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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43화 (143/335)

14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143)

이성을 갖고 생각하면 정호준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는 정론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진실이 항상 사람에게 이로운 건 아니었다.

인간은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 이성적으로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섭섭함이 드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

정호준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옅게라도 미소를 띠는 모습만 보여 왔던 아리아 로슬러가 처음으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이 되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정호준은 말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아리아를 보며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 갔다.

“나는 분명 아리아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어요. 좀 더 깊어지면 애정으로 변모할 거라 확신도 합니다. 하지만 호감이 애정으로 변한다 해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고 통이 큰 남자가 아닙니다. 나는 소심하고 욕심 많은, 그리고 그저 운이 좋은 평범한 사람이에요.”

정호준의 성공을 운이 좋았다는 말로 평가하기엔 여러모로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미국 부동산이 붕괴할 것을 온갖 지표를 들이대며 로슬러들을 설득하던 정호준의 모습을 지켜봤다면 그 누구도 정호준의 성공을 운으로 치부하지 못하리라.

“운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앞에서 미국 부동산 붕괴를 외치던 호준의 계산이 너무 냉철하던데요?”

아리아는 그 점을 지적했지만.

“그렇다면 그 치밀한 계산을 우리의 정략결혼에도 적용했다고 생각해 줘요.”

정호준의 뻔뻔함에 다시 한번 아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미국 재계에서 혼전계약서는 알음알음 사용되는 계약서다. 이 계약서는 주로 재혼하는 자산가들이 애용했다. 소송의 나라라 불리는 미국에는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내려고 독하게 달려드는 변호사들은 쌔고 쌨다.

특히 자산가들의 이혼소송의 경우 아예 로펌의 팀이 붙어서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번 이혼을 경험한 만큼 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자산가들은 두 번째,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사전에 받아 놓곤 했다.

이혼 시 아리아가 여러모로 유리할 거라 계산했다는데 대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나.

시간을 달라며 사인을 미루는 게 그녀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정호준이 아리아에게 혼전계약서를 내민 일은 고스란히 찰스들의 귀에 들어갔다.

“고얀 놈.”

“괘씸합니다.”

찰스 로슬러와 찰스 주니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아리아에게 연락이 온 거라 찰스들의 입에서 심한 쌍욕은 나오지 않았다.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자식이나 아버지 앞에서 F자로 시작하는 쌍욕을 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아리아는 성격, 외모 모두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손녀(딸)다. 아무리 정략의 의미를 지닌 혼인이라지만 그런 손녀(딸)을 데려가면서 재혼할 때나 들이밀 법한 혼전계약서를 들이미냔 말이다.

아비로서 할아비로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혼을 염두에 두는 것도 화가 났고, 본인도 이혼을 경험한 바 있기에 정호준이 내세운 변명을 반박할 거리가 없어 또 한 번 화가 났다.

그런데 자존심 때문에 정략을 돌이키기엔 정호준이란 인간이 너무 탐난다는 점이 또 문제였다.

“주니어, 녀석의 예측대로 부동산에 거품이 빠지게 되면 녀석의 자산은 얼마나 불어날까?”

“못해도 5배는 벌 겁니다.”

큰돈을 벌기는 하겠으나 신용부도스와프를 공매도할 기회가 와도 뻐팅기며 완전한 제값을 받아 내진 못할 거다. CDS 채권이라는 게 본디 그랬다. 은행이 순순히 돈을 줄 리 없으니 어쩌면 소송도 감수해야 할 거다.

‘그 협상에서 우리 로슬러를 팔아먹을 놈이, 결혼식 이전에 벌여 놨던 것에 대한 권리를 없는 걸로 하자고?’

밀고 당기는 협상을 통해 받을 금액을 찾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본래 베팅한 금액에 5배는 벌 수 있을 거라는 게 찰스 로슬러 주니어의 결론이었다.

“그럼 최소로 잡아도 1,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재산분할 목록에서 제외하겠다는 건데, 이걸 그냥 두고만 봐야 할까?”

부친의 질문에 찰스 주니어는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결혼 전에 일궈 낸 것들을 모두 제외한다 했으니 광산 매각금이랑 수호이 로그 금광도 제하는 게 맞을 겁니다. 녀석의 안목을 생각하면, 녀석이 투자한 스타트업들도 최소한의 성공은 거둘 거 같고요. 자산 규모를 2,000억 달러로 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들의 의견을 들은 찰스 로슬러는 할 말을 잃었는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찰스 주니어 또한 말을 마친 뒤 자신이 뱉은 말의 무게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는데. 그 생각은 바로 ‘이게 말이 되나?’였다.

복권 당첨, 광산 잭팟 등 이런저런 기적들이 한 손 보탰다지만, 21살 된 소년이, 아니 나이를 따지기 전에 겨우 3년이란 짧은 시간에 한 국가의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을 보유하게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로슬러들이 떠올리는 국가급 예산의 범위는 국내총생산(GDP)이 스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개발도상국들을 의미했다.

CDS는 청산하기 전까지는 수익을 예상하기가 힘들다. 로슬러의 예측대로 된다면 GDP 순위 10~15위를 오가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2006년 정부 예산이 144조 8,076억 원이었으니, 그들의 말마따나 세계에서 스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국가의 1년 예산보다 많은 자산을 보유하게 된 거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무거운 침묵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아~, 정말 자존심 상하고 분하지만, 그래도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리아 로슬러의 부친인 주니어의 입에서 정호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가주로서, 이사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입장으로서는 정호준을 받아들이는 게 맞다. 하지만 아리아의 조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기에 아들을 보며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다.

“애비가 돼서 자존심 안 상하냐? 너는 저 녀석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어?”

할아버지인 그의 자존심도 이렇게 상하는데 아비 된 입장은 오죽할까?

“상하죠, 왜 안 상하겠습니까? 지금도 가슴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하지만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더라도, 참고 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예측이 안 되는 녀석이잖습니까?”

3년 만에 1,00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모았다. 이후 정호준이 얼마나 더 많은 자산을 쌓게 될지 찰스 로슬러 주니어는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녀석도 언제든 고꾸라질 수 있다.”

가장 꼬꾸라지기 쉬운 때는 성공을 거듭해서 높이 올라갔을 때다. 올라간 곳이 높으면 높을수록 추락하게 될 나락 또한 깊다.

모두가 아는 원칙이었지만 당장은 정호준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녀석이 고꾸라질 시기는 당장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들의 대승적인 결단에 찰스 로슬러는 눈을 감았다.

* * *

혼전계약서에 사인하라는 조부와 부친의 연락을 받은 아리아는 정호준이 준비한 계약서에 사인했다.

하지만 사인을 했다고 아리아가 납득하고 쿨하게 이 사안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감정이 상한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잖은가?

정호분이 풀어 주려고 애쓰긴 했지만 10월 한 달 내내 냉전 분위기가 이어졌다.

깊은 관계로 발전한 후 처음 겪는 감정싸움이었다.

위기가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처럼 위기를 겪은 곳은 또 있었는데, 바로 정호준이 인수한 축구구단 리버풀이었다.

10월 중순까지 리버풀은 승승장구를 이어 나갔다. 본래라면 패배하거나(에버튼, 첼시) 무승부로 끝났을 경기에서 승리하며 남다른 기세를 뽐냈다. 리버풀이 전승을 기록하며 1위 자리에서 내려올 기색을 보이지 않자 콥들은 이번에야말로 우승할 것 같다며 매일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기록할 것 같다던 리버풀의 미래에 빨간색 경보가 켜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사건은 2위에서 바짝 추격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10월 22일 올드 트레퍼드에서 치른 더비전에서 터졌다. 정호준 때문에 팀의 레벨이 현격히 올라간 리버풀은 2:0으로 패배했던 1회차 때와 달리 전반에 득점과 실점을 하나씩 기록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라이벌 더비라 불리는 노스웨스트 더비의 명성에 걸맞게 경기는 시종일관 팽팽했다. 선수들이 느끼기에도 이번 시즌이 시작된 이래 가장 거칠고 치열한 경기였다.

리버풀의 불행은 후반전에 하나둘 터졌다.

후반전이 시작한 지 채 5분도 지나기 전 태클 못 하기로 소문난 스콜스의 태클에 리버풀의 핵심자원인 중앙 미드필더 알론소가 드러누웠다.

리버풀의 불행은 알론소의 부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반 80분, 루니의 역전골 때문에 2 대 1로 한 골 뒤지고 있던 리버풀에게 절호의 찬스가 만들어졌다. 제라드로부터 공을 넘겨받은 오언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부수며 스프린트를 시도했다. 가속하는 오언을 막기 위해 오언의 매치업 상대인 제리 네빌이 백태클 감행했다.

“마이크 오언, 부상인가요? 발을 부여잡은 채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유리 몸으로 잘 알려진 오언답게 네빌의 백태클에 부상을 입고 그대로 교체로 물러났다. 잔부상이 많은 오언이 9라운드 동안 부상이 없었다는 게 기적이었던 만큼 오언이 거친 경기에서 부상을 입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백태클을 한 네빌에게는 레드카드가 주어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경기 종료까지 10분 남기고 한 명이 적은 상태에서 경기를 이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킥 찬스를 살리지 못한 리버풀은 전원 수비라는 결정을 내리며 잠그기에 들어간 맨유의 벽을 뚫지 못했다. 리버풀은 1명이 모자란 맨유를 상대로 추가시간 3분을 포함해 13분 동안 맨유의 수비를 부수지 못했고, 경기는 2:1로 끝이 났다.

부상당한 선수가 2명이나 되는데, 뒤에서 추격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패배하기까지 했다.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베네테즈 감독의 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 * *

로보라는 회사는 본래 자동차 등 온갖 기계에 들어가는 베어링을 생산하는 작은 기업이었다.

회계 조작 등의 이유로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져 들어오는 것을 인지한 JS 그룹 조수도 회장은 감옥으로 가기 전에 크게 한탕 하기 위해 음지에 있는 몇몇 세력과 주가조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주가조작 대상으로 점찍은 기업이 바로 ‘로보’였다.

조수도 회장은 세력들과 저축은행 3곳을 통해 자금을 동원하기로 이야기를 마쳤고 증권가에 사정 급한 트레이더 몇몇을 끌어들여 주가조작과 관련한 실무를 보게 했다.

큰 그림을 모두 그린 그들은 계획한 대로 10월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식 매집과 매도를 반복하며 주가를 띄우기 시작했고, 주가는 1,185원에서 2,000원까지 올랐다.

11월 주가가 2,000원을 돌파하는 동안 상한가는 겨우 2번밖에 없었다. 상한가를 찍진 않았지만 주가가 매일 2~5%씩은 꾸준하게 올랐다.

보통 주가조작 사건은 연일 상한가를 치며 올라가는 것을 고려하면 주가조작치고는 꽤 이례적인 사례였고, 그 덕에 작전세력들은 금융감독원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수상하긴 하네. 참 귀신 같아.’

정호준으로부터 이야기를 전달받은 강현태는 로보의 주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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