의 결혼식은 식순에 의거해 진행되었다.
화동이 먼저 꽃을 뿌리며 입장했고, 이후 아리아가 부친인 주니어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예쁘네.’
새하얀,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게 분명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아리아는 마치 천사가 다가오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장인인 주니어로부터 아리아의 손을 건네받은 정호준은 아리아의 손을 잡고 주례자를 향해 걸어 나갔다.
“새로운 세대의 결합을 볼 때면 항상 느낍니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걸…….”
결혼식 주례는 현 대통령이 부친이자 본인 또한 대통령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뉴먼이 봐주었다. 축가는 할리우드의 전설 중 하나인 톰 베넷이 불러 주었고.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고분호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참 아까운 청년인데.’
결혼식 예식에 도움을 준 이들의 면면만 봐도 로슬러가의 위세를 짐짓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로슬러가가 동양인인 정호준을 사위로 선택했다는 것으로 정호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남자인지를 확인한 셈이다.
로슬러 가문이 동양인이라는 약점을 감수할 정도로 능력 있는 이를 혈연으로 끌어올 기회를 놓쳤다는 게 참 아쉬웠다. 고분호가 아쉬움을 느끼든 말든 식은 식순에 의거 별 탈 없이 계속 이어졌다.
신랑인 정호준의 들러리(Best Man)는 당연히 박기태가 맡았다.
“……, 내가 친애하는 친구 호준이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주께 기도합니다.”
버벅거림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습을 해 왔는지 영어로 정호준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식을 마친 뒤에는 식을 올린 그 자리에서 본격적인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 아리아와 사교춤을 췄고, 정호준과 아리아의 춤이 끝난 뒤에는 찰스 로슬러 주니어와 장모의 댄스 타임이 이어졌다. 정호준이나 아리아의 친우들을 제외하면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의 연령대가 높은 만큼 미국에서 열리는 여느 결혼식과 달리 댄스 타임이 길지 않았다.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월가의 신성을 만나 반가웠네.”
짧은 댄스 타임을 즐긴 뒤 정호준은 찰스 로슬러, 찰스 로슬러 주니어의 소개를 받으며 결혼식에 참석한 거물들을 만나 얼굴도장을 찍었다.
* * *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정호준의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때 은성그룹의 구본후 회장은 아무래도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구본후와의 만남은 정말 막바지에서나 성사되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말도 안 하고 찾아왔는데요, 이렇게라도 시간을 내줘서 고맙습니다.”
오래 기다렸음에도 구본후는 오래 기다렸다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한번 자신이 무례를 사과했다. 어려도 한참은 어린 정호준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과감함에 정호준은 구본후 회장이 저지른 무례를 마음속에서 지우며 호의를 갖고 질문했다.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저를 찾아오신 이유,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 혼자는 판단이 어려운 일이 있어서, 정대표에게 컨설팅차 왔습니다.”
“감이 안 잡히는 일이요?”
“스티븐 잡스가 2월에 발표했던 애플폰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한때 반짝 유행하고 끝날지, 아니면 대세로 굳혀질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감이 안 잡히는구먼. 값이 비싸서 소비자들이 구매하기 부담스럽지 않겠소?”
고본후의 질문에 정호준은 또 한 번 자신이 역사의 변곡점 한가운데 서 있음을 깨달았다.
애플폰의 출시 이후 은성전자는 무려 1,000억 원을 들여 맥킨디드&컴퍼니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당시 컨설팅 보고서에는 애플폰을 ‘찻잔 속 태풍’이라 평가하며 기술보다 마케팅으로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한 건지, 미국 기업인 엔플을 도와 경쟁자인 은성을 떨구려고 했던 건지. 정답은 컨설팅을 진행한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어쨌건 은성전자는 1,000억 원을 들여 컨설팅을 진행한 만큼 보고서대로 스마트폰을 따라가며 기술 발전에 돈을 투자하기보단 마케팅에 힘썼다.
그러나 맥킨디드&컴퍼니가 보내준 보고서와 달리 휴대폰 시장은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다.
은성전자의 결정은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3위까지 올랐던 은성전자가 핸드폰 사업부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는 악수(惡手)가 되었다.
은성전자도 뒤늦게나마 쫓아가려고 발버둥을 쳐보긴 했으나 잠깐 반짝일 뿐 ‘뒤처졌다’라는 소비자들의 인식을 메꿀 수 없었다. 2015~2019년 누적 적자가 4조 9,000억 원에 이르렀고, 결국 은성전자는 핸드폰 사업부를 철수해야 했다.
“저는 스마트폰의 시대가 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근거가 뭡니까?”
“일단 스마트폰의 가격을 문제 삼으시는데, 피처폰도 고가에 판매하고 있긴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지원금 명목으로 할인을 해주기는 하나 피쳐폰도 수십만 원을 주고 사야 하는 판국이다. 20~30만 원이나 더 주고 스마트폰으로 구매하는걸 소비자들이 꺼릴 이유는 없었다.
“좋은 것, 편리한 것, 예쁜 것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편리함과 브랜드화를 앞세운 스마트폰에게 피처폰의 아성은 무너지게 될 겁니다.”
“정대표는 본인의 의견을 어느 정도나 확신합니까?”
“제 확신을 보여드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제가 엔플의 대주주라는 걸 밝히는 거겠네요. 트레이더가 실패할 리스크가 큰 곳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겠습니까?”
내 돈을 투자한 상태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보증보다도 신뢰가 갈 만한 보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